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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종과 명성왕후의 쌍릉인 숭릉.
ⓒ 한성희
동구릉으로 들어서서 왼쪽으로 돌면 혜릉을 지나 비공개 능인 숭릉(崇陵)으로 들어가는 숲에 방지원도(方池圓島)가 있다.

방지원도란 쉽게 말해서 조선시대의 정원문화에 빠지지 않고 자리 잡았던 연못을 말한다. 네모난 연못 한 가운데 둥근 섬을 만든 인위적인 연못이다. 왕릉도 사후의 대궐이라 경복궁 향원지나 창덕궁 부용지 같은 방지원도를 조성했다.

조선 왕릉에서 현재 방지원도가 있는 곳은 드물지만 그 터는 작든 크든 간에 왕릉마다 빠짐 없이 남아 있다. 방지원도는 음양오행설이 담겨 있으며 당시의 사상이었던 성리학의 철학을 보여주는 조선만의 독특한 정원문화였다.

▲ 숭릉으로 들어가는 길 옆 숲 속에 숨어있는 방지원도(方池圓島). 네모난 형태는 다소 흐트러졌으나 아름다운 연못 가운데 나무가 솟아 있는 곳이 둥근 섬인 원도로 추측된다.
ⓒ 한성희
성리학의 우주관이며 자연관인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을 구현한 것으로 '양은 둥글고 음은 모나다'(陽圓陰方)는 뜻도 된다. 정원의 연못에 거창한 우주관을 담은 이 방지원도의 연못은 대궐과 왕릉에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건축의 한 부분이었다.

이 방지원도가 생긴 이유를 학문적으로 어렵게 말하면 성리학의 복잡한 우주관에 의한 철학의 결정체라 하겠지만, 쉽게 말하면 자손번영을 뜻한다. 네모난 연못은 땅이고, 둥근 섬은 하늘을 가리킨다. 유교의 근본원리인 음양설로 풀이하자면 땅을 음으로 보고 하늘은 양으로 보기에 방지원도는 음양의 결합을 뜻하는 형상이고 음양이 결합되면 자손이 많이 나온다는 얘기였다.

제사나 초상을 치를 때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싸울 거 없다. 제례나 상례도 <국조오례의>에 기본 양식이 적혀 있다. 국장이나 왕실의 제례에서 참여했던 사대부들이 듣고 본 것을 배워 자신의 집안에서 따라한 것이며 그것이 민초들에게까지 내려갔다. 자연환경, 주위환경에 따라 지방, 가문에 맞게 변형된 것일 뿐이다. 제사에 대추 놔라, 감 놔라 다툼이 있다면 국조오례의를 들쳐보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뼈대가 있다는 양반 가문의 초상 절차와 제사도 근원을 들여다보면 왕실에서 보고 배워 흉내낸 관습이다. 이 유교의식의 기본이 되는 <국조오례의>라는 것도 주자의 주자가례를 도입해서 확정한 것이니, 제사 지낼 때나 초상 치를 때나 결혼식을 할 때 이게 옳으니 그르니 집안끼리 다툴 일이 아니다.

집안마다 내려오는 관습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전통을 이어간다는 측면에선 환영할만한 일이나, 간혹 집안의 큰일을 당할 때 이런 유래의 절차를 두고 집안끼리 충돌하는 것을 보면 딱하다.

방지원도란 조선이 성리학의 유교사상에 입각한 나라였기에 나타났던 정원문화였고, 궁궐에 있는 연못을 보고 눈동냥 귀동냥으로 배운 사대부들은 조선 중기부터 똑같은 모양의 네모난 연못을 집이나 서원에 만들었다. 서원의 연못이나 한국의 대표적인 정원인 소쇄원도 방지원도의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 숭릉 앞에 흐르는 금천.
ⓒ 한성희
하여간, 숭릉으로 가는 숲길엔 이렇게 복잡한 의미를 가진 연못이 원형이 다소 흐트러진 채 자연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아름다운 연못에 들러 주위를 둘러보자 이름 모를 새들이 무수히 날아오른다. 연못을 끼고 물이 흐르는 금천을 건너 숭릉으로 향했다.

화려한 팔작지붕 숭릉 정자각

숭릉은 현종(1641~1674)과 명성왕후(1642~1683)의 쌍릉이고,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팔작지붕의 정자각을 얹고 있다. 숭릉은 중국화 바람이 선풍적으로 불던 시대에 조성된 능이라 전래의 맞배지붕 정자각에서 벗어나 중국 양식을 흉내낸 양식이다.

▲ 모화사상이 극심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현종의 정자각은 팔작지붕이다.
ⓒ 한성희
조선왕릉 중 가장 화려한 숭릉의 정자각은 익랑(翼廊)에 기둥이 하나 더 붙어 있고 단청이 눈에 들어왔으나, 내 눈에는 신권에 눌려 질질 끌려 다닌 현종답지 않은 모습이라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허울만 좋은 속 빈 강정격인 외래풍의 이 정자각과 중국 심양에서 태어난 현종과 어떤 연관이 있나 싶어 쓴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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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정말 북벌의 영웅인가?

현종은 봉림대군이었던 효종이 심양에서 볼모살이를 할 때 태어났다. 효종이 북벌의 야망을 불태우다 머리에 종기가 나서 41세의 나이로 피를 쏟고 허망하게 죽자 뒤를 이어 19세로 등극한 왕이 현종이다.

▲ 높은 숭릉 능침에서 내려다 본 정자각. 뒤에 구리시가 보인다.
ⓒ 한성희
숭릉의 능침은 능호처럼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8월 18일 고열과 설사가 심해 34세로 승하한 현종은 12월 11일 장사지냈다. 이 숭릉의 산역은 8도의 승을 징발해 2650명이 1개월분의 식량을 지참하고 일했다.

김우명의 딸인 명성왕후는 성격이 거칠고 머리가 비상한 왕비였다. 현종 시대는 병란 이후 강해진 신권이 극에 달했고 왕이 대신들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형국이었다. 당시 송시열의 권력은 왕권을 능가했고 주자학의 대가로 누구도 그의 학설에 이론을 꺼낼 수 없었다.

신진사대부들이 이상주의 유교국가로 출발한 조선은 병란 이후 사림천하를 이루지만, 이 사림들이 당쟁을 불러왔고 조선 후기 정치 혼란을 가져온 근원이었다.

주자의 해석과 다른 왕양명의 학설을 내세운 윤휴는 단지 문장해석의 차이로 송시열을 비롯한 주자학자들에게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맹렬한 공격을 받고 설자리를 잃게 된다. 실천중용관을 가졌던 남인이었던 윤휴는 '홍수의 변' 사건에 울고불고 난리 친 명성왕후를 비난했다가 사약을 받고 죽는다. 학문을 공작정치에 이용했던 사람들의 한 예에 불과하다.

현종대는 모화사상으로 무장된 권신들이 좌지우지하면서 정치를 이끌어나갔던 시대다. 이때 유명한 예송논쟁이 벌어지는데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여기서 단단히 한 몫 한다.

1차 예송논쟁에서는 서인의 편을 들어주다가 2차 예송논쟁에서는 남인의 편을 들어주는 등 권력청탁에 의해 움직였다. 홍수의 변 이후 왕따를 당한 김우명은 두문불출하다가 울화병으로 죽었다.

명성왕후는 현종을 후궁 하나 두지 못하게 할 정도로 단단히 단속을 잘했고 숙종과 세 공주를 낳는다. 현종이 죽은 후 9년 뒤에 창덕궁에서 죽어 현종의 곁에 묻혔다.

▲ 눈을 지그시 감은 무인석의 표정은 어딘가 탐욕이 엿보인다.
ⓒ 한성희
높이 솟은 숭릉으로 올라가 무인석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어딘가 탐욕스런 본심을 감추려고 눈을 지그시 감은 듯한 모습이다. 왜 숭릉의 무인석은 눈을 감았을까. 신하들 난리 치는 꼴 보기 싫어서 그런 것일까. 숭릉에 올라 당시의 정치상황을 생각하다보니 석물을 보고 감상적인 해석이 된 모양이다.

▲ 현종과 명성왕후 앞에 '신이 앉아서 쉬는 의자'인 혼유석이 놓여있다.
ⓒ 한성희
쌍릉으로 조성된 숭릉의 혼유석이 현종과 명성왕후 앞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혼유석은 제물을 올려놓는 곳이 아니라 신이 앉는 의자이기에 합장릉이라고 할지라도 왕과 왕비의 혼유석 두 개를 놓는다.

▲ 좌향을 나타내는 십이지 중 진(辰)이 난간석주에 새겨져 있다.
ⓒ 한성희
난간석을 살펴보니 좌향(무덤의 방향)을 나타내는 십이지지가 새겨져 있다. 풍수를 좀 알거나 24방위표를 볼 줄 알면 이 좌향의 글자를 보고 이 무덤이 어느 방향으로 있는지 알 수 있다.

비공개 능이라서 고즈넉한 숭릉은 그 옛날 복잡하고 피바람 불었던 온갖 사건들을 역사의 뒤편으로 묻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숭릉을 내려오면서 송시열의 건의로 현종10년(1669년)에 정해진 동성통혼을 금하는 법을 정해 오늘날까지 내려왔던 배경을 생각해본다.

불과 300여년 전에 금했던 동성통혼이 주자 맹신론자 송시열에 의해 제정된 것을 생각하면 우리나라만의 고유의 전통관습인 양 목을 맬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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