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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원릉의 대표적인 왕릉인 태조 이성계 헌인릉.
ⓒ 한성희

동구릉은 조선 왕릉 중에서 가장 넓으며 가장 많은 왕릉이 몰려 있는 왕릉군이다. 이곳에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비롯해 혜릉, 숭릉, 목릉, 경릉 등 9개 조선왕릉이 모여 있다.

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5월 4일 동구릉을 찾았다. 태릉 앞을 질러가는 넓은 대로가 시원하게 뚫려서 내가 탄 차는 태릉 국제 사격장, 태릉 스케이트장, 육사, 삼육대학교 등을 빠르게 지나쳐 갔다.

태릉을 지나면서 태릉선수촌으로 유명한 이곳이 문정왕후의 능에서 비롯된 명칭이라는 걸 생각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동구릉은 태릉과 인접해 있어 찾기 어렵지 않다.

5월의 더위는 후끈거리고 땀이 줄줄 솟게 만든다. 예정에도 없던 동구릉을 갑자기 가기로 결정하고 그곳으로 가면서 고양시지구관리소 박정상 소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구릉 관리소에 비공개 능답사와 능침 석물 답사에 협조해달라는 전화 좀 해달라고. 나는 왕릉 연재기사를 쓰면서 파주시 관리소에 있다가 지난 1월 고양시로 간 박 소장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

문화유산해설사들이 어느 왕릉을 답사하자는 계획 세우고 예정한 날짜에 가려고 하면 꼭 일이 생겨 어긋나는 바람에, 기회 닿을 때마다 후닥닥 가고 보자 식으로 행동한 것이 여러 사람 귀찮게 하긴 했다. 유적답사는 미리 공문을 보내서 허락을 받든지 아니면 적어도 이틀 전에 전화로 문의하는 것이 관례다.

▲ 관리소로 쓰는 재실 대문에서 오효석 소장을 만났다.
ⓒ 한성희

동구릉의 기인 오효석 관리소장

동구릉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동동거리면서 도착한 동구릉 재실 대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긴 머리에 빨간 야구모자 챙을 뒤로 돌려 눌러쓰고, 간편한 티셔츠를 입은 남자였다. 그는 4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아무리 봐도 문화재 관리사무소 직원이라기보다는 록 가수나 행위예술가처럼 보였다. 나는 입구를 딱 막고 서 있는 남자에게 괜히 기가 죽어 "관리소장님 뵈러 왔는데요"라고 웅얼거렸다.

"제가 소장입니다."

으잉? 정말 소장 맞아? 박 소장이 그런 말을 하긴 했다. 오효석 동구릉 지구관리소장은 예술가 타입이고 일에 정열적이며 문화유적에 대단히 박식하니 도움 많이 받을 거라고.

일순간, 어리둥절함이 지나가자 갑자기 유쾌해지면서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제가 만난 소장님 중에 제일 괴짜이십니다."
"한 기자님 기사는 제 컴퓨터 바탕화면에 즐겨찾기 해놓고 보고 있습니다."

솔직히, 경박스럽게 푼수처럼 헤헤거렸지만 글쟁이는 이 맛에 글을 쓴다. 사주는 사람 없으면 장사하는 사람 없듯, 봐주는 독자 없으면 글 쓰는 글쟁이 없는 것. 글이란 독자가 있어야 글의 생명이 살아나는 법이다.

"능에서 근무한 지는 16년 됐습니다. 그 이전엔 궁에서 한 5년 있었고요, 요즘 (문화재청) 혁신이 일할 맛 나게 합니다."

왕릉 이야기가 나오자 열성적으로 문화재청과 왕릉의 보존 방법, 관람객의 의식과 유적 관리인의 의식을 비교하며 분석하는 오 소장과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조선왕릉 전문가가 적다는 것에 오 소장과 나는 동의했다.

"연재를 쓰면서 저도 느꼈어요. 기사를 읽는 사람들의 관심을 가지면 왕궁만큼 학자들도 관심을 갖게 되고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겠지요."
"그렇겠지요."

문화유적답사라는 게 사람 중독 시키는 성질이 있다. 다른 곳을 보러 가자면 내키지 않아도, 왕릉을 보러 가자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달려 나가는 나 자신을 봐도 이해가 안 가는 일이다. 하물며 천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야 더하겠지.

▲ 숭릉 가는 길 금천 옆에 있는 연못은 온갖 새가 날아오른다.
ⓒ 한성희

그러고 보니 예전 화성지구 융건릉 관리소장이었던 목을수 선생도 괴짜인 면에선 오 소장과 비슷하다.

목 선생은 80년대 화성 관리소장 시절, 도지사가 온다고 정장을 하라는 말에 "내가 중앙부처 공무원인데 지방공무원인 도지사가 온다고 정장을 하냐"고 화를 벌컥 냈다는 사람이다. 왕릉관리소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에게서 정장차림을 보기는 사실 어렵다. 숲으로 둘러싸인 왕릉을 돌아보고 관리해야 하는데 넥타이 맨 정장차림은 불편하기 때문이다.

목 선생은 기어코 자기 고집대로 방문한 도지사를 선캡과 선글라스, 청바지를 입고 맞은 괴짜다. 하지만 도지사는 목 선생에게서 박식한 왕릉 설명이 좔좔 흘러나오자 그것을 듣고 그에게 반했다고 한다.

그 동안 만나본 왕릉 관계자들은 거의 전생에 능참봉이 아닌가 할 정도로 유적지에 애정을 쏟으며 계속 공부하는 모습이었다. 특히 괴짜들(?)이 더 실력을 갖췄다는 점은 유쾌하다. 이런 괴짜들을 만나서 숨겨진 왕릉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것도 왕릉 답사의 매력이다.

미치지 않으면 왕릉 답사는 재미없다

문화재에 대해 웬만큼 관심을 갖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왕릉 답사를 같이 해보면 진면목이 드러난다. 왕릉 하나 달랑 보고 오는 거야 재미있고 지루할 일도 없지만, 서오릉이나 동구릉처럼 왕릉군이 몰려 있는 곳에 가서 서너 차례 능침을 오르내리고 나면 다들 지쳐서 중간에 포기하고 만다.

동원이강릉은 두 언덕을 오르내려야 하고 능침이 세 군데나 있는 곳은 "다 똑같은 모양의 석물인데 뭘 보러 올라가느냐"면서 올라가려 하지 않는다.

동구릉이나 서오릉은 전문적인 답사를 하려면 하루로는 빠듯한 코스다. 60여만 평의 동구릉은 왕릉이 오밀조밀 있어서 많이 걷지 않아도 다양한 왕릉을 볼 수 있다는 재미가 있다. 대신 답사를 목적으로 다니는 사람에겐 숨 돌릴 여유가 없이 곧바로 또 답사를 시작해야 하는 부지런함을 요구한다. 쉴 새 없이 나타나는 왕릉을 돌다보면 지쳐버리는 곳이 동구릉이기도 하다.

▲ 유일한 삼연릉인 경릉.
ⓒ 한성희

서오릉과 서삼릉, 그리고 동구릉을 답사할 때 몇 차례 친구나 후배들과 동행해 봤다. 그냥 관심 정도만 가진 이들의 공통점은, 처음에는 왕릉답사에 흥미를 보이다가 두세 번 오르내리고 나면 힘들다며 싫증을 내고 더 이상 오르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구릉의 매력은 자연 그대로의 숲과 9개의 왕릉 문화재를 도심 가운데서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동구릉에 들어서서 왼쪽에서 시작하든 오른쪽에서 시작하든 한 바퀴 돌면 비공개 능을 제외하고 다 볼 수 있다.

답사를 시작한 지 1시간도 못 돼 두 곳의 왕릉 언덕을 오르내리고 나더니 힘들다며 경릉을 코앞에 두고 어디론가 사라진 후배를 놔두고 혼자 나머지 왕릉을 돌았다.

▲ 작은 산 정상에 올라 앉은 듯이 건원릉의 능침은 높다.
ⓒ 한성희

동구릉의 능상은 대개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건원릉은 조선의 태조인 만큼 동구릉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채 후손들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다. 여기까지 와서 건원릉을 두고 갈 수 있으랴.

오후에 도착했기에 동구릉 답사에 좀더 신중을 기해서 욕심 부리지 말고 서너 군데 능을 보는 걸로 마쳤어야 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건원릉은 봐야지! 목릉도 뺄 수 없지! 숭릉은 꼭 봐야 해! 원릉도! 하면서 욕심을 부렸다. 계속 연이어 나타나는 왕릉의 유혹에 빠져서 요것만 더 보고, 이번만 더 보고 하다가 목릉에 도달해서는 샌들을 신은 발바닥이 팅팅 부었는지 더 이상 버텨주지 않았다.

정자각과 비각을 해체보수 중인 목릉을 제대로 감상하긴 어려웠지만 선조의 능침에 오르기 전에 잠시 올려다봤다. 바닥이 평평한 샌들을 신고 올라가기엔 발바닥이 너무 아플 거라는 생각이 미치자마자 서슴없이 샌들을 벗어 들었다.

▲ 선조의 목릉 능침에 샌들을 벗어들고 맨발로 올라갔다.
ⓒ 한성희

정자각 공사장에서 일하던 아저씨들이 한 손에 카메라를 한 손엔 샌들을 들고 맨발로 능침으로 걸어 올라가는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까칠한 잔디가 혹사당한 발바닥을 지압해주니 시원했다.

무더위 속에서 9개 능을 다 돌고 타는 목마름으로 물 한 모금을 마시기 위해 관리사무소로 향했다. 그제야 다리가 뻐근하고 힘이 쭉 빠졌다. 왕릉을 돌아다닐 때는 다리도 잘 움직이더니 중독이 풀리자마자 금단증세가 나타난 것이다.

▲ 동구릉을 나오면서 저녁 햇살이 내려앉은 동구릉 입구를 되돌아보았다.
ⓒ 한성희

관리사무소에 도착해 연거푸 냉수 석 잔을 마시고, 그곳을 나와 차에 몸을 실었다. 나는 돌아가는 차 안에서 지친 다리를 주물렀다. 이때만 해도 무리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 몰랐다. 돌아오는 도중에 저녁을 먹으려고 들른 식당 앞에서 한 걸음 걷자마자 "아이구!" 비명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천근만근 안 쑤신 곳이 없을 정도로 걷기 힘들었다.

이 덕분에 어린이날 하루 종일 방바닥에서 드러누워 TV와 책을 보면서 "아이구 아이구, 허리야, 아이구 다리야, 엉덩이야"라며 낑낑 앓는 신세가 됐다. 동구릉 기사를 쓰는 신고식 한번 혹독하게 치른 셈이다.

덧붙이는 글 | 동구릉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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