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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과 우호의 조선통신사'가 부제로 딸린 <조선통신사>는 뜻 깊은 내력을 가지고 있다. 히로시마 현 교직원조합의 다섯 교사와 전교조 대구지부의 여섯 교사가 모임을 이루어 서책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출간작업은 2001년 8월 전교조 대구지부가 히로시마 교조를 방문하여 체결한 '상호교류와 협력에 관한 의정서'로 시작된다.

올바른 역사교육을 위한 공통 부교재 집필에 동의한 그들은 2002년 2월부터 2005년 2월까지 두 나라를 교차 방문하는 형식으로 진행된 7차례의 공동세미나를 통하여 <조선통신사> 출간에 이르렀던 것이다. 일본의 '아카시쇼텐' 출판사와 한국의 '한길사'가 동시출판을 실현함으로써 양국 교원노조의 노력은 세간으로부터 더욱 큰 빛과 반향을 얻게 되었다.

<조선통신사>는 모두 8부로 이루어져 있다. 도요토미의 조선침략부터 19세기 중반 통신사 단절에 이르기까지 발생한 여러 사건들이 연대기적으로 서술된다. 이 서책에서 내게 특히 흥미로웠던 대목은 제3부 '조선으로 귀순한 사람들'에 나오는 사무라이 '사야카 沙也可' 이야기와 제4부 '다시 파견된 통신사'에서 상세하게 기술된 '통신사의 편성'이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승리하게 된 배경으로 우리는 대개 이순신의 해상권 장악, 명나라의 지원, 의병활동 등을 거론한다. 그런데 <조선통신사>의 공동저자들은 여기에 '항왜'를 덧붙인다. 장기간의 전쟁에 지치고, 조명 연합군에 쫓기는 심리적인 압박감, 식량부족으로 인한 고통,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회의 등으로 괴로운 일본병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정부는 투항하는 일본병사들을 우대하는 대책을 내놓음으로써 적군의 투항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 기간에 1만 명에 달하는 일본병사가 조선에 투항하였으며, 이들을 '항왜'라 불렀다고 한다(반면에 조선인이면서 일본에 협력한 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순왜(順倭)라고 불렀다).

"항왜는 조선군에게 화승총과 화약제조기술, 검술과 포술 등을 가르치고, 일본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훈을 세우기도 하고 목숨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선조는 눈부신 활약을 한 항왜에게 벼슬을 주고 은으로 포상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징표로 조선의 성과 이름을 주었습니다."(64-66쪽)

사야카는 선조에게 김해김씨 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충선(忠善)이라 지었다. <조선왕조실록>과 그의 호 '모하당 慕夏堂'에서 유래한 <모하당문집>을 통해서 우리는 김충선의 인물됨을 알 수 있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하지만 사야카는 한 차례의 전투도 하지 않은 채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한다. 그가 쓴 강화서에 귀순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이번에 명분 없는 전쟁을 당하여 본의 아니게 선봉이 되어 삼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왔습니다. … 인의의 나라를 도저히 공격할 수 없어 저는 전의를 잃고 말았습니다. … 다만 저의 소원은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나라 조선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72쪽)

풍신수길이 일으킨 전쟁의 대의명분을 찾을 길 없던 사야카는 항왜의 길에 들어서 조선장수가 되어 경상도 여러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다. 그 결과 도원수 권율과 어사 한준겸 등의 주청으로 지금의 차관급 지위인 자헌대부에 오른다. 1600년에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혼인하여 우록동에 거처를 두고 살았고,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에도 큰 공을 세웠다고 전한다.

사야카는 일본인으로 태어나 22년을 살았으며, 김충선이 되어 제2의 조국인 조선을 위하여 50년을 살다가 1642년 72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다. 인조는 그에게 장관급에 해당하는 자헌대부를 하사하였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모하당문집>에 실린 한시 <남풍유감>에 드러나 있는 사야카의 인간적인 정리가 나를 격동하였다. 번역으로 전문을 옮긴다.

남풍 때때로 불 제 고향 생각하네/ 조상무덤은 평안한지 일곱 형제는 무사한지/ 구름을 보며 고향 생각하고/ 봄풀을 봐도 고향 생각하는 마음 어느 땐들 없겠는가/ 일가친척은 살아있을까 아니면 세상을 하직했을까/ 고향산천 그리움 끊일 날 없도다/ 나라엔 불충이요 집에는 불행 불러왔으니/ 세상 제일 큰 죄인 나 말고 또 뉘 있으랴/ 아마 세상에 흉한 팔자는 나뿐인가 하노라.(70쪽)

무의미한 전쟁을 반대하였던 평화주의자 사야카. 조국을 위하여 육순 노구를 이끌고 여진족과 맞서 싸운 애국주의자 김충선. 새로 정착한 우록동에서 가훈과 향약 등으로 백성교화에 진력한 정신적 지도자이자 사성 (賜姓) 김해 김씨의 시조 김충선. 그런 김충선도 끝내 고향산천과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을 잊을 수는 없었다.

낳고 길러준 부모와 나라를 버리고 적국의 장수로 동족을 무찌르는 일에 앞장서야 했던 사야카의 인간적인 번뇌가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다. 해마다 천여 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대구광역시 달성군 우록동을 찾고 있으며, 십여 년 전에는 일본에 사야카 연구단체들이 설립되었다고 한다. 임란 이후 400여년만에 사야카는 평화주의자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7년 동안의 전쟁이 끝난 9년 뒤 선조는 덕천가강의 국서에 대한 회답과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을 귀국시킨다는 의미의 '회답겸쇄환사'를 파견한다. 이로부터 1811년 순조 11년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는 모두 12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한다. <조선통신사>는 특히 1682년 숙종 8년에 파견된 제7회 통신사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정사 윤지완을 대표로 하여 모두 475명의 대규모 통신사가 파견되었는데, 지은이들은 제7회 통신사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한다. "7회 통신사는 의사만이 아니라 문재(文才)가 있는 사람, 한시 잘하는 사람, 서예나 그림에 능통한 사람, 악기연주의 명인, 춤의 명수 등 문화교류를 위한 다양한 인재가 선발되어 문화사절단의 의미를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89쪽)

통신사 구성원의 면모를 간략히 살피면, 우선 통신사를 인솔한 정사와 부사 및 종사관을 일컫는 삼사가 있다. 통사와 훈도는 통역을 맡았으며, 제술관과 사자관, 서기 등은 서도로 문화교류를 담당하였다. 일본의 요청으로 특별히 파견된 사람들로는 의원·영원·마상재인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오늘날 의사·화가, 곡마단의 기예단원이라 할 수 있다.

악대도 파견되었는데 전악은 지휘자였고, 고수는 큰북, 동고수는 꽹과리, 세악수는 장구·큰북·피리·해금을 연주하였다. 행렬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하여 기수나 월도수 등이 동참하였다. 별파진·자제군관·궁수는 통신사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소동들은 통신사 일행을 수행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노래와 춤으로 일행의 무료함을 달래주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살핀다면 조선통신사는 문자 그대로 대규모 문화 사절단으로 '문文'을 숭상하면서도 '무武'도 갖추고 있는 조선의 위엄을 일본에 널리 떨쳤다고 말할 수 있겠다.

<조선통신사>는 한양에서 에도, 즉 오늘날 서울에서 동경에 이르는 2000km의 길을 두 쪽에 걸쳐 지도를 통하여 상세히 보여준다. 이것이 서책의 두드러진 장점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은 조선통신사가 어떻게 한양에서 쓰시마로, 쓰시마에서 경도로, 경도에서 동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서 마무리한다.

"일본에서는 통신사 일행의 많은 짐을 운반하기 위해 총인원 30여 만명의 일꾼과 8만 마리의 말이 동원되었습니다. 통신사가 한양을 출발하여 에도에 이르기까지 6~9달 가까이 걸렸습니다. 통신사의 여정은 화려했지만 매우 힘든 여행이었습니다." (111쪽)

막부의 권위를 높이고 국내의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조선과 평화를 원했던 쇼군들의 통신사 환대는 극진하였다. 18세기 초반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데 막부가 사용한 비용은 대략 100만 냥이었다. 그런데 당시 막부의 연간 예산은 78만 냥 정도였다고 하니(156쪽) 통신사 접대가 얼마나 융숭한 것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초반에 이르러 일본에 이른바'존왕양이 尊王攘夷 운동'이 격화되고, 일본식의 화이의식(華夷意識)이 발전됨으로써 통신사에 대한 요구가 사라지게 된다.

1858년 일미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지고, 명치유신 등으로 요시다 쇼인 등의 정한론(征韓論)이 대두한다. 그것은 1876년 강화도 조약,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일한합방으로 구체화되고 말았다.

이 서책은 '조선통신사' 개념을 가지고 300여년의 시간대에 걸쳐 거시적이면서 미시적으로 양국관계를 살피고 있다. 실감나는 천연색 사진들과 지도, 인물화, 도해 등과 같은 다채로운 볼거리를 통하여 읽는 이의 이해를 돕고 있다는 점도 <조선통신사>의 장점이라 하겠다. 통신사가 받았던 밥상까지 사진자료로 재구성한 저자들의 노력이 실로 아름답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것은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한자를 병기하였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일본인들과는 아직도 한자로 필담이 가능한데도, 저자들이 원어표기에 지나치게 충실한 느낌이 든다. 한자 문화권에 동시에 거주하는 양국 독자들을 고려할 때 적절한 한자사용은 필수적인 작업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떨치기 어려운 터다.

덧붙이는 글 | 지난 4월 22일 오후 7시 대구광역시 문화웨딩에서 <조선통신사> 출판기념회가 성황리에 열렸습니다. 히로시마 교조와 전교조 대구지부 관계자들 및 대구 지역인사들이 참석하여 서책의 역사적인 의미를 조명하면서, 일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와 독도문제 등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진지한 분위기였습니다.

저 역시 말석에 한 자리 차지하고 <조선통신사>에 내재된 의미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나아갈 길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깊이 되새기는 계기를 가졌더랬습니다. 이래저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작지 않은 등불을 밝혀든 여러 선생님들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고개 숙입니다. 

<조선통신사>, 한일공통역사교재 제작팀 지음, 한길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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