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학 시절 나는 영국으로 두 달간 어학연수를 갔다. 유학생에게 세계 여러 나라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식당은 새로운 만남의 마당이었다. 외국 학생들은 모두 처음 만난 친구를 보면 "Where are you from?"이라고 물어본다. 나는 늘 "I was born in Japan, but I'm a Korean"이라고 답했다.

그러면 가끔 "South or North?"라고 물어보는 친구도 있었다. 그럴 때 나의 대답은 "Both"다.

이것은 내가 한반도의 통일을 갈망해서 나온 대답이라기보다는 실제 내가 남한사람이기도 하고 북한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나는 한국에 들어갈 때 '비자(사증)'를 받지 않고 여권을 받는다. 그리고 북한에 들어갈 때도 여권을 받는다. 이 두 나라의 국적법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남한은 정식여권이 아니라 '임시여권(여행증명서)'을 준다, 또 북한에 갈 때는 여권 안에 사증을 받는다. 하지만 양국 정부 모두 나를 자기나라 사람으로 인정하면서도 국내거주자와 동일한 대우를 하지는 않는다.

▲ 대한민국에서 발행한 여권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서 발행한 여권. 양쪽 모두 필자를 '국민'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 김향청
물론 일본은 유럽처럼 그 나라에서 태어나면 자국 국적을 부여하는 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일본인도 아니다. 과연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일까.

나는 남한사람이면서 북한사람이다

내 할아버지는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1912년 총독부의 토지조사령 때 생활수단을 잃고 만주 땅으로 건너갔다. 만주에서는 농사가 잘 됐지만 수확 시기가 되면 마적이 와서 곡식을 다 빼앗아갔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는 일본으로 향했고 일본에 정착한 뒤, 아내와 아들 셋을 이 곳으로 불렀다. 재일 교포 가운데 90%는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출신자다. 내 아버지는 1946년에 일본에서 태어났고 나 역시 1977년에 일본에서 태어났다.

식민지 당시 한국 사람들은 한반도에 살든 일본에 살든 다 '일본인'이었다. 한일합병조약(1910년) 때문이다. 일본 국적으로 살아오던 조선인들은 1947년에야 일본의 외국인등록령에 의해 외국인으로 조정됐다. 이 당시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대한민국도 없을 때여서 일본정부가 발행하는 외국인등록에는 '조선'이라고만 표기됐다. "조선반도 출신자"란 뜻이다.

당시 일본 정부 안에서는 재일교포가 일본국적을 유지할지, 아니면 한반도에서 새로 건설될 독립국가의 국적을 취득할지를 두고 당사자의 뜻에 따르자는 안이 검토되기도 했다.

그러나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발효를 계기로 일본은 "조선인 혹은 대만인은 내지(일본)에 사는 사람도 포함해 모두 일본 국적을 상실한다"는 조치를 취했다. 미국과 구소련의 대립이 격화돼 GHQ(연합군사령부)가 재일외국인들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1965년, 한일조약과 동시에 '재일교포 법적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이 맺어졌는데 이때 일본 정부 발행 외국인등록증 국적란에 '한국' 표기가 생겼다. 이때 '한국'으로 표기하도록 신청한 사람은 '영주권'을 갖게 됐다. 당시 일본정부는 '한국' 표기는 대한민국 국적을 의미하고 '조선'은 아무 국적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정했다.

▲ 국적란에 '조선'이라고 표기된 일본정부 발행 외국인등록증명서. 국적란 아래에 '경상북도 의성군'이라고 쓰여져 있다. 영주권이 있는 사람도 외국인등록증명서를 상시휴대해야 한다.
ⓒ 김향청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외국인 등록표기를 '한국'으로 했다. 이후 '조선' 표기로 남은 사람에게도 일본 정부가 영주권을 부여했지만 이때부터 재일교포들의 분단이 이뤄졌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 재일교포 약 60여만 명 중 영주권자는 약 46만 명이며, 그중 외국인등록 상 '조선' 표기자는 7만 명 가량으로 알려져 있다.(일본 법무성에서는 '한국'과 '조선'을 합쳐서 통계를 내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나와 내 가족들은 '조선' 표기자로 남았다.

외국인등록증 국적 표기 '조선'과 '한국'의 간격

당연한 얘기지만 일본정부가 발행하는 '외국인등록증'의 국적 표기는 개개인의 국적을 의미하지 않는다. 독일이 두 개로 갈라져 있을 때 재일독일인들의 외국인등록증에는 '독일'로만 표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 표기로 남은 사람을 "북한출신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다. '조선' 표기를 고수하는 재일 교포들은 알고 보면 대부분 한반도 남쪽 출신자들이거나 그 후손이다. 그들 나름대로의 분단정책에 대한 저항이었던 것이다.

남·북한 국적 관련 법 조항(일본어 번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법

1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은 다음과 같다.

1 공화국 창건 이전에 조선국적을 소유하고 있던 조선인과 그 자녀이면서 그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던 자

 

* 남조선과도정부 법률 제11호-국적에 관한 임시조례 

2조 다음에 해당하는 자는 조선국적을 갖는다.

1 조선인을 아버지로 출생한 자

2 조선인을 어머니로 출생하고 그 아버지를 모르거나 그 아버지가 어느쪽 국적도 소유하지 않은 경우

1930년 헤이그에서 채택된 '국적법의 저촉에 관한 제 문제에 관한 조약'에서는 개개인의 국적은 그 국적이 있다고 하는 나라의 법에 따라 정해진다고 되어 있다.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의 각각 국적법에 의해서 재일교포의 국적이 정해진다.

따라서 국적에 관한 임시조례 2조(남조선과도정부 법률 제11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법 2조에 의해 재일교포들은 양국의 국적을 갖고 있는 셈이다. 다만 두 나라 모두 이중국적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므로 법률상 정식으로 이중국적자라고 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남한 국적, 북한 국적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지금은 절차가 많이 간소화됐지만 외국인등록 상 '한국' 표기를 신청하려면 대한민국으로의 귀속의사를 명확히 할 문서가 필요하다. 그리고 정식여권을 받자면 한국에 호적을 두든지 국민으로 등록해야 한다.

'한반도' 국적을 가질 수는 없는 건가

몇 달 전, 내가 이사했을 때의 일이다. 이사할 때 관리회사에 외국인등록의 복사본을 제시했어야 했다. 일본에는 외국인을 거부하는 관리회사가 많지만 그런 문제 없이 일을 처리하게 돼 안심했다.

그런데 내 보증인(일본인)한테 관리회사 측이 전화를 해서 "북한사람의 보증을 서면 무섭지 않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전화를 했던 관리회사 직원이 한국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나는 상처받았다. 내가 '북한사람'이라고 불려서라기보다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여권. 안에 사증을 받는다.
ⓒ 김향청
나는 남북한 모두의 안녕을 바란다. 나는 분단된 한반도의 어느 한 쪽의 국적을 갖고 싶지 않다. 다행히도 북도 남도 나를 자기 나라 국민으로 인정하는 법률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한반도 출신자' = '한반도 사람'으로 자칭하겠다.

현재 북-일 국교정상화교섭이 침체 상태에 있지만 이 교섭이 다시 재개돼 교포들의 국적 문제가 논의되면 어떻게 될까. 한일조약처럼 외국인등록증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표기가 새로 생길 것인가.

남북 정부가 교포들의 국적을 정리하고 교포들의 '한반도 국적'을 정식으로 인정해 줄 날이 오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김향청씨는 일본 도쿄에 거주하는 재일교포 3세이며, <週刊금요일> 기자입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