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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일 양수철(현 서천문화원장) 전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장이 충남 예산군 충의사에 걸린 박정희 친필 현판을 철거한 뒤 박정희 현판 '교체'냐 '복원'이냐를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던 가운데 지난 15일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위원회(위원장 한영우)가 '박정희의 글씨로 현판을 복원한다'는 실망스런 결론을 내렸다.

사실 그러한 결정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되었다. 마치 사전에 서로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 유홍준 문화재청장, 박종순 예산군수 등은 이구동성으로 박정희 글씨로 현판을 복원할 것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박종순 군수는 3월 23일 박정희 현판 복원에 항의하여 방문한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를 비롯한 시민단체 관계자들에게 "충의사의 훼손된 현판을 박정희 친필 원본으로 원상 복원하는 예산군의 원칙을 바꿀 수 없다"면서 "박정희가 젊은 시절 군인으로서 성공해 보겠다는 일념으로 일본군대에 입대한 것은 개인적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당시 우리 나라에는 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수준 이하의 발언을 늘어놓았다.

▲ 수당문 현판 철거식에 참가해 축사하는 김완주 전주시장.
ⓒ 민족문제연구소
이런 가운데 지난 4월 19일 전주에서는 중앙 언론의 무관심 속에서도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 있었다. 그동안 친일경력이 문제가 되었던 삼양사 설립자 김연수의 아호를 따 전주종합경기장 정문에 붙어 있던 수당문(秀堂門) 현판이 전주시의 공식 후원으로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를 비롯한 지역 시민단체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철거된 것이다.

김연수는 인촌 김성수의 친동생으로 일제시대에는 국방헌금 또는 전시채권 매입을 통해 일제의 전쟁 정책에 적극 호응한 친일 매판 자본가이다.

정치권은 여러 차례 친일청산 의지 밝혔지만...

이날 행사에 참석해 축사를 한 열린우리당 소속 김완주 전주시장은 "오늘 행사에 오기 전에 행사 참석을 반대하는 전화를 많이 받았다"고 운을 뗀 뒤 "민족이 당한 치욕과 고통을 생각할 때 민족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는 친일청산이 꼭 필요하다"며 "광복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친일잔재를 청산한 예가 없었는데 전주시가 시민단체와 합리적인 절차를 거쳐 상호 합의하에 친일잔재를 철거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으며 앞으로 전국 지자체의 친일청산운동이 불길처럼 퍼져가길 기대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삼양사의 입장을 고려한 듯 "삼양사가 그동안 낙후된 지역 경제를 위해 공헌한 점은 수당문 철거와는 무관하게 인정받아야 한다"며 지자체장으로서의 고민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동안 정치권은 물론 대통령도 여러 차례 친일청산운동의 당위성을 밝혔지만 실제로 지역에서 이 운동을 전개하는 단체들은 항상 지자체의 무관심과 반대를 경험하곤 하였다. 그러나 이번 전주시의 경우에는 친일청산운동에 최초로 지자체가 동참한 사례로 그 의미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친일청산운동이 다른 지자체에 불길처럼 퍼져가길 기대한다'는 전주시장의 바람은 그저 희망사항으로 그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소식이 곧바로 들려오고 있다.

전주시장의 바람에 찬물을 끼얹은 장본인은 다름 아닌 같은 열린우리당 소속의 민종기 충남 당진군수이다. 민종기 군수는 최근 관내 삽교호 관광지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방문기념 홍보 영상물을 상영하기로 하고 관련 시설 설치를 빠르게 추진하고 있다.

▲ 1979년 10월 26일 삽교호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
ⓒ 박대통령인터넷기념관
당진지역 시민단체 관계자와 지역 언론 보도에 따르면 당진군은 삽교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피살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방문한 공식 행사장이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박 전 대통령의 삽교호 방문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홍보 영상물을 제작해 관광객을 대상으로 방영함으로써 관광객 흡인 효과를 증대시키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박정희 향수를 이용해 관광수입을 높여보자는 얄팍한 발상이다. 게다가 민종기 군수는 "아산시 도고면에 위치한 박 전 대통령의 별장을 아산시가 구입해 보전해야 했었는데 오히려 한 민간업자가 구입해 더 잘 관리하고 있다"며 "박 전 대통령 박물관을 짓는 것은 어떻겠는가"라고 관계 공무원들에게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니, 퇴행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그의 행보가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지 심히 우려된다.

집권당은 국민들의 친일청산의지 담아낼 그릇 가졌는가

삽교호 관광지 관리사무소 측은 반대 목소리를 의식한 듯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삽교호 관광지의 관광객 유치와 군 홍보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다"며 강행할 뜻임을 분명히 하며 5월에 예정된 제1차 추경 예산안에 반영한다는 방침이다.

영상시설 설치에 들어가는 비용은 제작 방식에 따라 적게는 5천만원에서 많게는 5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한편 이 지역에서 활동 중인 '박정희 대통령 추모회'는 매년 10월 26일 삽교호 관광지 기념탑 광장에서 박정희 대통령 추모식을 열고 있다.

17대 국회가 출범한 지 1년 지났다. 1년 전 불과 40여 의석에 불과했던 열린우리당은 자신들이야말로 친일청산을 이룰 수 있는 정당이라며 백범기념관에서 당직자 회의를 열기도 하고 박근혜 대표를 친일파 독재자의 딸이라며 몰아붙이며 '다수당이 되면 제일 먼저 누더기가 된 친일진상규명법을 올바로 개정할 것'이라고 호언했다.

그러나 과반의석을 가진 열린우리당은 친일진상규명법의 여러 독소 조항들을 그대로 둔 채 법을 통과시켰다. 게다가 4월 통과를 장담하는 과거사법 또한 관련 단체들이 '차라리 그런 법이라면 제정하지 말라'고 주장할 정도로 형편없는 법이 될 모양이다.

최근 염홍철 대전시장의 입당으로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천군만마를 얻었다'고 희색인 반면 적지 않은 평당원들은 '당의 정체성을 훼손했다'며 반발하고 있다. 남의 당 일에 일일이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이번 전주시장과 당진군수의 상반된 행보를 보면서 '친일청산'과 '과거사 청산'을 중단 없이 추진할 천군만마가 열린우리당에는 과연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 곰곰이 되새겨 보게 된다. 열린우리당은 과연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친일 역사 청산의 열망을 담을 만한 그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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