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독일에서도 최근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유례없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반일감정이나 시위 소식이 연일 언론을 타는 가운데 대표적 일간지의 하나인 <쥐트도이췌 차이퉁>이 지난 15일 '아름다운 역사'라는 제목으로 그 배경을 흥미롭게 분석했다.

이 신문은 독도 문제나 가스 시추를 둘러싼 일본과의 최근 분쟁이 각각 한국과 중국 국민의 고조된 분노에 불을 지폈지만, 반일감정의 배경에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역사교과서 문제'가 일찌감치 도사리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가령 일본 문부성이 허용한 중등학교 역사교과서에는 2차대전 당시 일본의 침략이 '전진'으로, 1937년 중국에서 자행된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이 우연한 '돌발 사고'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분쟁의 불씨'가 되어온 이런 역사교과서 문제의 진원지가 특히 '침략의 역사'를 애써 폄하하려는 일본 보수 세력이나 정치가들의 역사책 내용에 대한 영향력 행사라고 날카롭게 꼬집으며,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한국에서의 잔혹한 식민지배, 정신대 문제, 징용노동자 착취, 중국 포로 생체실험 같은 일본 현대사의 부끄러운 측면을 마땅히 제대로 언급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런 비판의 밑바닥에는 독일 자신의 '역사교육'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다. 일본과는 정반대로 독일의 중등학교 역사교과서는 나치시대라는 '부끄러운 역사'를 솔직히 밝히는 뼈저린 반성을 담고 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역사적으로 일본은 독일과 나란히 2차대전의 침략국이자 패전국이지만 그 후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서 독일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 왔던 것이다.

독일 신문이 지적하는 '반대되는 길'의 출발점은 '과거청산'이었다. 전후 나치 제국의 지도부를 철저히 일소한 독일과 달리 일본은 '침략전쟁'의 최고 책임자이자 '그의 이름아래' 수백만이 죽고 죽임을 당한 국왕이 전범 재판조차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이야 틀림이 없지만, 이 대목에 이르면 '독일은 일본과 다르며 그래서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기사의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공교롭게도 지금 두 나라는 똑같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에 들어가려고 갖은 힘을 다 쏟고 있기 때문이다.

기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동네 사람들에게 주먹질을 해댄 이웃이 지난 일은 잊자며 자신이 마을의 '안전보장'에 힘쓰겠다고 나서면 아직 멍 자국이 남은 이웃 주민들이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리 만무한 것은 누가 봐도 뻔한 이치다.

따라서 똑같은 '과거사의 부채'를 지고 있는 독일로선 역사 속에서 일본과의 차별화를 끌어내는 우회 전략이 필요할 수도 있는 상황이고, 독일이 일본과 달리 과거의 반성과 책임에 노력을 기울여 왔다는 주장은 '과거사'를 놓고 일본과 예리한 각을 세우고 있는 우리나 중국의 처지에서는 그런 대로 수긍할 만한 일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이 독일 신문의 지적대로 현재 한·중 두 나라에서 정점에 달한 반일 감정은, 일본 군국주의화의 우려뿐 아니라 이 '곱지 않은 이웃'의 안전보장이사회 참가 노력과 관련된 양국의 불편한 심기가 가미된 정치적 이해와도 맥이 닿아 있음을 깨끗이 부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양국의 반일 정서는 무엇보다 '부끄러운 역사'를 대하는 일본 자신의 '부끄러운 방식'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역사교과서' 문제 위에 '과거사'에 대한 일본 정치인들의 공공연한 망언이 겹쳐지며 일본 스스로 심심찮게 '반일감정'을 자극해왔음을 부정하기 어렵고, 이런 상황이 결국 이웃들이 일본의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입 노력을 더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배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본인들의 '과거사에 대한 태도의 역사' 그 자체가 '아름다운' 역사와는 한참 거리가 먼 역사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쥐트도이췌 차이퉁>이 기사의 제목으로 뽑은 '아름다운 역사'는 어떤 역사일까. 독일의 과거 청산이나 반성이 일본보다 나았으니 독일사가 아름다운 역사라는 주장은 아닐 것이다. 어떤 사후 반성이나 배상도 나치라는 '최악의 암흑기'를 독일사에서 지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역사에서는 아름다운 일보다 추악한 탐욕이나 무자비함 및 전쟁의 광기를 찾는 편이 훨씬 더 수월하고, 종종 아름다운 듯이 보이는 일들의 배후에 곧잘 별로 아름답지 않은 의도나 목적이 숨어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세계적으로 '부끄러운 역사 숨기기'나 '자랑스런 역사 만들기'의 유혹을 받지 않는 나라가 드문 실정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역사교과서를 신랄히 비판하는 중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중국의 티베트 점령이나 베트남 침공 같은 역사는 '숨기기'나 '폄하'의 유혹을 제대로 이겨내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 역시 베트남 전쟁에서의 양민 학살 문제가 역사교과서에 한치의 가감 없이 기록되는 일이 결코 손쉬워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흔히 애국심이나 민족적 자부심이란 허울 좋은 핑계를 일삼는 '자랑스런 역사' 만들기에 골몰하는 대신 '부끄러운 역사'의 어두운 구석을 숨김없이 밝히고 부끄러움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아름다운 역사'에 한발 다가서는 일이 아닐까 한다.

덧붙이는 글 | 부산일보에도 송고한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현재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있으며, 저서로는 『68혁명, 상상력이 빚은 저항의 역사』, 『저항의 축제, 해방의 불꽃, 시위』(공저), 역서로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 등이 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10·29 참사, 책임을 묻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