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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사이로 보이는 온릉 정자각.
ⓒ 한성희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있는 온릉은 비공개 능이기도 하지만 조선왕릉 중에서도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왕릉을 자주 찾는 사람들도 온릉의 존재는 잘 모르거니와 온릉이란 이름조차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살아서 단 7일 간 왕비자리에 있다가 쫓겨난 비운의 중종비 단경왕후 온릉은 장흥에서 의정부로 넘어가는 39번국도 옆 숲 속에 쓸쓸하게 숨어있다.

통일로에서 의정부 쪽으로 39번 국도를 따라 장흥 유원지를 지나치면 고개가 나온다. 고개를 넘자마자 좌측에 온릉 입구가 있지만 좌회전을 할 수 없어 한참 내려간 후 유턴해서 다시 올라와야 한다.

숲으로 가려져 있어 지나치는 차량들도 이곳에 능이 있다는 것을 거의 모른다. 자세히 집중해서 봐야 '온릉'이라는 작은 표지판이 서 있고 보자마자 작은 길을 곧장 좌회전해야 온릉으로 들어서게 된다. 아차, 하는 순간 지나치면 고개를 넘어간 뒤 되돌아와서 다시 고개를 지나 유턴한 후 들어가야 할 정도로 온릉은 숲 뒤에 숨어서 쉽게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문화재청 고양시 관리사무소에서 미리 연락을 받은 온릉 관리인이 문을 열어둬서 곧장 들어갈 수 있었다. 어쩌다 찾는 사람도 드문 온릉의 문은 평소엔 굳게 잠겨 있다. 번잡한 도로 옆에 붙어있으면서도 어떻게 이리 모른 척 숨어있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들어서자마자 어떻게 이렇게 다른 세계로 곧장 뛰어든 것 같을까.

꽃샘추위가 유난히 바람까지 몰며 기승을 부리던 지난 3월 17일, 온릉으로 들어가는 길은 아주 늦은 가을을 연상케 했다. 바람이 불면서 나목 사이로 낙엽이 찬바람에 쓸쓸하게 흩날리는 인기척 없는 숲 길. 마치 이름 모를 늦가을 숲에 혼자 서 있는 듯 온기라곤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쓸쓸함 그 자체였다.

▲ 재실
ⓒ 한성희
한적한 숲길을 조금 들어가자 재실이라기엔 너무 작지만 오랜 연륜이 남아 있는 한옥 옆에 관리 사무실로 보이는 조립식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재실은 1970년 39번국도 확장 공사 때 헐려서 그 재목을 추려 작게 다시 지은 것. 이 역시 발전의 논리에 희생당해 밀려난 문화재의 한 부분이다.

차를 세우자 토실토실한 하얀 강아지 두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짖는 것이 이 쓸쓸한 공기를 털어 내는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깨끗하고 정갈하지만 뭔지 모를 우울함과 황량함이 가시지 않는 온릉 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관리인 아저씨가 나온다. 인사를 마친 뒤 둘러보고 오겠다고 홍살문을 향해 걸어갔다.

단경왕후(1487-1557)는 신수근의 딸이며 중종(1488-1544)의 원비였지만 '7일의 왕비'라는 최단기간 왕비재위 기록을 세운 비운의 여인이다. 중종반정을 주도했던 박원종 등은 좌의정 신수근에게 중종반정을 제의했으나 신수근이 이를 거절하자 신수근과 그의 두 형제 수영·수겸도 함께 살해당한다.

당시 신수근의 누이가 연산군의 왕비였으니 누이와 딸 중 누이를 선택한 것이다. 중종반정은 이런 연유로 단경왕후 폐출이라는 조건을 달고 있었다. 중종은 반대했지만 옹립된 처지라 힘이 없었고, 반정세력으로선 단경왕후를 그대로 왕비자리에 뒀다가는 왕비의 아버지를 죽인 자신들이 보복 당할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 임그리다가 굳어버린 망부석을 닮은 문인석.
ⓒ 한성희
부귀영화를 누리던 단경왕후 집안은 하루아침에 쑥대밭이 되고 12세에 중종과 결혼해 살던 단경왕후는 20세에 사가로 쫓겨난다. 단경왕후는 치마바위의 전설을 만들만큼 중종을 그리워했지만 중종은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죽자 다시 단경왕후를 복위하자는 건의가 나왔으나 이를 물리친 것은 중종이었고 건의를 했던 박상과 김정은 유배를 간다.

"이미 원자를 봤는데 원비가 들어와서 아들을 낳으면 그의 아들이 원자가 될 것인가, 지금의 원자가 마땅한가?"

왕이라는 최고의 권좌에 앉은 중종에게 이미 옛 아내는 잊힌 옛 여인이었을 뿐이다.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은 지 6일 만에 산후병으로 죽자 택지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장경왕후와 함께 묻힐 쌍릉 자리를 마련하라한 중종을 보면 단경왕후에 대한 애정은 오래 전에 물 건너 간 것으로 보인다.

▲ <조선국 단경왕후 온릉> 비각.
ⓒ 한성희
야사에서는 중종이 자신의 어마를 일부러 단경왕후가 살고 있는 곳으로 보내 단경왕후가 중종을 본 듯 정성껏 말에게 쌀죽을 쑤어 먹여 보내곤 했다 전하지만 말 그대로 야사에 불과하다.

평생 중종을 그리워하다가 71세에 죽은 단경왕후의 복위는 1698년 숙종 때부터 거론 됐고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지만 사당을 짓고 제를 올리는 일은 시작됐다. 단경왕후가 죽은 지 182년 후인 영조 15년(1739) 3월 28일 단경왕후라는 시호와 온릉이라는 능호를 받는다.

온릉(溫陵)이라는 능호는 말 그대로 평생을 자식 하나 없이 중종의 따스한 손길만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온릉은 단경왕후 친정 집안인 거창 신씨의 묘역이었고 단경왕후는 이 근처에서 살다가 명종12년 이곳에 묻혔다.

뚜껑이 덮인 채 폐쇄된 옛 우물이 길 옆에 있고 홍살문 너머 정자각 앞에 수복방의 주춧돌들이 남아 있다. 비각을 들여다보니 '조선국 단경왕후 온릉'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이 비는 순조 7년(1807) 4월에 세운 것이다. 한국전쟁의 흔적일까. 총탄자국이 비석에 무수하다.

비각 뒤편에 군부대가 있다. 비각 뒤뿐 아니라 온릉 주변이 전부 군부대다. 이 군부대는 원래 온릉 정자각 앞에까지 주둔하고 있었고 옆으로 옮긴지 얼마 되지 않는다. 온릉의 면적은 6만6천여 평이지만 옆에 있는 군부대가 1700여 평을 차지하고 있다.

▲ 홍살문 뒤에 왼쪽 숲으로 뻗은 길 너머로 군부대가 있다.
ⓒ 한성희
조선 왕릉을 다니다보면 어김없이 왕릉마다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왕릉이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더니 군부대도 군사전략상 안전한 곳에 들어서서 그런가 싶다. 왕릉 명당과 군부대 함수관계는 이렇게 이해되는가. 조상들의 풍수 안목이 현대에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정자각 뒤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능상에 올랐다. 곡장 뒤에 솟은 잉을 보니 명당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하도 왕릉을 다니다 보니 이젠 나도 얼치기 풍수꾼 다 됐나보다 싶어 피식 헛웃음이 나온다.

▲ 단경왕후는 추존왕후이기에 무인석을 생략했고 석물은 단종의 장릉 양식을 따랐다.
ⓒ 한성희
온릉 석물은 숙종이 단종과 단종비의 석물에 간소화한 양식을 따른 것이다. 추존왕과 왕비의 전례에 따라 무인석을 생략하고 문인석을 세웠다. 무인석은 왕이 가진 군사통수권을 의미하는지라 추존 왕과 추존 왕비의 능에도 세우지 못했다.

간혹 조상이 유명한 장군인 후손들이 무인석이 무관의 상징인 줄 알고 자랑스러운 조상의 무덤 앞에 떡 하니 세우는 일이 있는데 이것은 무식의 소치일 뿐이다. 만약 조선시대에 사대부가 무인석을 세웠다면 당장 역적으로 몰려서 능지처참 당하고 집안이 절단 났을 것이다.

▲ 숙종이후 나타난 사각 옥개석과 사각 모양의 장명등.
ⓒ 한성희
간소한 사각 장명등과 전래의 절반 크기의 석물도 숙종 이후부터 나타난 양식이다. 무인석의 얼굴은 마치 중종을 그리워하다 굳어버린 망부석 같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주위를 둘러봐도 역시 가을의 허무한 쓸쓸함이 가시지 않는다.

다시 능을 내려와 관리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관리하는 아저씨가 사무실 뒤 숲에 신씨 집안 묘들이 8기가 있다고 일러준다. 나무가 솟아나 얼핏 봐서는 묘인지 모를 정도로 숲과 구분되지 않는다.

"저기 불룩불룩한 것이 다 묘예요."
"그래요? 잘 안 보이는데요?"

▲ 얼핏 봐선 잘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불룩 솟은 옛 무덤 자리에 나무가 솟아있다.
ⓒ 한성희
다시 보니 불룩불룩한 곡선이 보이지만 나무가 온통 솟아 있어 묘인지 숲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다. 신수근이 살해되고 단경왕후가 쫓겨난 뒤 몰락한 집안의 한 면을 보는 듯싶다. 수백 년 전에는 저 묘들도 잔디를 곱게 입혔던 묘역이었을 테지.

"지금도 후손이 찾아오나요?"
"맨 꼭대기에 있는 묘 하나는 가끔 누가 와서 돌보더라구요."

▲ 모로 쓰러져 누운 문인석.
ⓒ 한성희
차를 돌려 나오는 길옆 숲에 모로 쓰러진 채 방치된 문인석이 보인다. 나무 사이에 옆으로 쓰러져 돌아누운 문인석은 누구의 무덤에 서 있던 것일까. 차를 세우고 카메라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이곳에서만 유난히 세게 부는 것일까? 얼마나 꽃샘바람이 매서운지 손이 시려왔고 사진을 찍는 카메라까지 흔들릴 정도였다.

비록 온릉이라는 능호와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긴 했으나 쫓겨난 뒤 다시는 중종을 만나지 못했던 단경왕후의 그리움을 풀어줄 중종의 따스한 손길을 아직도 그리워하는 듯 온릉의 꽃샘바람은 춥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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