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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우일
온가족의 저녁식사가 늦어진 건 순전히 남편 김일두씨 때문이다. 어지간히 차가 막히는 날에도 퇴근해 돌아와 아버님께 인사드린 후 대충 씻고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으면 8시에 시작하는 연속극을 놓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저녁식사를 마치면 아이들은 자기들 방으로 들어가 숙제를 하거나 컴퓨터 게임을 한다. 시아버지 김수달씨와 남편 김일두씨는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연속극에 이어 시작되는 9시 뉴스를 보며 “저런 나쁜 놈덜!” “옛날 같으면 버얼써…” 등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늦은 저녁시간을 보내고 봉숙씨는 뉴스가 시작됨과 동시에 싱크대 설거지통에 손을 담그며 부자지간의 대화를 곁 귀로 듣는 일로 그날 부엌일을 마무리했다.

사실 하루 세 끼니 중 저녁식사만큼은 온 식구가 다 같이 모여서 해야 한다는 김수달씨의 고집이 없었다면 남편 김일두씨에게도 퇴근 후의 시간이 지금보다는 훨씬 자유스러웠으리라. 하지만 김수달씨의 그런 고집스런 원칙이 비록 권위적인 데가 있긴 하지만 삼대가 모여 사는 가족 사이에 그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만 봉숙씨의 입장에서는 오늘처럼 남편의 퇴근이 늦어지는 날만이라도 예외를 인정해 주면 좋으련만, 지방 출장과 같은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그저 통상적으로 귀가가 한두 시간 늦어지는 정도로는 김수달씨로부터 예외를 기대할 순 없었다. 아이들에게 미리 간식이라도 챙겨준 날은 다행이지만 오늘처럼 군것질거리도 없는 날에는 가뜩이나 먹성이 좋은 아이들은 초저녁부터 주방 근처를 들락거리며 먹을 것을 재촉했다.

그런 사정을 아는 남편 김일두씨가 허겁지겁 집에 도착해서 가족들이 식탁의자에 자리를 잡았을 때 거실 텔레비전에서는 이미 9시 뉴스의 시그널이 시작되고 있었다. 시아버지 김수달 씨의 수저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연년생 두 딸, 가연이와 나연이의 숟가락이 기다렸다는 듯이 뚝배기 속으로 쏜살같이 파고든다.

하얀 김을 올리며 뚝배기를 소복이 채우고 있던 달걀찜의 보기 좋던 모양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봉숙씨가 들고 온 물 컵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눈길을 보냈지만 늦은 저녁 때문이었는지 아이들은 먹는 데만 열중할 뿐 자신들의 정수리에 꽂힌 엄마의 불안한 눈빛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직 초등학생인 나연이는 그렇다 치고 이제 중학생인 데다 제 동생보다 한 뼘이나 더 자란 가연이만큼은 분위기를 알아차리겠거니 했다. 하지만 봉 씨의 그런 기대는 늦은 저녁밥상을 앞에 둔 아이들에게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이봐, 뭐해 같이 먹잖고?”
싱크대 위에 도마를 깔고 일부러 급하지도 않은 콩나물을 천천히 다듬고 있는데 눈치 없는 남편 김일두씨가 봉숙씨를 불렀다. 오늘만큼은 시아버지 김수 씨와 겸상을 하지 말아야 할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눈치 없이 늦은 김일 씨 때문이기도 했다.
“에미도 같이 밥 묵고 하그라.”

그깟 콩나물 다듬는 일을 핑계로 시아버지의 말까지 거역할 수 없는 일. 봉숙씨는 물 묻은 손을 마른 행주에 두어 번 토닥이고 시아버지와 대각선으로 마주보이는 김일두씨 옆에 앉았다. 문제는 거실에 볼륨을 한껏 크게 켜놓은 텔레비전이었다. 김일두씨가 제 시간에 퇴근만 했더라도 매일 보는 연속극 한 회쯤은 포기하고 9시 뉴스 시간엔 설거지를 핑계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면 되었을 터다. 영문도 모르는 김일두씨는 바로 옆에서 커다란 깍두기를 한 입에 넣고 와작와작 씹어 댄다. 그 소리 장단에 맞추어 씰룩대는 그의 광대뼈가 오늘따라 유난히 보기 싫었다.

호주제 폐지안 통과 소식이 초저녁 뉴스 때부터 빠지지 않고 등장했으니 아마도 9시 뉴스에서는 특집으로 다룰지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부르는 여성운동가들의 모습이 화면 가득 메워지기라도 한다면 시아버지 김수달 씨의 반응이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미친년들!”

어쩌면 찌개 그릇을 드나들던 수저가 텔레비전을 향해 날아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 불똥은 바로 봉숙씨를 거쳐 가연이 나연이에게 갈 게 뻔했다.
“남의 씨받아 낼 지집아덜 뭐에 쓸고.” 봉숙씨가 가장 듣기 싫은 말이다. 사소한 말 한 마디가 듣는 상대방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 봉숙씨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사춘기에 접어들기 시작하는 아이들에게까지 똑같은 상처를 물려주기는 싫었다.

ⓒ 이우일
사실 보기에 따라 사소하달 수 있는 것이지만, 봉숙씨에게는 이런 걱정이 쓸데없이 민감한 탓이라고만 넘겨 버릴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잠시 그 사연을 들어 보자.
봉숙씨가 5대 독자인 남편 김일두 씨와 결혼하여 6년 만에 어렵게 가진 첫아이, 즉 먹성 좋은 지금의 가연이를 낳았을 때 시아버지 김수달 씨는 쩝 하고 입맛을 다시는 선에서 그쳤지만, 다음해 제 언니를 꼭 닮아 역시 먹성이 좋은 나연이를 낳았을 때 봉숙 씨는 산후 조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셋째는 반드시 아들을 낳을 이름이라며 유명한 점쟁이로부터 ‘말섭’이라는 이름을 지어온 시아버지의 고집을 꺾느라 출생신고 기한까지 놓쳐 버린 사연을 아는 사람이라면 봉숙씨의 마음고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연애시절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던 남편 김일두씨도 서슬이 퍼런 시아버지 앞에서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김말섭이라는 치명적인 이름에서 나연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지켜 내기 위해 감히 남편도 대들지 못하는 시아버지를 상대로 한판 싸움을 각오해야 했던 봉숙씨. 봉숙씨의 그런 용기를 단지 자기 자신이 이름 때문에 겪어야 했던 사춘기 시절의 나쁜 기억 때문이라고 폄하하기엔 너무도 처절했다. 속속들이 그 싸움의 사연을 늘어놓은들 무엇하랴. 다만 봉숙씨가 나연이의 이름을 지켜 낸 대가로 김씨 집안의 버릇없는 며느리가 되어야 했고, 그 오명을 씻기 위해 지금까지도 시아버지 김수달 의 말을 털끝만큼도 거스르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게다가 말섭이라는 이름을 거부한 탓인지 김수달씨가 고대하던 셋째아이의 인연 또한 없었다.

생물학적으로 자녀의 성별을 결정짓는 것은 여자보다는 남자 쪽에 더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 이미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21세기에 접어든 지금도 이 집안에는 어느 권위 있는 과학자의 말보다 ‘말섭’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던 점쟁이의 영향력이 더 컸다. 그렇지만 봉숙 씨라고 그동안 시아버지께 반기를 들 만한 일이 없었겠는가. 특히 돌아가신 시어머니 제사나 명절날 차례 상에서 뒷전으로 물러서 있어야 하는 두 아이를 볼 때, 그리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나연아”가 아닌 “둘째 놈아”로 불리는 아이를 볼 때, 서운했던 일을 들자면 한이 없다. 하지만 봉숙씨로서는 지금 또 다른 싸움을 감당할 만한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무심코 된장찌개 국물을 한 술 뜨던 봉숙 씨의 숟가락과 마침 냄비 속을 휘젓던 김수달 씨의 수저가 부딪쳤다. 된장찌개 냄비 속에 잠시 잠깐 긴장이 흘렀다. 마침 호주제 폐지가 메인 뉴스에 올라 있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봉숙씨는 얼마 전 호주제를 다룬 토론 프로그램을 보던 중 시아버지 김수달 씨가 혀를 끌끌 차며 말하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저런 후레자식을 봤나, 차라리 떼버리라!”

호주제 폐지론 찬성 측의 패널로 나온 남자 교수의 논리 정연한 말끝에 이어진 김수달씨의 혼잣말이었다. 그때 남편 김일두씨는 괜한 헛기침을 하며 과일을 깎고 있던 봉숙씨 쪽을 힐끗 보았을 뿐 말이 없었다. 문득 떠올린 김수달씨의 그 말이 왜 그리 우습게 느껴지는지, 자못 긴장이 흐르는 식탁에서 봉숙씨는 그만 사레가 들고 말았다. 자리에 일어나 싱크대로 달려가는 데 결국 문제의 뉴스가 자막과 함께 화면을 채운다.

연신 터지는 기침에 눈물이 찔끔 나올 지경이었지만 봉숙 씨는 곁눈으로 김수달씨의 얼굴을 살폈다. 순간 잠시 마주쳤던 김수달씨의 시선이 다시 텔레비전 화면에 고정되었다.
예상 밖이었다. 식사중이라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평소 김수달씨라면 최소한 걸쭉한 욕설 한마디는 뱉었어야 했다. 봉숙씨가 기침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각오를 하면서 다시 자리에 되돌아왔을 때 마침 만세를 부르는 여성운동가들의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봉숙씨로서는 가장 우려하던 장면이었다.

ⓒ 이우일
그런데도 김수달 씨는 보리차를 마시며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버릇처럼 입안을 헹구고 있을 뿐 말이 없다. 남편도 그제야 뭔가 좀 이상한지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식사를 마친 김수달 씨는 평소와 똑같이 낮은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꼬치 달린 손자 없어도 제삿밥은 얻어먹을 수 있겠고마.”

거실 소파로 자리를 옮겨 앉은 김수달씨의 뉴스 평은 그것이 전부였다.
김일두씨와 봉숙씨의 시선이 묘한 표정과 함께 마주쳤다. 영문도 모르는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보며 키득거린다.

이 상황이 시아버지 김수달씨와 새로운 싸움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앙금의 해소인지 봉숙씨는 가늠할 수 없었다.

‘돌아오는 시어머니 제사에는 우리 두 딸을 아빠와 나란히 서게 해야겠다. 아마 시아버지 김수달씨도 손녀들을 보며 든든해할 것이다. 나중에 당신과 우리 부부의 제사도 이 아이들이 차려 줄 테니까.’ 혼잣말을 하며 늦은 설거지를 하는 봉숙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3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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