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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바위에는 예로부터 많은 글씨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앞서 살핀 금강문의 '금강문' '옥룡관' '칠선암'을 비롯해 구룡폭포 곁에 쓰인 '미륵불' 글씨는 지금은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감상과 고찰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바위에 새긴 글씨들은 때로는 자연 경관을 훼손하는 것이라 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다녀간 것을 표시하기 위해 새긴 수많은 이름들은 특히 그렇습니다.

▲ 삼일포의 연화대 아래의 바위에는 '조선로동당 만세' '우리나라 사회주의제도 만세'라고 쓰여 있습니다.
ⓒ 백유선
지금의 금강산에는 금강산이 생긴 이래 쓰인 글씨보다 더 많은 글씨가 북한 정부 수립 이후 새겨졌습니다. 바위에 새긴 글씨들을 북한에서는 '글발'이라고 합니다. 구룡연 코스를 따라 약 4km 정도를 가는 길에 수많은 '글발'들을 보았습니다.

자세히 살펴 보니 크게 두종류로 구분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짧은 구호이고, 또 하나는 시나 노래를 새긴 것입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먼저 짧은 구호에 대해 살펴봅니다.

"김형직 선생님 탄생 60돐 기념"

구룡연 코스를 걷다보면 앙지대에 못 미쳐 경치 좋은 바위에 거대한 규모로 쓰인 '지원(志遠)'이란 글씨를 처음 볼 수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으나 촬영한 사진을 확대해 살펴 보니, 그 곁에 작은 글씨로 '김형직 선생님 탄생 60돐기념 1954. 7'이라고 쓰여 있어서 이 글씨가 쓰인 내력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글씨는 북한이 새긴 것 중에서는 유일한 한자 글씨이고 비교적 이른 시기에 새겨진 것입니다. 아마도 독립을 향한 '원대한 뜻' 정도로 번역되는 이 글씨의 주인공 김형직은 고(故)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할아버지입니다.

▲ 앙지대에 못미쳐 앙지다리 위쪽의 바위에는 '지원(志遠)'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 백유선
그동안 북한은 김형직이 1917년 비밀결사인 조선국민회를 조직했으며, 조선국민회는 3ㆍ1운동을 전후해 가장 큰 반일 지하혁명조직이라고 평가하면서 김형직의 항일투쟁에서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남한의 학계에서는 김일성의 항일투쟁 문제와 함께 그 진위여부를 의심의 눈으로 보아 왔습니다. 비교적 객관적 정보를 싣고 있는 백과사전도 그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김형직은) 1894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나 평양숭실학교를 마쳤고 1917년 3월 강동군에서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국민회를 결성했다. 조선국민회 활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뒤 만주로 망명했다.

북한의 문헌에 의하면 비합법적인 단체 조선국민회와 함께 학교계·비석계·향토계 등의 계를 결성하였고 중강·무송 등지에서 광제의원·무림의원·순천의원 등을 설립, 의료사업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항일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북한 정권 수립이후 아내인 강반석과 함께 '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로 추앙받아 김형직사범대학, 김형직인민병원 등이 설립되었다. 북한에서는 국가적인 위대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관련된 자료가 모두 북한 것으로 한정되어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이처럼 그동안 남한에서는 김형직의 항일투쟁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듯한 묘사가 일반적이었고, 대개는 날조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최근 <연합뉴스> 보도에 의하면, 김형직이 항일 비밀결사를  통해 독립운동을 펼쳤음을 입증하는 사료가 독립기념관에 소장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로써 그의 항일 투쟁은 경력이 거짓이 아님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무조건적으로 날조했다고만 보아왔던 우리의 시각을 다소 교정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주체, 주체사상 만세, 속도전"

금강산의 바위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내용은 엄청나게 큰 글씨로 새겨진 '주체' '주체사상 만세' '속도전' 등의 구호입니다. 다시 지우기도 어려울 정도로 보여서 20세기 냉전시대가 금강산에 남긴 최대의 흔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있었던 '원쑤' '침략자' '쳐부시자' 등의 부정적 어투가 담긴 구호들이 안 보인다는 점과 글씨에 색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찾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됩니다.

▲ 온정각 뒤의 매바위산에는 거대한 크기로 '주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 백유선
북한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의 유일한 지도 이념은 '주체사상'입니다. 북한의 헌법과 조선노동당 규약에도 주체사상을 당과 국가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규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때는 우리 학생 운동권 일부에도 열병처럼 스쳐 지나간 적이 있습니다.

북한은 주체사상에 대하여 '혁명과 건설에서 주인다운 태도를 가지는 것, 즉 자주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을 요구하는 사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자주적 입장을 견지하는 지도적 지침은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1970년대 말까지는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다른 것이 없으며, 다만 그것을 북한의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능가하는 사상이라고까지 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즉 주체사상은 북한을 이끌어가는 유일한 사상이며, 그런 만큼 '주체', 또는 '주체사상'은 북한의 구호나 표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런 글씨들이 금강산에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북한은 금강산을 근로자들의 휴식처로 나아가 '만년대계의 혁명적 교양 장소'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구룡폭포 직전의 절벽에는 '주체사상만세'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 백유선
또 자주 눈에 띄는 구호는 '속도전'입니다. 주체사상이 북한의 모든 분야의 유일한 지도이념이라면, 속도전은 경제적인 개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속도전은 1974년 채택된 사회주의 노력경쟁을 위한 공식구호로, '사회주의 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속도전을 힘있게 벌이자'고 하여, '경제건설에 있어서 속도를 중시한다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 금강산온천에서 매바위산을 바라보면 '속도전'이란 글씨가 보입니다.
ⓒ 백유선
▲ 삼일포의 충성각 아래의 바위에도 '속도전'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 백유선

"조선아 자랑하자"

그 외 볼 수 있는 구호 중에는 김일성 주석과 관련된 내용이 많았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만세" "조선아 자랑하자. 5천년 민족사에 가장 위대한 김일성 동지를 수령으로 모시었던 영광을" "혁명적 전통을 계승하자" 등의 구호가 그것입니다.

북한에서 항일 혁명투사로, 사회주의 북한을 건국한 어버이 수령으로 추앙 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다른 구호들 속에 이런 내용의 글씨가 빠질 수는 없는 일일 것입니다.

▲ 만경다리에서 바라다 보이는 절벽에 새겨진 '글발'
ⓒ 백유선
▲ 옥류동에 새겨진 '글발'. 내용은 이렇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에 의해 이룩된 우리당의 빛나는 혁명전통을 계승발전시키자"
ⓒ 백유선
김일성의 공식 직함은 주석이지만 북한에서는 흔히 '수령'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수령이란 사전적인 의미로는 단순히 무리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말이지만, 북한에서는 '근로인민대중의 최고 뇌수이며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혁명의 지도자이며 '가장 위대한 영도자'로 추앙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수령은 오직 김일성 혼자이며, 그가 죽은 후에는 그의 후계자인 김정일마저도 수령이란 호칭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북한에서 수령은 절대적이며 신성불가침적인 존재입니다.

물론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우리의 관점으로는 당연히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이해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들의 방식대로 사회가 유지되어 나가고 있다는 것 또한 틀림이 없습니다.

▲ 삼일포의 봉래대로 오르는 길에 새겨진 구호
ⓒ 백유선
북한사회 이해의 실마리로 삼아야

우리도 예전에는 마을 곳곳에 '반공' '방첩' '멸공' 등의 구호를 써 놓은 것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바위에까지 새긴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요즈음에는 구호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정치, 경제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 후진성을 탈피한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대체로 구호가 많은 것은 후진성의 또 다른 측면으로 이해됩니다. 즉 금강산 바위에 새긴 구호들은 북한이 아직은 여러 면에서 후진적인 상태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구호가 필요하고 또 통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 삼일포의 단풍각 앞 바위에는 '혁명전통을 계승발전시키자'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 백유선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이나, 국제적인 고립 상태는 북한도 인정하고, 우리도 인정하며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물론 아무리 북한의 체제와 입장을 고려하며 살펴본다 하더라도 바위에 거대한 글씨를 새긴 일 자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너무나 거대한 글씨들이 많아서 다시 지우려 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이 역시 엄청난 자연 파괴를 감수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거나 이미 새긴 것이니 북한이 구호를 새긴 목적대로 후진성을 탈피하여 좀 더 생활 수준이 향상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수많은 남한 관광객들이 이를 보며 비난합니다. 물론 이를 비난하기는 쉬운 일입니다. 한마디 던지면 그만이니까요. 그러나 대안이 없는 맹목적이고 감정적인 비난은 남북의 장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전에는 무조건적인 비난을 토대로 북한 체제의 붕괴만이 통일의 지름길이었다고 외쳤다면, 이제는 올바로 북한 사회를 이해하고 나아가 그들의 허물도 보듬어 안고 가는 것이 통일의 대의를 향해 한걸음이라도 가까이 갈 수 있는 발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을 고려하면서 살펴보면 금강산의 바위 글씨는 북한 사회를 분석하고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하는 이 '글발'들을 욕하기에 앞서 그것을 새긴 이유와 배경을 꼼꼼히 따져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는 이 기사를 쓴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쳐부숴 없애야 할 적이라기보다는 우리 민족의 한편으로 우리와 함께 나아가야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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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지난 2월초 2박 3일 동안의 금강산 기행기의 열여덟 번째입니다.
이 내용은 글쓴이의 홈페이지('백유선의 고구려 유적답사기', http://noza.pe.kr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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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콘서트>,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공저), <우리 불교 문화유산 읽기>, <한번만 읽으면 확 잡히는 국사>(상,하)의 저자로 중학교 국사 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