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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마지막 날은 오전만의 일정으로 해금강과 삼일포였습니다. 둘째 날과 마찬가지로 온정각에 모여 인원점검을 한 후 해금강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해금강은 북한의 군사지역으로 민간인 통제선 안쪽이어서 인원점검은 훨씬 더 까다롭게 이루어졌습니다.

해금강까지 가는 길에는 근처의 북한 마을 여러 곳을 지나쳐야 합니다. 창밖으로 우리 시골 마을과 비슷한 규모의 온정리, 봉화리, 삼일포리 등의 마을을 볼 수 있습니다.

드넓은 고성 평야를 끼고 있는 이들 마을의 모습은 우리의 농촌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많이 다르게 느꼈을 사람도 있겠지만, 가급적 우리와 같은 모습을 보려고 했던 저의 눈에는 예전의 우리 시골마을처럼 정겨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 온정각 뒤의 온정리 마을. 온정리 마을과 금강산 관광특구는 이처럼 연두색 울타리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 백유선
북한의 시골 마을

고성평야의 논들은 다음 농사를 준비하기 위함인지 모두 갈아엎어져 있었고, 예전 쟁기를 이용해 갈았던 우리 농촌의 논밭처럼 거칠게 갈려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트랙터나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쟁기로 갈린 모습은 농사에 문외한인 저로서도 구별이 될 정도였습니다. 기계화되고 화학비료를 많이 사용하는 남한의 논밭은 아직은 추수한 후의 모습 그대로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곳은 벌써부터 다음 농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궁금했던 것은 식량이 부족한 북한에서 대부분이 논이 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전 우리의 농촌 같으면 지금쯤 보리 싹이 돋아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 보리를 심지 않는지 그에 대한 해답을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이곳이 보리 이모작이 어려울 정도로 기온이 낮은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뿐입니다.

개울에서 썰매를 타고 얼음지치기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의 모습에서는 어렸을 때의 모습이 생각나 더 정겹게 보였습니다. 가끔씩 걷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영락없는 우리의 옛 모습이었습니다.

지나는 길에 여러 학교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소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방학을 마쳤는지 조회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삼일포중학교의 한쪽 벽면에 붙은 성적 소개판이었습니다. 학생들의 성적을 모두 공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시험을 치르고 얼마 후면 어김없이 성적이 게시되었습니다. 희비가 엇갈리는 현장이었죠. 개인주의 성향이 깊어진 요즈음에는 불가능한 모습입니다. 차에 탄 학생들도 이해할 수 없다며 신기해하였습니다.

북한 시골의 겉모습은 1970년대 새마을 운동 후의 모습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초가지붕을 없애고 슬레이트나 기와 등으로 지붕을 개량하던 모습 말입니다. 북한의 시골 마을들도 과거의 초가집은 이미 없어지고 모두 기와 지붕이었으며, 대체로 규격화된 같은 모양의 주택이 많았습니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북한 사람들은 우리 전통의 색인 흰색을 여전히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벽면을 대부분 흰색으로 칠했더군요. 지난해 중국 연변에 갔을 때 조선족과 중국인의 주택을 구별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벽면의 색깔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벽면이 흰색이면 대부분 조선족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의민족으로 흰색을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이 아직 이곳 북한의 농촌에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 북한 남양의 모습. 중국의 도문에서 두만강건너 바라본 모습입니다. 흰색으로 칠한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 백유선
과연 이곳의 주민들은 금강산에 관광 온 남한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할지, 그들은 금강산 관광 사업으로 불편함은 없는 지 궁금했습니다.

구룡연 코스에서의 북한 여성안내원은 처음에는 주변에서 호기심을 보이고 물어보는 사람도 많았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몇 해가 지나 익숙해져서인지 이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온정리 뒤쪽의 양지마을이란 곳은 본래는 지금의 온정각 주변의 마을이었는데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 집단 이주한 마을이란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살던 터전을 옮겼으니 다소 불편한 점도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게다가 가까이 있는 금강산에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것도 불편이라면 불편일 것입니다.

관광을 오는 남한 사람들을 멀리서나마 지켜보면서 위화감이 들기도 하겠지요. 이런 정도의 사소한 것 외에는 큰 불편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접할 수가 없으니 북한 주민의 생각이 어떤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강원도의 조세는 모두 절에 보내니

대신 과거의 금강산 주변 백성들의 생활은 어떠했는지 살펴봅니다. 다른 지방 사람들에게 금강산은 ‘불교의 성지’이자 명승으로 모두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산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때로는 고통을 주는 산이었습니다.

옛 기록에는 고려, 조선시대의 금강산 주변 백성들의 처지는 어떠했는지, 그들에게 금강산은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고려사>에는 이미 고려 말 공민왕 때 금강산 사찰의 불교 행사로 인해 백성을 피로케 하며 폐단을 일으키고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 말 안축은 ‘금강산’이란 시에서 이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뼈만 남은 봉우리들 번쩍이는 칼이냐 창이냐
재 올리고 난 중들은 일없이 앉아만 있구나
산 아래 백성들의 고생살인 어떠한가
지나가다 때때로 절간을 보면
이맛살이 찌푸려지누나”


▲ 뼈만 남은 금강산 봉우리
ⓒ 백유선
조선시대 금강산 주변 백성들의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특히 왕실의 금강산 사찰에 대한 보호 조치와 불교행사로 인한 주변 백성들의 어려움에 대한 기사가 많이 눈에 띕니다.

조선 초 태종 때에는 금강산 승려들이 시주 받은 쌀을 운반하는 것을 보고 인근 관리가 이를 빼앗아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 일이 있었습니다. 공공연히 속이고 꾀어서 백성의 식량을 많이 빼앗아 간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사찰 측은 이를 사헌부에 고발하였고 이로 인해 그 관리는 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성종 때에는 “강원도는 땅이 메마르고 조세 수입이 적어 여러 고을의 군수용 곡식조차 부족한데, ‘세헌’이라 하여 조세로 거둔 쌀을 금강산의 절에 운반하여 바치고 있으니 백성의 피와 땀을 쓸데없이 중들에게 버리는 것”이라 하여, 이 폐해를 지적하는 상소가 계속되었습니다. 이미 세조 때부터 실시되어 온 금강산 사찰에 매년 곡식과 소금을 주는 제도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임금과 신하가 같이 모여 공부하고 정세를 토론하는 경연에서조차 “강원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이 적어 해마다 흉년이 더한데, 금강산 여러 절의 세헌미 2백 석을 없애야 한다”고 하자 성종은 “선왕 때의 일을 어찌 경솔하게 없앨 수 있겠는가?”라며 거부합니다. 그러나 신하들의 폐지 요구는 계속됩니다.

“강원도의 조세는 모두 절에 보내니, 관에서 거두는 것이 없습니다. 또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수일 동안 머물렀는데 군수용 곡식이 동이 났었습니다. 더욱이 지금은 흉년이니, 남은 것이 있겠습니까?”며 계속 요청하자 임금도 거부하기가 어려웠는지 결국은 폐지하기에 이릅니다.

군수용 곡식마저 바닥나고,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도, 조세를 모두 금강산의 사찰로 보내고 있었던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관리들의 눈에 비치는 것이 이 정도였다면 백성들의 고통이 극심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먹는 자는 중이고, 이를 바치는 자는 백성”

나중에는 금강산 절에 지급되는 소금까지 문제를 삼게 됩니다. 사찰에 줄 소금을 곡식으로 바꾸어서 군수 물자에 보충하도록 하자는 주장이 나옵니다. 임금은 역시 선대로부터 주어 온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이제 갑자기 폐지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 문제가 되어, “강원도는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들이 가난한데도 유점사 등에 1년에 주는 소금이 2백여 석이나 되는데, 백성들에게 운반하여 바치게 한다. 만약 정한 수량에서 모자라면 백성들의 옷과 갓을 빼앗기까지 하고 관계되는 사람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일도 적지 않다”고 하면서, 수량을 줄이거나 만약 줄일 수 없다면 절에서 직접 받아가게 한다면 백성들이 고생하지 않을 거라며 제도의 개선을 주장합니다.

단지 군수 물자의 부족뿐만이 아니라, 금강산 사찰들이 소금을 징수하면서 횡포를 부려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주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정한 수량을 채우기 위한 고통과 운반의 고통 중에서 운반의 고통만이라도 덜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주장입니다.

당시 조정에서도 금강산 사찰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이러한 상소나 주장이 계속된 것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한 사대부들의 불교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조차 인정할 정도로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명종 때는 고성 군수가 상소하여 고성군의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에 의하면 고성군의 호수는 371호였으나 그중 부역할 수 있는 호수는 125호이고 그들도 상당수 도망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 주된 요인은 흉년 때문이지만 상소에서 제기한 문제 중에는 금강산 사찰에는 곡식을 사서 먹는 자가 없다며, “먹는 자는 중이고, 이를 바치는 자는 백성”이라며 금강산 사찰로 인한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금강산 주변의 백성들은 사찰에 조세와 소금 등을 내야 했고, 사찰의 횡포 또한 만만치 않았으며, 그로인한 백성들의 고통은 관리들조차 인정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산이 어찌하여 다른 데 있지 않고 우리 고장에 있어서

중국의 사신을 비롯한 양반관료들의 금강산 유람은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금강산을 유람하는 동안 그들을 대접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신들의 경비는 대체로 강원도와 인근 고을에서 책임져야 했습니다.

특히 사신들이 먹을 진귀한 음식들은 근처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준비하도록 했기 때문에 더욱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수십 명에서 때로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접대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일까 하는 것은 대강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심지어 사신들이 금강산 사찰에 공양하는 백미 등은 군수용 곡식을 쓰게 했으니, 인근 고을의 백성들은 나중에 그것을 채워놓기 위해 수탈을 당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정부에서도 이미 크게 걱정했던 내용으로 사신들이 금강산에 가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또 금강산에 유람 온 일부 왕족은 그 횡포가 심하여 지방관이 상소를 올려 죄를 물을 것을 요청하나, 왕족을 벌할 수 없다하여 그냥 지나친 경우도 있었습니다.

삼일포의 단서암은 이곳을 구경하려는 양반들 접대에 시달린 백성들이 글씨를 짓이겨 물속에 처박아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리했을 지 짐작이 갑니다.

▲ 삼일포의 단서암. 이곳을 구경하려는 양반들 접대에 시달린 백성들이 글씨를 짓이겨 물속에 처박아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 백유선
바닷가 해안초소에서 군 시절을 보냈습니다. 대개는 인적이 드문 바닷가보다는 유명한 해수욕장 근처에서 근무하는 것이 낳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늘 근무도 철저히 해야 하고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소대장을 비롯해 상관들이 쉽게 들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해수욕장 놀러 왔다가도 초소에 들르는 상관들도 있습니다. 상관들이야 그냥 한번 들러본 것이지만 근무자의 입장에서는 늘 긴장해야 되니 접근하기 힘든 인적이 드문 바닷가보다 근무하기가 훨씬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금강산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백성들에게는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금강산 주변의 백성들은 이렇게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이 어찌하여 다른 데 있지 않고 우리 고장에 있어서 이 고생을 시키는가?”(<신증동국여지승람>)

과연 지금의 금강산 주변 북한 사람들의 속마음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월초 2박 3일 동안의 금강산 기행기의 열다섯 번째입니다.
이 내용은 글쓴이의 홈페이지('백유선의 고구려 유적답사기', http://noza.pe.kr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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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콘서트>,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공저), <우리 불교 문화유산 읽기>, <한번만 읽으면 확 잡히는 국사>(상,하)의 저자로 중학교 국사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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