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현대 문명의 저만치에 안흥성이 있다

▲ 태안안내지도. 답사순서는 (가)의 안흥성, (나)의 안흥항, (다)의 굴포운하로 진행되었고 (라)는 안면도가 시작되는 부분이다.
ⓒ 파란지도
둘째날 안흥성에 도착했다. 성문(서문)에서 시멘트 길을 따라 마을 언덕을 올라가니 정말 성이 있었다. 성의 둘레는 1714미터로 태안 지역에 분포해 있는 성 가운데 가장 크며 서산의 해미읍성과도 규모면에서 견줄 만했다.

▲ 안흥성. 오지에 위치해 있고 현대문명과의 접촉이 적어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다.
ⓒ 최장문
임진왜란 전후에 쌓은 안흥성은 표고 80미터 내외의 나지막한 4개의 봉우리를 에워싼 포곡선 산성이다. 성이 위치한 지역은 바다를 향해 10여 리 정도 돌출해 있어 주변 해안을 관찰하기가 용이하고, 고려시대 이래로 삼남지방의 세곡미를 운반하던 조운선의 주 통행로였다.

관련
기사
[서산·태안 답사(1)]태안 백화산에 올라보셨나요?

▲ 성벽에 나무들이 자라면서 그 뿌리가 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 최장문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폐성된 이후 1901년에 일부 남은 건물을 뜯어다가 태안군청과 그 부속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안흥성은 오지에 위치하였고, 현대문명과의 접촉이 적어 거의 원형 상태로 남아있었다. 성에는 동-서-남-북의 4개 성문이 있는데 현재 사진에 위치한 곳은 북문지역이다. 육지와 연결되는 동문만이 홍예문(무지개 문)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문이 정문으로 추측된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태안읍성도 남문만 홍예문이었다.

금은농장과 소작쟁의 운동

안내를 맡은 길준용 교사는 이 지역의 특성을 설명해 주었다.

앞에 보이는 30만 평이 넘는 정중리라는 마을은 금은농장이라고도 불리었다. 광복 전후에 바다를 막아서 만들어진 마을인데 1980년대까지 모두 한 사람 소유로 되어 있었다. 한 지주가 인근지역 사람들에게 간척 후 일정부분의 토지분배를 약속하고 그들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바다를 막았다. 광복 후 정부는 한 사람의 토지소유를 3정보(9000평)로 제한하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였지만 그 지주는 여전히 간척지 모두를 혼자 소유할 수 있었다.

▲ 1988년 소작쟁의가 일어났던 중정리 마을 전경. 산 밑에 저수지가 보인다.
ⓒ 최장문
간척지 독점소유에 대하여 마을주민들의 불만이 개별적으로 표출되다가 드디어 1988년 마을주민 전체가 소작쟁의에 동참했다. 요구사항은 토지를 분배해 달라는 것이었다. 길에 천막을 치고,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며 농성을 벌였다.

지주는 농사꾼인 주민들의 숨통을 쥐기 위해 저수지의 수문열쇠를 몰래 가져가려다 발각되어 저수지에 처박히기도 했다. 경찰이 진압에 나섰고, 소작쟁의는 학생들의 등교거부로까지 확산되었다. 이때 서산·태안 교사협의회에서는 주민들이 지주에게 받은 부당함을 알리는 전단지를 만들어 시장에 뿌리기도 하고, 밤에 야학지도를 한 후 새벽에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토지분배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88올림픽으로 전국이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을 때 이 마을 주민들의 삶을 위한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삶의 흔적들은 현재 골프장에 묻혀지고 있었다. 그 한쪽 자리에는 태안 비치 골프장이 공사 중에 있었다. 성안에 형성된 마을을 가로질러 다시 언덕을 올라가니 바다가 보이는 남문에 도달했다.

▲ 안흥성 남문. 앞에 보이는 문이 남문이며, 남문 아래로 내려가면 구 안흥항이 있다.
ⓒ 최장문

▲ 남문에서 서문으로 향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누각이 복원해 놓은 서문이다. 성안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 최장문
안흥성에 갔다면 안흥항에 가서 항구구경을 하면 더욱 좋다. 서문에서 신 안흥항까지는 5분도 채 안 걸린다. 싱싱한 회, 유람선, 왠지 바다를 보며 걷고 싶을 때 가면 안흥항은 멋진 추억을 선사할 것이다.

▲ 안흥항과 자연산 해산물. 광어 2kg를 4만원 주고 15명이 맛 뵈기로 먹었다.
ⓒ 최장문
시간과 공간의 극복을 위한 흔적들 - 굴포운하

그런데 현재 위치한 이 안흥항~안면도 부근은 고려·조선시대에 큰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이유는 삼남지방의 세곡을 서울로 조운함에 이어 매우 험난하고 또한 암초가 많아서 선박이 이곳에서 파선되고 침몰하는 사고가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가 500년이 넘게 이어졌는데 이것이 ‘굴포운하’이다.

▲ 들판 한 가운데 위치한 굴포운하 안내판
ⓒ 최장문
20분 남짓 차를 달리니 굴포운하 안내판이 있는 들판에 도달했다. 현재 굴포운하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매몰되어 그 대부분이 논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굴포운하'란 태안 남쪽의 천수만과 북쪽의 가로림만에 연접해 있는 약 7km에 이르는 거리를 개착하여 운하를 건설하려 했던 것이다. 고려 인종(1134) 때에 착공하여 조선 현종(1669) 때까지 무려 530여 년간 10여 차례에 걸쳐 계속 되었지만 결국 개통을 보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연인원 수 만명의 군인을 동원하여 작업을 실시하였으나, 밑에 암반이 깔려 있고 또한 조수가 밀려오면 허물어지곤 하여 공사를 중단해야만 했다.

▲ 굴포운하 전경
ⓒ 최장문

▲ 막연히 생각했던 운하보다 깊고 넓었다. 바닥에는 작은 내가 형성되어 물이 흐르고 있었다.
ⓒ 최장문

세곡운하의 수로 중에서 제일 험난한 곳이 전국에서 세군데 있었는데, 태안반도의 안흥량, 강화도의 손돌목, 장연의 장산곶이다. 이 중에서도 유별나게 안흥량의 바닷길이 가장 험악해서 당시의 선원들은 이 삼남 지역의 조운 선단에 승선을 꺼려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예로 조선 태조-세조 때까지 60년간에 안흥량에서 일어난 사고의 통계를 보면 파선 및 침몰된 선박 수가 무려 200척, 사망 1200여명, 미곡 손실 1만5800석이나 된다.

굴포운하 유적지에서 걸어 나올 때 한 선생님이 안면도는 섬일까요? 하고 물었다. 안면도는 섬이 아니라 원래 ‘곶’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안면곶이라 불렸는데 조선 인조 때 안흥을 통과하는 세미선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굴포운하를 시도하지만 실패하자, 안면곶을 육지와 절단하는 일을 추진하였고 이후에는 안면도가 되고 세곡선은 좀더 안전한 천수만을 통해 새로 뚫린 뱃길을 이용해 운항했다는 것이다. 서산이 고향인 필자도 몰랐던 사실이다.

고려와 조선시대 주요 수송로는 육로가 아닌 수로였다. 이와 관련하여 굴포운하를 시도하였지만 결국 실패한다. 얼마나 절실하였으면 500여년간 10차례나 시도하였을까?

안면도에 가면 ‘쌀썩은여’라는 지명이 있다고 한다. 지명 그대로 난파당한 세곡선의 쌀들이 밀물과 썰물에 의해 모여지고 썩어 갔던 곳이리라.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려 했던 선조들의 피나는 노력과 절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자꾸만 굴포운하 논두렁에서 만난 아저씨의 말이 생각났다.

“현재 장비로는 한달이면 가능해요. 허허허.”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월 26일 -27일 충남역사교사모임에서 주관한 서산·태안 지역 학술 답사에 다녀왔습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가 세월속에서 문화의 무늬가 되고, 내 주변 어딘가에 저만치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