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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일 타계한 월전 장우성(1912∼2005). 향년 94세.
월전 장우성 화백이 28일 오후 종로구 팔판동 자택에서 타계했다. 향년 94세.

1912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장 화백은 '한국화단을 대표하는 동양화가'와 '부일 협력 미술인'이라는 상반된 평가 속에 눈을 감았다.

1930년 이당 김은호의 문하에 들어간 장 화백은 32년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서 입선하며 화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41년부터 44년까지 선전에서 연속 특선을 차지하며 화단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1949년 로마에서 열린 바티칸 국제성(聖) 미술전에 한국대표로 '한국의 성모와 순교복자' 3부작을 출품했고, 미국 워싱턴D.C에 동양예술학원을 개설하는 등 명성을 높였다.

생전 서울대 교수(1946∼61), 홍익대 교수(71∼74), 예술원 종신회원을 지낸 그는 이순신·권율·강감찬·김유신·김좌진·윤봉길·정약용 등 위인들의 표준영정을 그렸고, 5·16민족상(1972)과 금관문화훈장(2001)을 수상하는 등 화가로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영예를 누렸다는 평이다.

그러나 그의 화려한 이력 뒤에는 "일제강점하 조선총독부에 협력했다"는 친일 시비가 따라붙는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위원장을 맡은 선전은 "유치한 조선미술을 보육조장하고, 민중의 사상을 순화케 하여 사회 교화에 일조하기 위해 조직된 행사였다"는 게 진보적 미술사가들의 평가이다.

1942∼44년에 열린 '반도총후미술전람회'(半島銃後美術展覽會)는 선전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태평양전쟁을 찬양하는 그림들이 전시된 행사였는데, 장 화백은 이 행사에 초대작가로 위촉됐다.

장 화백이 1943년 6월 15일 조선미술전람회 창덕궁상 시상식에서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총후 국민예술 건설에 심혼을 경주하여 매진할 것을 굳게 맹세하는 답사를 했다는 내용의 <매일신보> 기사가 발굴된 적도 있다.

▲ 장우성 화백의 '조선미술전람회' 수상과 답사 내용을 보도한 1943년 6월 16일자 <매일신보>
ⓒ 민족문제연구소
그를 비롯한 한국미술 1세대 화가들의 친일 전력은 드러나지 않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묻히는 듯 했으나 <계간미술> 1983년 봄호에 '한국미술의 일제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이라는 기획특집 기사가 실리며 장 화백의 명성에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전의 장 화백은 자신의 과오를 철저히 부정했다. 1992년 12월 22일자 <서울신문>은 그가 83년에 보여준 활약을 이렇게 묘사했다.

"같은 해 4월 21일자 모 두 일간지 광고를 통해 발표한 「불신과 불화를 조장하는 저의를 묻는다」는 이 성명서는 잡지(계간미술)에 게재한 내용을 조목조목 열거하면서 「일제36년과 해방 후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미술가는 친일파이며 모든 미술작품은 일본의 식민지 잔재인양 매도하고 미술교육도 잘못되어 후진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했다는 기사내용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망설」임을 전제, 「작고작가와 현역 미술인 대부분을 부관참시식으로 난도질」하면서 과거 민족수난의 불행했던 역사는 외면한 채 「민족예술창조라는 허구에 찬 궤변」으로 사회여론을 오도, 「이 방약무인한 오만을 나무라기 전에 그들은 일제 강점 하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왔으며 소위미술평론가의 자격은 어디에서 취득했고 누가 인정했던가 묻고싶다」는 실랄한 항변과 규탄의 내용이 그것이다. 이 글을 기초한 사람이 바로 월전으로 이 사건은 화단의 경종이 되어 서로 자숙하고 침착하게 자기 성찰하는 기회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일부 사가들은 "장 화백을 비롯한 화단의 실력자들이 압력을 넣은 끝에 얻어낸 '무덤 속의 평화'였다"며 "당시 성명에서 내세운 논거들은 지금도 친일파들이 내세우는 상투적인 변명에 불과하다"며 기사 내용을 반박했다.

▲ 천안 유관순 열사 추모각에 봉안되어 있는 유 열사 영정. 이 영정은 장우석 화백이 그린 그림으로 장 화백의 이력과 함께 실제 얼굴과 많은 차이가 나 지금까지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장 화백은 1985년 충남 천안시 유관순 열사 추모각에 봉안된 열사의 영정을 그리는 등 자신을 둘러싼 친일 시비로부터 헤어나려는 듯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장 화백이 그린 열사의 영정은 실제 모습을 크게 왜곡시켰다는 논란만 증폭시켰다. 2004년 '장 화백이 영정을 새로 그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들이 거세게 반발했고, 경기도 이천시의 '월전미술관' 건립사업도 논란의 불똥을 맞았다.

98년 재임용에 탈락한 이후 서울대에 복직하지 못하고 있는 김민수 전 교수의 불행도 장 화백을 둘러싼 시비와 무관하지 않다. 김 교수가 96년 개교 50돌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이태호 전남대 교수의 논문을 인용해서 "초창기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출범 당시의 교수진 중에서 제1회화과(동양화)의 장우성, 노수현과 함께 장발이 친일파로 간주되고 있다"고 한 것이 7년간의 가시밭길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28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장 화백의 타계에 대해 "우선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그러나 고인이 자신의 허물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은 것에 아쉬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장학구 월전미술문화재단 이사장 등 4남3녀가 있다. 장례식장은 강남구 일원동 삼성의료원 영안실 15호실. 영결미사는 3월2일 오전 9시혜화동 성당이며 장지는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망미리 산 1-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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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4월 17일] 김민수 교수 : 유관순 열사가 두번 통곡한 까닭

생전의 '버스' 그림은 노무현 정부에 대한 풍자?
2003년 '아슬아슬' 발표... 두 달 후 대통령 발언 '눈길'

▲ 장우성 화백이 2003년 11월 발표한 '아슬아슬'.
월전 장우성 화백은 생전에 노무현 정부를 우회적으로 풍자하는 그림을 남겨 눈길을 끌었다. 2003년 11월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월전-리커란 합동전'에 출품한 '아슬아슬'이 그것.

승객을 태운 버스의 뒷부분이 붕뜬 채 달리는 모습을 담은 작품에 장 화백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한시를 써넣었다.

"무심코 새 차를 탔더니 갈 지(之)자로 운전하더라. 승객들이 깜짝 놀라 간이 콩알만해져 누가 운전하느냐 물었더니 초보운전자라 하더라. 이러다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어떡하나."

장 화백은 생전에 쓴 회고록 후기에서 "21세기 현대의 인류문명은 한마디로 현기증을 느끼게하는 혼돈의 극치다, 무위무책한 많은 노년들은 소용돌이치는 격랑에 떼밀려 고독과 환멸을 곱씹으며 쓸쓸하게 살아가고 있다"며 "옛 시절이 그리운걸 보면 나도 어쩔 수없이 늙었는가 보다"라고 노년의 심경을 털어놓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공교롭게도 이듬해 1월 30일 저녁 청와대에서 열린 '나라사랑 원로모임' 인사들과의 만찬에서 장 화백의 그림에 화답하는 듯한 말을 했다.

"지금 승객을 가득 태운 버스 운전석에 앉아있는 제가 할 일은 차를 바르게 몰아 승객들이 불편하지 않게 다음 대통령이 기다리는 목적지까지 가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맡은 구간만큼은 운전을 잘 하겠다. 지난날의 허물은 이해해 주시고 더 열심히 해서 보답하겠다."

그러나 당시 만찬에 배석했던 안영배 청와대 국내언론비서관은 28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작년 만찬석상에서 장 화백의 그림이 화제가 된 기억이 없다"며 관련성을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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