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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로리다 티투스빌 지역 밈스에 위치한 해리 무어 뮤지엄. 이 뮤지엄은 해리 무어 부부가 폭사당한 집터 위에 세워져 있다.
ⓒ 김명곤

1951년 12월 25일 안개가 자욱하던 크리스마스 날 밤, 플로리다 중동부 해변마을인 티투스빌 지역의 민권운동가이자 흑인학교의 교장인 해리 무어 부부는 한껏 들뜬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왔다. 교인이 채 50명도 되지 않는 동네 교회에서 단출하게 벌인 크리스마스 행사는 정겹고 소박했다.

이들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얼마 전 친지로부터 선물 받은 포도주를 한잔씩 나눠 마시며 정담을 나누었다. 이날은 무어 부부가 결혼한지 25년째를 맞이하는 날이기도 했다. 다음날에는 이들의 무남독녀 외딸이 워싱턴으로부터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날 폭사당한 미국 최초의 민권운동 순교자

▲ 해리 무어 뮤지엄 안내 현판
ⓒ 김명곤
부부는 다음날 딸을 마중나갈 계획을 세운 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이 마지막 밤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이들이 막 잠이 들 무렵인 밤 10시30분 경, 엄청난 굉음과 함께 이들의 집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누군가가 침대 밑에 설치해둔 3파운드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한 것이다.

남편인 해리 무어(Harry T. Moore. 당시 46)는 즉사했고, 그의 친구이자 민권운동의 동지이기도 했던 부인 헤리엇 무어(51)는 중상으로 고통스러워 하다가 9일 만에 병원에서 사망했다.

미국 최초의 '민권운동 순교자'로 일컬어지는 해리 무어 부부의 폭사 사건은 당시 플로리다 지역 신문은 물론 <뉴욕타임스> 등 주요 신문들이 연일 톱뉴스로 보도함으로써 미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더구나 이들 부부의 폭사사건은 이미 전국적인 관심을 끌어온 일련의 '사건'에 이어 터져나온 것이어서 더욱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유엔에서도 이 사건을 문제 삼았다.

FBI는 20명의 수사요원을 동원해 수사에 나서 며칠 후 트럭운전사, 야채상, 회계사 등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그러나 트럭운전사와 야채상은 범행을 부인해 석방되었고, 콕스라는 이름의 회계사는 수사요원과 두번 대면한 후 자신의 뒷마당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후 남아있던 두 명의 용의자도 몇 달 되지 않아 사망했다.

결국 FBI는 이들 유력한 용의자들이 사건현장으로부터 40마일 가량 떨어진 중앙플로리다의 아팝카와 윈터가든 지역의 KKK단 멤버일 가능성이 높다는 수사기록만 남긴 채 사건 발생 3년8개월만인 1955년 8월 수사 종결을 선언했다. 그리고 50년의 세월 속에 잊혀져갔다.

미시시피에서부터 불기 시작한 '과거사 청산' 바람

▲ 해리 무어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생전의 해리 무어 사진.
그러나 영영 잊혀질 뻔 했던 해리 무어 부부의 폭사사건은 지난 1월 마르틴 루터 킹 데이를 앞두고 40년 전 발생한 '미시시피 사건'의 진범이 체포되면서 극적으로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미시시피 사건이란, 1964년 미시시피에서 민권운동을 하던 백인 청년 두 명과 흑인 청년 한 명이 백인 전도사 킬렌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당시 강력한 혐의자로 지목됐던 킬렌은 '전도사에게 유죄평결을 내릴 수 없다'며 버티던 배심원들 덕으로 사건이 흐지부지 처리되면서 다른 혐의자들과 함께 석방됐다. 이 내용은 영화 <미시시피 버닝>으로도 만들어졌다.

킬렌은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2005년 1월 초 체포됐다.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 등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수일에 걸쳐 킬렌의 체포소식을 전하는 한편, 그동안 묻혀진 다른 사건들도 '과거사 청산' 맥락에서 재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로리다 신문들은 이를 보도하면서 1951년에 발생한 해리 무어 부부의 폭사 사건도 재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지역 신문들은 지난해 12월 21일 강력한 차기 주지사 후보인 찰리 크리스트 플로리다 법무장관이 해리 무어 사건을 재수사하겠다고 약속한 점을 들어 이번에는 해리무어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1951년 12월 25일 밤에 일어났던 해리무어 부부 폭사사건은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일까.

백인소녀의 윤간 주장으로 시작된 '레이크 카운티의 비극'

▲ 해리 무어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학교교사 시절의 해리 무어 부부 모습. 사진 옆에는 카운티 교육감으로부터 정치활동를 중단할 것을 경고 받았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 김명곤
사건의 발단은 1949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앙플로리다의 레이크 카운티 그로브 랜드라는 마을에서 당시 17세 백인 소녀가 네명의 흑인 남자에게 윤간을 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그녀의 주장을 입증할만한 증인과 증거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크 카운티 경찰 윌리스 맥콜은 그녀의 주장만 갖고 수사를 벌여 세 명의 용의자를 체포했다. 네번째 혐의자는 경찰의 추적을 피하다 살해됐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곳으로부터 40마일 부근에 살고 있던 KKK단원들은 소녀가 강간을 당했다고 지목한 그로브 랜드 등 인근의 흑인마을을 돌아다니며 총질을 하고 닥치는 대로 방화를 했다. 이 같은 무법천지가 며칠동안 계속되었으나 지역 경찰서장인 윌리스 맥콜은 수수방관했고, 이에 지역의 민권운동 지도자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급기야 주 방위군이 파견되고서야 가까스로 질서가 회복됐다.

이어 시작된 재판에서 강간혐의로 체포된 세 명의 흑인은 무죄를 주장했다. 특히 이들 중 두 명은 사건이 일어난 시간에 20마일 밖에 있었다며 알리바이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심리한지 두 시간도 채 안돼 그 두 명에게 사형판결이 내려졌다. 나머지 한 명에게는 경미한 형량이 내려졌다.

사형 판결을 받은 2명의 흑인은 곧바로 연방 대법원에 항소했다. 연방 대법원은 심리 끝에 플로리다 주 법원이 이들에 내린 유죄평결을 기각했다. 기각 이유는 주 법원의 평결이 증거 위주가 아닌 '여론재판'이라는 것이었다.

▲ 해리무어가 사용하던 낡은 성경책. 왼쪽 옆에는 그가 쓴 서신들.
ⓒ 김명곤
당시 <올랜도센티널>은 주 법원의 판결을 코앞에 두고 1면에 전기의자가 그려진 '레이크 카운티의 비극' 이라는 만평을 싣고 바로 밑에 '극형'이라는 설명을 달아놓아, 혐의자들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암시를 주었다. 연방대법원은 이 만평을 예로 들면서 주정부의 판결을 '고도로 편견에 사로잡힌' 재판이라고 비판했다.

판결이 뒤집힌 직후 레이크 카운티 검찰은 11월 6일 두 흑인 혐의자에 대해 재심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재심을 하기로 한 당일, 주정부 감옥으로부터 두 명의 흑인들을 수갑을 채워 법정으로 호송하던 윌리스 맥콜은 인적이 드문 지점에서 권총으로 이들을 쏴 한 명을 즉사시켰고 다른 한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호송중인 흑인 혐의자 살해한 KKK단 경찰

맥콜은 이들이 도망치기 위해 자신을 공격해 총을 쏘았다고 주장했으나, 다행히 살아난 한 명이 "아무런 이유 없이 수갑이 채워진 우리에게 맥콜이 총격을 가했다"고 증언함으로써 진실이 밝혀질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지기 시작했다. 미 전역의 신문들은 연일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고, 흑인 커뮤니티에서는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특히 전미 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의 플로리다 대표를 역임한 지역 지도자이자 흑인학교 교장선생으로 존경을 받아오던 해리 무어는 플로리다 주지사에게 경찰관 맥콜이 KKK단 멤버라며 그에 대한 직무정지와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당시 중앙플로리다 지역에는 세개의 KKK단체가 존재했는데, 그 멤버는 약 3백여 명에 달했고 정계와 경찰계 및 사업계서 활동하던 사람들도 속해 있었다.

▲ 해리 무어 부부 사건이 해결되지 않고 있음을 보도한 <티투스빌 스타>.
ⓒ 김명곤
해리 무어는 1934년 NAACP 레이크 카운티 지부를 창설하고 7년 후엔 플로리다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에는 레이크 카운티 NAACP 대표를 지내며 흑인교사들에 대한 평등 임금을 주장하고 흑인 유권자 등록을 추진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었다.

결국 사건의 존재 유무도 확인되지 않은 백인 처녀 윤간사건은 범행을 극구 부인했던 흑인 청년들의 생명은 물론, 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나섰던 한 민권운동 지도자 부부로 하여금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했다.

54년만에 보이기 시작한 진실규명의 빛

해리 무어 부부 폭사사건은 사건 40년만인 지난 1991년 민주당 출신 로튼 차일스 주지사 시절에 진상을 밝혀낼 수 있는 호기를 맞았다. 당시만 해도 증언을 해줄만한 생존인물들 다수가 살아 있었다. 그러나 관련당국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재수사에도 불구하고 혐의자를 가려낼 수 있는 정확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 1951년 '백인소녀 강간사건'으로 흥분한 KKK단원들의 방화에 의해 한 흑인 가옥이 불에 타고 있는 모습.
이후로도 흑인 커뮤니티가 재수사를 촉구했으나 그때마다 주정부 당국은 '증거가 불충분하고 시효가 지난 사건'이라는 식의 미온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그로부터 54년이 지난 지금, 미시시피로부터 불기 시작한 과거사 청산 바람을 타고 해리무어 사건에도 '진실규명'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치적 야심가인 크리스트 검찰총장은 최근 재수사를 지시, 검찰은 당시 사건을 알고있는 듯한 두 명의 새로운 목격자를 찾아내 인터뷰를 마쳤다. 검찰은 당시의 재판기록을 면밀히 검토하는 한편, 무어의 유일한 딸인 에반젤린 무어(74)와 친척들을 접촉하고 있으며, 또 다른 증언자들도 찾고 있다.

크리스트 주 검찰총장은 지난 2월 2일 <올랜도 센티널>에 "정말 믿을 수 없는 매우 슬프고 비극적인 사건"이라면서 "시도하지 않으면 밝혀 내지 못한다, 나는 조심스럽게 낙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 해리 무어가 생전에 사용했던 낡은 가구.
ⓒ 김명곤
현재 무어의 집터에 세워진 해리뮤지엄의 여성 디렉터이자 지역 토박이 주민인 쥬애니타 바튼도 기자에게 "그 당시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첨단 장비를 갖춘 FBI 등이 적극 나선다면 범인을 밝혀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믿는다"면서 "문제의 해결은 인력과 시간과 돈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플로리다는 지금 심판대 앞에 서있다"

무어는 1951년 폭사를 당하기 수 일 전 주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흑인청년 살해사건을 항의하면서 "우리는 단지 (흑인의 유익을 위해) 사건을 호도하려 한다거나 타조처럼 두려움으로 모래밭에 얼굴을 파묻고 있기를 원치 않는다"며 "플로리다는 지금 심판대 앞에 서 있다"고 적었다.

과연 1월초 미시시피에서부터 불기 시작한 과거사 청산 작업의 불꽃이 54년 만에 역사의 심판대 앞에 다시 선 해리무어 부부의 폭사사건의 해결로까지 이어질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아직도 미국 곳곳에는 이와 유사한 숱한 사건들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묻혀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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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참고 서적 - <비포 히즈 타임(Before His Time)>  
* 본 기사는 미국 플로리다에서 발행되고 있는 시사종합 주간지 <코리아 위클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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