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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술을 배우지만 공부에 시달리는 아이
| | | ▲ 1권 겉그림입니다. | | ⓒ 서울문화사 |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가 할아버지한테 무술을 배웁니다. 어릴 적부터 하나하나 아주 쉬운 것부터 배운 아이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키려고 합니다. 이것은 때로는 싸움으로 번져서 치고 받고 다퉈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자기가 맞고 쓰러지더라도 비겁하거나 옳지 못하게 물러서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한테 무술(팔극권)을 차근차근 가르쳐 주는 할아버지는 "자신이 진정으로 올바르다면 반대하는 자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자신의 길을 똑바로 걸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무술은 "누구와도 친구가 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지 "더 강해지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덧붙여요. "아무리 강해져도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해선 안 돼" 하고도 말하고요.
그러나 이 할아버지는 자기가 아끼는 손자(고켄지)가 사는 동네에 오래 있지 못하고 시골로 돌아갑니다. 아이 어머니(할아버지한테는 며느리)가 '아이 공부에 훼방만 놓는다'며 그만 시골로 돌아가 달라고 부탁하거든요. 아이는 학교 안팎에서 더러 싸움을 하지만, 힘자랑하는 싸움이 아니라 왕따 당하는 아이를 지켜 주고, 깡패들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그냥 보아넘기지 못하고, 작은 힘으로도 붙어서 싸우지만, 어른들, 더욱이 부모와 교사가 보기엔 '나쁜 짓' 하는 것으로만 비칩니다.
(아버지) 샌님처럼 조용하기만 한 나한테 실망하신 것 때문에 자신과 기질이 닮은 켄지가 귀여우신 것뿐이라구.
(어머니) 그건 아버님 생각이죠! 오늘은 정말 켄지한테 이상한 짓을 가르치지 않도록 확실하게...
(켄지) 아빠, 어서 오세요! 아, 엄마!! 내일은 할아버지가 프로레스링 구경시켜 준댔어!!
(어머니) 안 돼요. 내일은 학원도 있고...
(할아버지) 괜찮아, 어멈아. 학원을 하루 정도 쉰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잖냐. <1권 26쪽>
1988년에 일본에서 나온 만화 <권법소년>에서 고켄지라는 아이는 고작 초등학교 3학년이지만 공부에 시달립니다. 아이 어머니는 내내 "아이가 나중에 대학교에 갈 일을 걱정"하면서 학교 공부에 마음을 다 써 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 뜻과는 달리 켄지는 여러 가지 싸움에 휘말립니다. 어머니는 "내 꿈은 점점 사라지고 있어(3권 104쪽)"하고 말해요. "켄지를 좋은 학교에 보내서 대기업에 취직시키고 안정된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어머니를 어쩔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마음은 다른 부모도 비슷할 거예요. 그저 조용히 학교를 다닌 뒤 일자리 잘 얻고 좋은 사람 만나서 혼인해서 아이 낳고 살기를 바라잖아요.
<2> 아이를 믿는 마음
언제나 켄지에게 힘이 되고 무술도 가르쳐 주었지만,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이끌어 준 할아버지는 일본을 떠나 중국으로 들어갑니다.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치렀을 때 군인이었던 할아버지인 터라,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 갈림길에 놓였는데, 이때 할아버지는 패잔병이 되었어요. 이제 죽었구나 생각할 무렵, 어느 중국 사람이 할아버지를 거두었고 다친 곳을 고쳐 주고 무술(팔극권)도 가르쳐 줍니다. 어느덧 전쟁이 끝났고, 할아버지도 고향 나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때 고마움을 잊지 못했으며, 언젠가는 꼭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가야겠다고 다짐한 터라, 중국으로 들어가 자기 은인을 찾으려 합니다.
이렇게 할아버지가 중국으로 떠난 지 한 해, 두 해가 흐르고 다섯 해가 흐를 무렵, 켄지는 혼자서 수련을 합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없으니 공부에 많이 매달리게 되었고,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성적도 좋게 나옵니다. 하지만 켄지가 중학교를 마칠 무렵 폭주족과 얽힌 폭력사건(물론 켄지는 어이없이 휘말린 피해자였지만)에 휘말려요. 초등학교 3학년 때 만난 아키라란 아이가 폭주족에 몸담고 있었는데, 켄지와 아키라가 만나고 있을 때, 폭력사건을 일으킨 다른 패거리가 앙갚음을 한다며 켄지와 아키라를 덮쳐서 큰 사고가 나거든요. 이리하여 어머니 뜻대로 '명문 고등학교 입학'이 눈에 보였던 일은 물거품이 되고 어쩔 수 없이 '3류 고등학교'로 들어갑니다.
어머니는 나날이 실망하지만 아버지는 "켄지는 크고 여유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해 줬으면 해. 들어 봐! 사람에게는 각자 자신의 삶이 있는 거야. 어떤 삶이 행복한가는 사람에 따라 다른 거란 말야!(3권 105쪽)"하고 말합니다.
아버지도 어머니가 아이한테 공부만 시키려고 닦달하는 데 질리고 지쳤기 때문일까요? 아이가 안쓰러워 보이기 때문일까요? 아이가 속으로 바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요?
아버지는 아이를 믿습니다. 어느 학교를 나오건, 또는 학교를 나오지 못하건, 자기가 즐길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고 믿어 줍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어머니 또한 아이를 믿습니다. 다만 방법이 달랐을 뿐이에요. 무술을 배우거나 운동을 하는 사람은 "다른 세계 사람"이라고 금을 그어 놓고 어울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지만, 마침내 "엄마는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테니까(7권 176쪽)"하고 말하며 아이를 놓아 줍니다. 이때 켄지는 고작 고등학교 1학년 나이.
<3> 자기 삶을 찾아 떠나는 무술 여행
| | | ▲ 15권 겉그림입니다. | | ⓒ 서울문화사 | 켄지는 3류 학교에 들어갔지만 학교에서 보내는 나날이 즐겁습니다. 공부보다도 즐거운 일, 할아버지를 찾으러 갈 꿈을 안으면서 무술을 수련하는 일이 있거든요. 중국말 공부도 남몰래 부지런히 하고, 할아버지가 못 다 가르쳐 준 팔극권을 혼자서 수련하는 가운데 차츰차츰 '무술을 하는 까닭'에 눈을 뜹니다.
이런 켄지에게 또 다시 큰 사고가 닥쳐서 뜻밖에도 1년 동안 정학 처분을 받았는데, 오히려 이런 위기가 기회가 되어 머나먼 중국 여행을 떠납니다. 대만, 홍콩, 북경, 창주.... 켄지는 가는 곳마다 새로운 무술을 노사들한테 하나씩 익히고(8~17권), 드디어 할아버지를 찾아낸 다음(17~19권), 자신을 끝까지 괴롭히는 토니라는 녀석과 마지막 대결까지 벌입니다(19~20권).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온 켄지(20권).
(이노우에 형) 평범한 인생을 거부한 켄지랑 모범생 코스를 걷고 있는 타이치... 어느 쪽이 정말로 행복한 것일까? 모두들 어느 틈엔가 어릴 적의 꿈을 잊고, 안정을 찾아가는구나... <20권 144쪽>
<권법소년>은 20권 첫머리까지 이어지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대결과 수련을 거쳐 막바지에 이릅니다. 20권까지 오는 사이사이 짤막한 이야기로 나왔던 '인생' 이야기는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한번 켄지 마음을 흔듭니다. 그토록 바라던 할아버지를 다시 만났고, 팔극권이란 무술도 마지막까지 완성을 해서 익혔지만 '자기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문제는 풀지 못했거든요. 한 가지 목표를 바라보고 뛰는 동안에는 '그것 하나만 이루자'는 마음이었지만, 정작 그것을 이룬 다음에는 마음이 텅 비어 버렸다고 할까요?
그렇다면 아이들한테 중요한 것, 아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언뜻 보기에는 꼬마아이가 팔극권이라는 무술 하나를 익히는 과정을 아슬아슬하게 보여주는 만화라고도 할 <권법소년>입니다. 하지만 무술 하나를 익히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 아니 무술을 익히고 안 익히고를 떠나서 우리 삶에서 참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를 말하는 큰 울림이 이 만화에 있습니다.
(할아버지) 괜찮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어른이 원하는 대로 자라는 아이들만 있다면 세상은 정말 재미가 없어진다는 생각이 안 드세요? 아이들은 조금 다루기 힘든 정도가 딱 적당한 거죠.<1권 110쪽>
어쩌면 이 말이 정답일 수 있고, 1권 첫머리에서 말한 "정말 재미가 있는 세상, 아이들이 어른 뜻대로만 자라는 게 아니라, 저마다 다른 자기 꿈을 가꾸고 키우고자 도전하고 모험을 즐기면서 세상과 부딪히는 세상"이야말로 우리들 모두에게 소중하다는 이야기를 '팔극권 배우는 아이' 이야기로 담아냈다고도 하겠습니다.
<4> "그딴 거 아무래도 좋아"
만화를 보면 그 나라 문화 눈높이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나라 사람들이 누구나 즐겨 볼 수 있는 만화가 있다면, 그 나라는 문화 눈높이가 높은 나라이고, 몇몇 사람만 즐기거나 찬밥 대접을 받고 있다면 문화 눈높이가 낮은 나라라고 생각해요. 그림과 글이 어우러지는 만화는 그림만 보아도 나오는 이(주인공)들 마음과 생각을 느낄 수 있는 한편, 줄거리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글을 보면서 이야기 흐름을 좇는 한편, 넓고도 깊은 이야기를 맛볼 수 있어요.
.. "팔극권 가운데도 몇 가지 파가 있어서, 각자가 실전에 쓰는 기술을 전해왔는데 그것들을 합치면 많은 기술이 있다. 그러나 이서문이 중요시한 것은 기술의 숫자보다는 단련을 계속하는 거야. 단련이란 오랜 동안의 연습에 의해 축적된 힘을 말한다. 아무리 훌륭한 기술이라도 단련이 없으면 간단한 찌르기 하나에도 져버리고 말지!" .. <2권 168~169쪽>
.. "충추는 팔극권뿐만 아니라 모든 권법 속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 자세다. 처음 단계에선 마음껏 큰 동작으로 실시하여 온힘을 다해 연습을 실시한다. 점차 연습 방법을 바꿔가면서 세밀하고 예리한 동작으로 순간적으로 치는 거야" .. <2권 172쪽>
켄지가 작고 큰 기술을 하나씩 배우는 과정을 보면, 노사나 스승들이 기술만 말하지 않습니다. 기술에 담은 뜻, 기술을 쓰는 까닭, 힘을 다루는 법, 힘을 왜 다루는가 들도 함께 이야기해요. 어린 꼬마였던 켄지는 처음에는 이런 것들까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마침내 자기 삶, 즐거움, 보람, 기쁨이 무엇인가를 시나브로 느낍니다.
(켄지) 승리나 패배, 강함이나 약함 등은 모두 넓은 우주란 면에서 보면 작은 것에 지나지 않구나. 아, 공기가 맛있네. 생각해 보면 공기도 역시 '하늘의 은혜'지. 정말 천지는 자애로 가득 찬 세상인 걸. 이런 일을 안 당했다면, 나는 그냥 잘난 체하다가 실패했을지도 몰라. 그래, 이건 할아버지의 사랑이구나. 그럼 감사해야지. 아빠, 엄머, 아키라, 이노우에 형, 타이치, 여러 노사들... 모두가 내게 사랑을 주었어. 이제 할아버지의 테스트 따윈 아무래도 좋다구! 별도, 산도, 강도, 공기도 모두 사랑이야. 난 지금 너무 행복한 걸 .. <20권 184~185쪽>
이제 켄지는 <권법소년> 1권에 나온 초등학교 3학년 꼬마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모든 것을 따뜻하게 받아들이고, 옳고 바른 것을 굳게 믿고 지키려는 마음, 그러면서 남을 힘으로 누르지 않고 부드럽게 모두를 감싸면서 소중한 동무로 지내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갑니다.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시험하는 일도 통과하고 좋은 깨달음을 얻은 켄지는 "켄지, 이제 깨달았니?"라는 할아버지 물음에 "그딴 거 아무래도 좋아. 왠지 우주와의 경계가 없어지고, 공기에 녹아들어간 것 같아"라고 대답합니다. 뚜렷하게 무어다라고 붙잡을 수는 없지만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느낍니다.
이리하여 만화 <권법소년>은 끝을 맺습니다. 그냥 학교 공부만 잘해서 남부럽지 않으나 남부끄럽지도 않게 살 수도 있던 아이가, '공부와는 또 다른 세상'을 부대끼면서 자신한테 가장 소중한 삶과 일을 찾아온 이야기가 끝을 맺습니다.
| | | 이 책 정보는? | | | | - 책이름 : 권법소년(1~21)
- 지은이 : 요시히데 후지와라(그림) / 류치 마츠다(글)
- 옮긴이 : 조은경
- 펴낸곳 : 서울문화사(1999.5.30~2001.7.31)
- 책값 : 1권에 3000원씩
(1~20권까지 본편, 21권은 외전입니다) | | | | | 학교야 남보다 1년 덜 다닐 수 있고, 더 다닐 수 있습니다. 때로는 4년을 더 다닐 수도, 덜 다닐 수도 있겠죠? 하지만 세상 경험은,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자기 마음과 몸이 한창 무르익을 때 부대끼고 느껴야 좋습니다. 저마다 다 다른 삶이요, 사람인 만큼,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자기 자유를 마음껏 누릴 때 가장 아이다울 수 있고, 이 아이들이 자라나서 어른이 되는 세상도 가장 자유롭고 평화로울 수 있지 싶어요. 살아갈 기운을 잃거나 보람을 못 찾는 분들이라면 <권법소년> 같은 긴 만화 하나를 옆에 놓고 차근차근 곱씹으면서 자기 자신을 되찾아 봐도 참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책과 헌책방과 우리 말을 사랑하는 모임인 '함께살기(http://hbooks.cyworld.com)' 게시판에도 함께 올려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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