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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문화유산의 달’ 전야 축제 ‘조라!’

▲ '조라 !' 페스티벌에 참가한 토산품 상점
ⓒ 김명곤
미국에서 2월은 ‘아프리칸-아메리칸 문화유산의 달(African-American Heritage Month)’이다. 이에 따라 특히 전통 흑인 문화가 집중되어 있는 남부 지역은 각종 전시회 및 강연회가 활기를 띠게 된다. 보통 남부 흑인 문화유산을 생각하면 조지아 주나 미시시피 등을 꼽을 뿐, 플로리다 지역은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플로리다 지역에도 흑인 문화유산들이 이곳저곳에 산재돼 있다. 한국에서 상영이 임박한 것으로 알려진 영화 <레이>의 실제 주인공 ‘레이 찰스’의 활동무대를 비롯해, 흑인 최초의 민권운동 암살 피해자 해리 무어의 박물관, 백인들의 집단 방화로 마을 전체가 사라진 ‘로즈 우드’ 유적지, 그리고 '흑인 여성문학의 어머니'로 일컬어지는 ‘조라 닐 허스튼’의 생가 마을 등이 있다.

특히 2월 ‘흑인문화유산의 달’행사는 플로리다에서 특이한 ‘전야제’를 치르는 것으로 그 막을 연다. 전야제란 다름 아닌 중앙플로리다 지역의 이튼빌(Eatonville)에서 연례행사로 벌어지는 ‘조라! 페스티벌’. 조라 페스티벌은 '흑인문학의 천재' 조라 닐 허스튼과 그녀의 성장지인 이튼빌의 흑인문화 유산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 페스티벌에는 미 전역의 흑인 토산품 상인들, 흑인 예술가, 작가 지망생 등을 포함해 미 전역에서 수만 명이 몰려든다. 1월 28일부터 30일까지 사흘 동안 ‘조라!(Zora!) 페스티벌’에는 예년 평균 7만여 명을 상회하는 10만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명실상부한 미국의 대표적 흑인문화유산 축제가 된 것이다.

앨리스 워커의 ‘조라 닐 허스튼을 찾아서’

▲ 플로리다 이튼빌에 위치한 '조라 뮤지엄'. 국립 박물관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모습이다.
ⓒ 김명곤
그렇다면 한국인들에게는 아직 이름도 생소할 ‘조라 닐 허스튼’은 누구인가.

조라 닐 허스튼(1903~1960. Zora Neale Hurston)은 ‘할렘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1920년대 자신이 쓴 소설로 센세이셔널한 바람을 일으키며 그 이름을 널리 알렸던 작가였으나, 말년에는 플로리다에 돌아와 묘비도 없는 묘지에 묻혔다. 더구나 그녀가 가정부 노릇을 하다 영양결핍상태로 죽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무덤을 덮은 덤불과 함께 파묻혀 영영 드러나지 않을 뻔 했던 조라 닐 허스튼이라는 이름이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현재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그 이름을 얻고 있는 흑인 여성 작가 앨리스 워커 덕이었다. 워커는 영화 <컬러 퍼플>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작가다.

지난해 5월 한국을 방문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던 앨리스 워커는 1970년대 초 어느 백인 민속학자가 쓴 에세이를 읽다 허스튼이 플로리다 마이애미 북쪽 도시인 포트 피어스의 이름 없는 묘지에 버려진 듯 묻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워커는 곧바로 허스튼의 무덤을 찾아 나섰고 이후 <미즈(Ms)> 매거진 1975년 3월호에 ‘조라 닐 허스튼을 찾아서’ 라는 제목으로 조라의 무덤을 찾아가는 과정을 기고했다.

이 때부터 흑인들 사이에서만 근근이 회자되어 왔던 허스튼은 미 문학계에서 극적으로 부활했다. 이는 불우했던 시대를 살았던 선배작가에 대한 후배의 높은 경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온 한 흑인공예가 여인이 바구니를 짜고 있는 모습.
ⓒ 김명곤
허스튼이 세상에 다시 나온 이후 그녀가 성장기를 대부분 보낸 이튼빌 또한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인구의 90%가 흑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동네인 이튼빌에 큰 별 하나가 떠오른 것. 이튼빌은 이후 1986년부터 조라 닐 허스튼의 이름을 기리고 후대에 유산으로 물려주자는 취지 아래 ‘조라! 페스티벌’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3년 연방우체국은 허스튼의 이름을 기리며 그녀의 우표를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윈프리가 아껴둔 소설 <그들의 눈은 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라 닐 허스튼이라는 이름은 앞으로 미국에서 더욱 맹위를 떨치게 될 것 같다. 토크쇼의 여왕인 오프라 윈프리가 허스튼의 소설 <그들의 눈은 신을 바라보고 있었다(Their Eyes Were Watching God·1937년 발간)>를 베스트셀러로 만들기 위해 이를 영화화하는 등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기 때문.

오는 3월 6일 <에이비시(ABC)>에서 저녁 9시부터 11시 30분까지 방영될 이 TV 영화는 윈프리가 9년 가까이 준비해온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윈프리는 허스튼의 소설을 너무 아낀 나머지 영화로 먼저 알려 일반인들의 주목을 일시에 받게 해야겠다는 욕심으로 이제껏 자신의 권장도서 목록에도 올리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윈프리는 이 영화를 위해 퓰리처 수상 극작가 수잔 로리팍스는 물론 오스카 수상 여배우인 홀 배리를 영입했을 정도다.

그렇다면 이토록 윈프리가 아껴두었던 허스튼의 소설 <그들의 눈은 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어떤 작품인가. ‘그들의 눈은…’ 은 이미 미국 내 대학과 고등학교 영재반 학생들의 필독도서중 하나다.

이 소설은 흑인 여주인공 제니 크로포드가 세 명의 남편을 거치며 자아에 눈을 뜨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제니는 첫 번째 시골 재산가 남편에게서 도망치고, 두 번째 학대받는 작은 도시의 시장 아내를 거쳐, 마지막으로 자기보다 훨씬 어리지만 제법 인간적인 남편을 만나 인생을 즐긴다.

그러나 그 마지막 남편과의 사랑도 허위였음이 곧 밝혀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무시무시한 플로리다의 허리케인에서 탈출하다가 개에게 물려 광견병으로 고생한다. 결국 총으로 남편을 살해하고 법정에 선 제니는 사고사로 인정 받아 무죄 석방된 뒤 옛집으로 돌아온다.

제니는 허스튼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녀는 소설 속에서 당시로서는 신기루 같던 여성으로로서의 ‘권리’를 내면적으로 쓰디쓰게 독백한다. 현실로부터는 도망의 연속이었으나, 그녀는 결국 ‘자신’을 찾아낸다. 1920년 당시 흑인 여성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주제였다.

흑인 작가라면 인종차별로 인한 억울함을 호소하고, 뜻있는 백인들의 동정을 얻어내는 것이 고작이었던 시절, 흑인 여성의 사랑과 자아 발견을 그린 이 소설은 바람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자아’ 찾아 나선 ‘흑인 여성문학의 어머니’

1942년에 쓴 자서전 ‘Dust Tracks on a Road’에서 그녀는 “사람들은 니그로라면 당연히 인종문제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나는 그 주제에 사로잡히기를 싫어한다. 나의 관심은 인종에 관계없이 한 남자나 여자를 이렇게 저렇게 규정해 온 것(관습)에 있다”고 썼다.

▲ 야외 가설무대에서 한 흑인 코미디언이 공연을 하고 있는 모습.
ⓒ 김명곤
실제로 주관이 강하고 카리스마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진 허스튼은 흑인 민담에나 나오는 독특한 방언도 거침없이 소설 속에 쏟아 부었다. 또 이튼빌에 살면서 겪은 당시 흑인들의 낙천적인 생활 모습을 리얼하게 담았다. 이 책을 통해 조라 닐 허스튼은 ‘흑인 여성문학의 어머니’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1903년 앨라배마에서 가난한 목사의 딸로 태어난 허스튼은 이튼빌에서 주요 성장기를 보낸 뒤, 13세 때 계모의 학대에 견디다 못해 가출했다. 갖은 고생 끝에 그녀는 메릴랜드 주의 하워드 대학에 들어갔다. 1925년 뉴욕으로 간 허스튼은 이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고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재능을 인정한 뉴욕 버나드 칼리지는 장학금을 주었고, 허스튼은 이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의 아버지’ 프란츠 보아즈의 지도아래 민속학을 공부했다. 이때부터 허스튼은 그녀의 소설 속에 흑인 민속을 접합시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1937년에 드디어 출간된 그녀의 대표작 <그들의 눈은 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기존의 흑인 문학의 흐름을 뒤집어 놓았다.

‘사랑’ 운운 하는 그녀의 소설에 대해 흑인사회에서는 백인들의 영향을 받아 쓴 ‘사치스런 소설’이라 꼬집었다. 백인 사회에서는 허스튼의 흑인 민속과 방언의 결합을 들어 지나치게 ‘흑인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녀의 대표작으로는 이외에 <요나의 박넝쿨(Johab's Gourd Vine)>, 민속 연구서 <노새와 사람들(Mules and Men)>, <내 말에게 전하라(Tell My Horse)> 등이 있다.

▲ 조라 허스튼이 생전에 쓰던 물품들. 조라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 김명곤
특히 1970년대에 미국에서 흑인 여성 문학이 독특한 비평적 흐름을 형성하면서 허스튼은 앨리스 워커, 노벨상 수상자인 토니 모리슨, 토니 케이드 밤바라로 이어지는 흑인 여성문학의 전통에 확고한 위치를 얻게 되었다.

허스튼은 1948년 작가생활을 접었다. 그녀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워너브라더스 영화 극본도 쓰고 연방의회 도서관에서 일하기도 했으나, 마지막 거주처인 뉴욕에서 어느 날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고 12년 뒤인 1960년 1월 28일 플로리다 남부의 한 호텔에서 청소부로 일하다 영양실조로 죽었다.

한때 유명 대학 장학금을 받아가며 공부한 재능 있는 작가가 어떻게 가난뱅이가 되어 영양실조까지 걸려 마지막을 맞았는지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흑인여성 작가에 대한 사회적 지위와 대우가 당시에 형편없었을 터이고 이로 인해 매우 궁핍한 생활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뿐이다.

플로리다를 사랑했던 ‘남부의 천재’

▲ 조라 닐 허스튼이 글을 쓸 당시 자주 방문했던 친구 집 '모슬리 하우스'
ⓒ 김명곤
침례교 목사였던 허스튼의 아버지인 존 허스튼은 1890년경 플로리다에서 온 한 여행객으로부터 100% 순수 흑인 자치도시인 이튼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곧 이주한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이 지역의 세 번째 시장을 지냈다. 지금은 현대식으로 증축된 마케도니아 침례교회의 제 2대 목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현재 이튼빌에 허스튼 가족이 살던 집은 없어졌다. 그러나 허스튼이 소설을 쓰기위해 방문했던 친구 집은 아직 ‘모슬리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젊은 시절을 북쪽에서 살았던 허스튼은 친구 모슬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추운 날씨와 앙상한 나뭇가지, 그리고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 북쪽지방의 아침이 싫다”고 적었다.

1938년 또 다른 친구인 칼 반 베크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꽃들로 뒤덮인 오렌지 나무에서 나는 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벌들은 하루 종일 나무 주위를 돌아다니고 새들은 달빛 아래에서 밤새워 노래부른다”고 적어 그녀가 플로리다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 중앙플로리다를 가로지르는 1-4 고속도로에서 바라본 허스튼의 고향 이튼빌. 아래쪽 파란색 건물이 조라 닐 허스튼이 다녔던 헝거포드 학교에 새로 지은 체육관이다.
ⓒ 김명곤
1960년 1월 28일, 그녀는 결국 자신이 좋아했던 플로리다로 내려와 포트 피어스의 한 흑인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녀가 홀로 외롭게 죽은 지 13년이 지난 1973년, 조라 허스튼의 무덤을 찾은 앨리스 워커는 진 툼머의 시 한 부분을 허스튼의 묘에 새겼다.

‘Zora Neale Hurston: A Genius of the South (남부의 천재 조라 닐 허스튼)’.

<그들의 눈은...>의 주인공 제니가 첫 번째 남자의 집에서 두 번째 남자에게 도망가는 장면에서 묘사된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꽃’을 찾아 헤매는 영리한 한 마리의 벌이었다. 숨이 턱턱 막히던 세상을 살면서 여린 눈동자로 신을 응시하며 차별 없는 세상을 소망했던 한 천재의 꿈은 이제 수많은 ‘조라’들에 의해 현실화 되어 가고 있다.

허스튼의 성장지 이튼빌과 '조라! 페스티벌'

▲ '조라!' 페스티벌에 참가한 흑인 토산품점

허스튼의 성장지인 이튼빌(Eatonville)은 1800년대 후반 미 남북전쟁 이후 노예에서 해방된 흑인들이 앨라배마, 조지아, 미시시피 등지의 인종차별을 피해 이 지역으로 몰려들어오며 탄생했다.

이튼빌은 맨 처음 이 지역에 이주해 온 흑인 비즈니스맨이 현재 이튼빌과 인접해 있는 메이트랜드 시의 설립자 ‘조시아 이튼’으로부터 땅을 사들여 이를 흑인들에게 집중적으로 매매함으로서 자치도시의 초석이 닦여지게 되었다.

땅을 사들인 27명의 흑인 이주자들은 1887년 회합을 갖고 그들만의 자치행정을 결의하고 땅의 원 소유자였던 조시아 이튼의 이름을 따서 시 이름을 이튼빌이라 정하고 첫 시장과 5명의 시의원들을 선출했다. 이로써 미국에서 최초의 흑인 자치 행정도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현재 올랜도 중심부를 통과하는 하이웨이 I-4 곁에 위치한 이튼빌은 지금도 주민의 90%가 흑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이웨이를 지나치며 이 동네를 바라보면 미국 내 인구 팽창률 랭킹 10위 안에 드는 올랜도 시와는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 각 동네마다 상징적으로 세워져 있는 물탱크는 녹슬고 페인트가 벗겨진 채로 수년 동안 방치되어 있다. 최근 들어서 시 당국이 겨우 50만 불을 마련해 허스튼 기념 도서관을 새로 지었으나, 바로 옆에 있는 허스튼 문화 박물관은 국립 박물관 치고는 너무 초라하고 허술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카운티 당국에서는 이 지역의 오래된 중심도로를 확장한다는 발표를 했으나, 막상 지역의 흑인 원로들이 반대하고 있다. 140년 된 미국의 가장 오래된 흑인 커뮤니티가 손상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허스튼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동네 놀이방도 이 도로에 위치해 있다.

페스티벌 ‘조라!’

한편 해가 더할수록 그 활기를 띠어 가고 있는 페스티벌 ‘조라!(Zora!)’는 허스튼이 다녔다는 헝거포드 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다.

사흘 동안 벌어지는 거리 페스티벌에는 조지아, 앨라배마, 뉴욕, 캘리포니아 등 각 지역에서 온 예술가들이 천막을 치고 작품을 선보이며, 이 외에도 다양한 벤더들이 흑인 문화의 냄새가 물씬 묻어 있는 상품들을 판매한다.

올해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왔다는 나이든 바구니 공예가가 한쪽 천막에 앉아 각종 말린 풀들을 엮어 독특한 바구니를 짜고 있었다.

또 뉴욕에서 왔다는 흑인 빈티지 뮤직 CD판매업자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머리가 허리까지 넘어가도록 춤을 추며 ‘야한’ 립싱크를 하고 있었다.

줄줄이 늘어선 음식 벤더들의 메뉴에는 흑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생선 튀김과 새우요리 그리고 바비큐요리가 주를 이루었다.

조라 축제는 매년 미국의 유명 작가를 초청하여 도서축제를 열고 사인회를 한다. 올해 책 사인회 초청인사는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에서 여주인공역을 맡았으며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 때 자신의 시를 낭독하기도 했던 흑인 유명인사 마야 안젤로였다. 28일 그의 책 사인회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인파가 몰렸다.

그러나 페스티벌을 가장 활기 있게 만드는 곳은 운동장의 메인스테이지. 이 곳에선 정해진 시간에 맞춰 아프리칸 댄스파티와 초청가수 공연 등이 3일내내 펼쳐졌다. 가수들과 댄서들도 대부분 흑인들이었다.

사흘 동안 벌어지는 페스티벌 외에도 앞서 이틀 동안은 시내 호텔이나 시빅 센터에서 문학 강연회와 '햇티튜드' 라는 모자 전시회 겸 패션쇼도 열렸다. 햇티튜드는 유난히 모자패션을 즐겼던 허스튼의 취향을 맛보고자 마련된 것이다. / 김명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미국 플로리다에서 발행되고 있는 시사-종합 주간지 <코리아 위클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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