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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포스터
ⓒ 인권위
2003년 겨울,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씨는 외국인이주노동자의 농성이 한창 벌어지던 성공회성당을 찾았다. 안산과 명동성당 등 그 해 11월에 시작된 이주노동자의 농성장 여러 곳을 다니던 중이었다.

성당 한 켠에 마련된 천막에서 생활하던 이주노동자들은 추위와 길어진 농성 탓인지 지쳐 보이기도 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지금 뭐가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목욕을 하고 싶다고 말한 노동자도 있었다. 성당에는 목욕 시설이 없을 뿐더러 경찰의 눈을 피해 외부목욕탕에 가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그 날 밤 그는 이주노동자 몇 사람을 자신의 차에 태워 집으로 갔다. 목욕탕을 제공한 것이다. 며칠 후 그는 붓과 물감을 들고 다시 농성장을 찾아갔다. 성당 앞마당에서 이주노동자들과 그림을 그렸다. 그들이 그린 그림들은 한 결같이 진솔하고 아름다웠다. 이어서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에서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을 써보라고 했다.

▲ 인권포스터
ⓒ 인권위
“너의 나라에도 해가 떠냐.” 한국말이 서툴러 맞춤법은 틀렸지만 그 노동자는 자신이 들었던 가장 싫었던 말을 쓰면서, ‘너희 나라에도 냉장고가 있냐’, ‘너희 나라에도 자동차가 있냐’ 등을 들었을 때 가장 슬펐다고 했다. 안씨는 외국인이주노동자의 사진을 찍고 노동자가 쓴 글 그대로 넣어서 포스터를 만들었다.

이 작업은 국가인권위가 기획한 차별예방을 위한 인권포스터 프로젝트 중의 하나이다. 이 포스터 프로젝트에는 안씨를 포함하여 고강철, 김도형, 김두섭, 김영철, 문승영, 박금준, 박불똥, 안병학, 안성금, 윤호섭, 이나미, 이섭, 이성표, 최준석, 홍성담 등 열여섯 작가가 참여했다. 2003년 가을부터 작가들은 워크숍을 시작했다. 각자 작업 초안을 가져와서 서로 토론하는 방식이었다.

남의 작업에 대해 의견을 말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작가들은 이 프로젝트가 작가 개인의 작업을 뛰어넘어 대중과 의사소통하여야 한다는데 동의하고 있었다. 또한 차별문제에 대한 각자의 고민을 털어놓는 자리이기도 하고 서로에게서 배우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여러 차례 초안을 내놓는 경우도 많았다. 최종결과물은 16점이었지만 토론과정에서 생산된 포스터들은 훨씬 많았다.

▲ 인권포스터
ⓒ 인권위
'남녀차별의 시작, 가족'이라는 카피를 단 안병학씨의 작업은 작가 자신의 부모 결혼식 사진과 어머니가 외할아버지에게서 받은 편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60년대 전형적인 가족 풍경이었던, 시집보낸 딸이 친정에 한번 와주길 바라는 아버지의 심정을 담은 편지가 바로 그것이다. 성차별에 대한 각성은 또 다른 작가에게서도 나타난다.

▲ 인권포스터
ⓒ 인권위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남아선호’의 풍경들을 고발한 박불똥 씨(‘아들맞이 딸맞이 차별없는 달맞이’)의 작업과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대표적인 여성수난사로 형상화한 홍성담씨의 작업이 그러하다.

나이차별에 대해서도 두 작품이 생산되었다. 노인과 어린이 등 사회 구성원 그 누구일지라도 평등에 기초해야 한다는 뜻을 담은 윤호섭씨 작업, 그리고 안성금씨 작업 또한 같은 맥락 안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생활 안에서의 차별을 날 것으로 꺼내 보이고 있다. 우화를 통해 일상화된 차별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촌철살인의 기지 또한 있다.

▲ 인권포스터
ⓒ 인권위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획일화된 사회, 일반적이지 않은 외모를 한 이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요?”라며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성표)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차별들을 당사자의 입을 빌어 꼬집는 ‘차이를 차별할 순 없어요’(고강철) 미운오리새끼 우화 그대로 빌어온 ‘얼레리꼴레리’(박금준) 등 차라리 우화이기에 바라 볼 수 있는 절박한 차별의 현장이다.

▲ 인권포스터
ⓒ 인권위
차별이 가해지는 현장을 옮겨와 문제의 현재성을 강조한 작가들도 있다. 김영철씨가 비유하고 있는 우리사회 교육제도, 그 피해 당사자는 바로 우리와 우리 아이들임을 르포처럼 보여준다. 이데올로기를 근원으로 차별이 횡횡하는 우리 현실을 아프게 꼬집는 작가들도 있다. 최준석씨의 직접화법과 김도형씨의 간접화법은 단편적인 문제의 ‘두꺼운 현재’를 펼쳐 보여주었다.

▲ 인권포스터
ⓒ 인권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을 하늘아래 평등한 인간이라는 의미로 하나의 큰 원으로 형상화 시키고 있다든지(김두섭), ‘너와 나’의 가름을 상쇄하는 기묘한 글자의 제안이 사람과 하늘의 만남으로 만들어지는 글자구성 원리로 표현하기도 했다(문승영).

▲ 인권포스터
ⓒ 인권위
이나미씨(“몸을 선택할 권리는 갖지 못했지만 삶을 선택할 권리를…원한다.”)가 표현한 우리 사회 성소수자(트랜스젠더) 작업은 동시대에 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차별적 폭력을 잊고 사는지 아프게 묻는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가한 16명의 시각 예술가들은 지난 2년여 동안 차별을 표현하기 위해 각자 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차별을 확인하는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 포스터가 만들어졌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1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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