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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인오씨 모친 전재순씨
ⓒ 김대홍
지난 19일 전재순(72)씨를 만났다. 전씨는 92년 안기부의 '중부지역당'사건 발표에서 '총책'으로 지목된 황인오(47)씨의 모친이다.

황인오씨가 최근 온 가족이 안기부에 구금됐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부쩍 언론 노출 빈도가 높아졌다. 좋지도 않은 옛일을 다시 끄집어낸다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인터뷰 약속을 받고서 마지막 확인 전화를 한 날 집으로 전화를 걸자 황씨의 부친이 전화를 받았다. 마뜩찮은 목소리로 "해묵은 일을 왜 자꾸 들춰내려고 하냐"며 역정을 냈다. 최근 옛 일로 부쩍 불편해진 심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전재순씨는 이보다 여유롭게 기자를 맞이했다. 인사를 하고 나자 먼저 화두를 꺼낸 것도 전씨였다. 국가보안법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수십 년 동안 국가보안법 갖고 잘 써먹었으면 됐지 왜 아직도 유지하려고 발버둥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면서.

온가족이 안기부에 끌려가

전씨가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끌려간 것은 추석날이었다. 커피숍으로 전씨를 불러낸 안기부 직원이 "아들 두 명과 며느리 두 명을 면회시켜준다"고 한 것.

당시 황인오씨가 구속되면서 황씨의 아내와 큰형 부부, 그리고 손자가 사라진 상태였다.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가족들의 소식을 처음 듣는 순간이었다. 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선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머리가 처박힌 상태에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안기부로 갔다고 한다. '불고지죄'의 올가미가 씌워진 것이었다.

당시 구금된 방 번호는 1115호. 12년이 지났지만 끔찍했던 기억 탓인지 정확하게 방 번호를 외우고 있다.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 테이블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진 방에 데려다놓고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와서 옷을 다 벗긴 뒤 군복을 입혔다고 한다.

양말까지 벗기고 검정 고무신을 신은 전재순씨는 하루아침에 죄인신분이 된 것이다. 영문도 모르는 그에게 안기부 직원은 "여기가 어딘 줄 아느냐. 국가안전기획부 간첩 잡는 곳"이라며 호통을 쳤단다.

그 뒤부터는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됐다. 안기부 직원들은 아들 황인오가 노동당에 입당했다고 말을 꺼냈고, 전씨는 그게 뭐가 문제냐고 대꾸했다. '노동당'이라면 당시 창당한 한국노동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북한 노동당에 입당했다"고 목소리를 높인 안기부 직원에게 "북한이 이웃도 아닌데 어떻게 가능하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다음에는 이선실을 아느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전씨는 "이선실은 모르고 당시 장기표가 만든 민중당에 이선화란 사람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활동하면서 먼발치서 본 적이 있다는 진술이 이선실을 아는 것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이선실을 집에 불러서 밥도 해주는 사이로 각색이 됐단다.

▲ 옛기억을 더듬는 전재순씨
ⓒ 김대홍
면회를 빌미로 구금된 전씨는 꼬박 사흘동안 조사를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옆에서는 아들 황인오씨의 비명소리가 들려 잠을 잘 수도 물 한 모금 마실 수도 없었다고.

사흘 뒤에는 중부경찰서 지하에 잠시 구금됐다. 구금이 48시간을 넘길 때 연장도장이 필요하기 때문에 경찰서 지하에 구금해놓고 안기부 직원들이 서장 도장을 가져와 마음대로 연장해 버렸다는 것. 불법 감금에다가 불법 연장이 이뤄졌다는 설명이다.

당시 경찰서 지하실에는 여자들이 많이 끌려와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전씨는 그 여자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단다. 가족들 걱정에 몇 날을 잠자지 못한 자신과 비교하면 그들이 참 걱정 없게 보였다고.

"조사 중 정형근 대면하기도"

그 뒤 다시 안기부 조사에 들어가 총 20일 동안 조사를 받는 동안 협심증 때문에 정신 잃고 쓰러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시 안기부 수사차장보였던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과 대면한 기억도 있다. 어느 날 몇 사람을 대동한 간부인 듯한 사람이 들이닥쳐서 "영감, 큰아들, 둘째아들 셋을 눈앞에서 총살시키면 불겠냐"고 협박했단다.

안기부가 당시 얼마나 많은 예산을 썼는지 눈으로 확인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매일 밤 테이블 위에 전재순씨의 이름이 적힌 노란 봉투가 전달됐는데, 그 안에 만원짜리 지폐가 항상 가득 차 있었다고. 그 돈으로 직원들이 매일 음식을 사서 잔칫집 마냥 먹었다고 털어놓는다. 국민의 세금이 그렇게 낭비된 게 아니냐며 한숨을 내쉰다.

가족 면회는 물론 단 한 차례도 이뤄지지 못했다. 손자만이라도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이마저도 묵살됐다. 고문은 아들뿐만 아니라 며느리에게도 이뤄졌다는 게 전씨의 말이다.

"4살짜리 애 보는 앞에서 엄마 구타했다"

특히 가슴 아팠던 것은, 먼저 연행됐던 며느리가 네 살배기 손자 앞에서 구타와 폭행과 욕설을 당한 것이다. 당시 네 살에 불과했던 손자가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당연한 일. 전씨는 조사받는 열흘 동안 거의 대부분 손자가 보는 앞에서 며느리에게 폭력이 가해졌다는 이야기를 며느리에게 나중에 들었다고 한다.

그가 생각하기로는 자식 앞에서 약해지는 모성을 이용하기 위해 수사관들이 그런 끔찍한 상황 앞에 모자를 대면시켰을 거라고 추측한다.

조사실 근처에서 손자가 옹알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얼굴 한 번 보게 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그마저도 “규정상 안 된다”며 거부당했다. 엄마가 안기부에서 조사받는 동안 내내 안기부 지하실에 갇혀 있던 손자는 결국 엄마가 구치소로 보내지는 날 할아버지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손자, 덩치크고 시퍼런 옷 입은 사람 지금도 기피"

지금 열여섯 살인 손자는 당시의 잠재의식이 남아 지금도 덩치가 크고 시퍼런 옷을 입은 사람은 기피한다고. 전씨도 척추와 관절이 불편하고, 아직까지 악몽을 꿀 정도로 후유증을 앓고 있단다.

20일간 조사를 받던 그는 끝내 공소장 내용에 승복하게 된다. 몸과 마음이 지쳐 이미 자포자기한 상태인 데다가, 한 몸이라도 풀려나야 밖에서 석방운동이라도 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가족 사진 현대무역센터에 전시되기도"

ⓒ 김대홍
그런데 고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풀려나고 얼마 뒤 11월경에는 가족 사진이 현대무역센터에 전시되고, 서울역에서는 용공시비성 행사 홍보용으로 이용됐다. 동네에서도 따돌림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당시 동네사람 중 한 사람이 사람들 인사시키는 자리에서 황인오씨 부친을 가리키며 "간첩 황인오 아버지"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는 일화를 들려준다.

연좌제 때문에 자식들의 취업문도 막혔단다. 한동안 직장을 잡지 못하던 첫째 아들이 결국 일자리를 얻은 게 버스 운전기사. 살길이 막막해진 며느리가 한동안 친정살이를 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잠시 목소리가 잦아든다. 아들 두 명이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난 뒤, 컴맹으로 세상살이를 시작했다며 억울한 심정을 내비친다.

전씨는 당시 수사관들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들도 위에서 시키니 어쩔 수 없이 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조사를 받고 나오던 날 팀장 중 한 명이 "세상에 누가 누구를 만나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게 다 분단의 비극"이라는 이야기를 했다며 이해한다는 뜻을 비쳤다. 다 용서한다면서도 정형근 의원처럼 각본을 쓰고 지금도 뉘우치지 못하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국가보안법 논란도 하루빨리 끝났으면 하는 심정이다. 국가보안법대로 한다면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모두 범법자가 되고 금강산 관광 떠나는 사람들도 법 위반이 되는데 그게 말이 되냐고, 그리고 지금껏 김현희, 황장엽 같은 진짜 간첩들은 대우하면서 오히려 죄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든 게 국가보안법 아니었냐고 전씨는 말한다.

전씨는 지금이라도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억울하다"며 여러 번 되뇐다. "재심청구를 해야지. 가족들의 삶을 송두리째 다 앗아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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