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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의 국회 내 간첩암약 폭로사건 이후, '고문'이라는 이름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그 후 주 의원에 의해 '간첩'으로 지목된 열린우리당 이철우 의원은 자신이 고문에 의해 간첩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러자 일부에서는 우리 사회에 고문은 없었으며, 있었다고 해도 90년대 이전의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 90년대는 물론 2000년도까지도 여전히 공안기관 지하 밀실로 끌려가 국보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으면서 고문이 자행됐음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증언들이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10여 차례에 걸쳐 고문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보도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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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내 '고문 수사'의 담당 검사는 정형근"


▲ 남산은 2개가 있다. 서울타워가 있는 푸르른 남산과 인권유린을 일삼던 서슬 푸른 '남산'. 왼쪽 건물이 각종 시국사범들에게 고문수사를 자행햇던 옛 안기부 별관이다.
ⓒ 권기봉
내가 갑자기 집에 들이닥친 건장한 남자들에게 검은 승용차에 강제로 태워져 남산 안기부 수사실로 끌려 간 것은 1990년 11월 13일이었다.

그때 나는 결혼식을 올린 지 채 10여일밖에 되지 않은 새색시였고, 작지만 포근했던 반지하 신혼집에는 아직 풀어서 정리하지 못한 짐들이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내가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건 그 날로부터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나는 89년부터 '노동해방 문학실'이라는 대중 문예운동 단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안기부는 우리 단체를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이 주도하는 대중 조직으로 규정하고, 국가보안법 제3조 '반국가 단체 구성·가입' 명목으로 단체 활동가를 대부분 강제 연행해서 불법으로 감금하고 고문 수사했다.

남산이 가까워지자 그들은 나에게 눈을 감고 다리 사이로 얼굴을 깊숙이 파묻도록 했다. 차는 언덕을 오르고, 철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에도 한참 동안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서 어느 회색 건물 앞에 멈춰섰다.

양 손에 수갑을 차고 지하 수사실로 끌려 들어가는 내 등 뒤로 짧은 가을 저녁 햇살이 희미한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언제 다시 저 햇살을 마주 볼 수 있을까. 앞으로 나에게 어떤 일이 닥칠 것인지, 살아서 이 곳을 나갈 수 있을지, 아무 것도 짐작할 수 없는 참담함 속에 막연한 공포가 엄습해 왔다.

식사와 모든 진술을 거부하고 먼저 변호인 접견과 가족 면회를 요구하자 그들의 협박이 시작되었다.

"요즘 안기부 많이 좋아졌다. 예전에는 일단 끌려 들어오면 무조건 거꾸로 매달아 놓고 수사했다."
"여기서 한 층만 더 내려가면 온갖 고문 기구들이 있다. 거기부터 가고 싶나."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도 모른다. 너 하나쯤 죽어 나가도 우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수사관들은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2조가 교대하며 24시간 감시했다. 창문 하나 없이 온통 하얀 방음벽으로 된 작은 방에는 자해 방지를 위해서 모서리를 고무 패킹으로 감싼 철제 책상 네 개와 구석에 야전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들은 잠을 재우지 않았다. 1분이 10시간처럼, 하루가 한 달처럼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갔다. 밤인지 낮인지 모르는 시간 동안 그들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순간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며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밀려오면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면 이내 소리를 지르며 흔들어서 잠을 깨웠다.

영장없이 피의자를 구금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인 3일째가 되었을 때, 구속영장이 나오면서 잠깐 지하 수사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피의자 구금 절차를 밟기 위해서 중부경찰서로 향했다. 법적으론 안기부에서 조사받는 피의자는 중부경찰서에 유치되어 있다가 수사받을 때만 안기부로 들어가거나 수사관들이 경찰서로 와서 조사를 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서류상의 법이었고, 모든 국가보안법 피의자들은 20일이 넘는 기간을 아무런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24시간 안기부 수사실에서 지내야 했다. 관행으로 저지르는 불법 구금 사실을 사법부와 경찰 모두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들이야말로 이 위법 현장의 배후에 있는 가장 막강한 후원자들이었다.

중부경찰서에 머문 시간은 불과 5분 정도였다.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이러한 불법 구금에 대해서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 이제는 의자에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벽에 기대지 못하도록 멀찌감치 떨어뜨려 세워 놓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발바닥에서부터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통증은 발 뒤꿈치를 타고 등으로 어깨로 올라와 팔을 들 수 없을 만큼 아팠고 극심한 두통으로 번져갔다. 그러나 신체의 고통은 이 한번 악 물면 차라리 참을 수 있었다.

그들은 내 신혼집을 압수수색하면서 책과 워드프로세서는 물론 사건과 전혀 상관없는 사생활이 담긴 일기장·편지·사진까지 몽땅 털어왔다. 나를 방 한 편에 세워 놓고 남편과 연애 시절 주고 받은 편지와 일기장을 들추며, 한 줄 한 줄 큰소리로 읽으면서, 자기들끼리 낄낄거려가면서 조롱을 일삼았다.

가족 면회를 시켜주면 진술하겠다고 하자 딱 한 번, 남산 근처 모텔에서 어머니를 만나게 해 주었다. 10여 분 짧은 만남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연로하신 어머니에게 1시간 내로 오지 않으면 면회하지 못한다고 윽박질러서, 어머니는 정말 아무한테도 연락하지 못하고 혼자 울면서 그 곳으로 오셨다.

면회하는 내내 나를 붙잡고 '이것아, 어쩌면 좋으냐…. 어쩌면 좋으냐…'하고 눈물만 흘리셨다. 나도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울컥울컥 흘러내려 둘이 부둥켜 안고 울기만 했다.

그날, 면회를 마치고 수사실로 돌아와서 다시 제대로 된 가족 면회 시간을 요구하자 그들은 입에 담기 힘든 폭언을 퍼부으며 내 양쪽 뺨을 수십 차례 때리고 바닥에 쓰러진 나를 발로 짓밟았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자기들끼리는 결코 이름을 부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은 물론 성조차 알 수 없었다. 나 혼자 맘 속으로 생김새에 따라 별명을 지어 불렀다.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독사, 늘 으르렁거리는 돼지같은 인상을 지닌 멧돼지, 커다란 체구에 검은 가죽 점퍼를 즐겨 입는 곰.

곰은 나를 담당한 수사팀의 반장이었고, 독사와 멧돼지는 위에서 수시로 내려와서 폭언과 구타를 일삼고 나가는 자들이었다.

곰은 주로 뺨을 때렸다. 독사는 내가 잠을 자거나 누워서 쉬지 못하도록 아예 야전 침대를 빼내 버리도록 지시했다. 어느 날, 맞아서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 나를 본 멧돼지는, "저 XX년, 매달아 버려. 고춧가루 맛을 봐야 정신 차리겠어" 그렇게 말했다.

물론 그들은 나를 정말 매달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문의 위협과 숨 쉬기도 힘겨울 만큼 강압적인 지하수사실의 긴장 속에, 나는 서서히 지쳐갔고 정신은 피폐해졌다. 내가 정말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왜 여기서 이런 고초를 겪는 것인지 스스로 생각하지도 않을 만큼 몽롱해지는 의식의 끝을 하루하루 힘겹게 부여잡고 있었다.

그 당시에 안기부에 갓 입사한 듯한 젊은 수사관 한 사람은 정말 안타까운 듯 내게 물었다. 그까짓 것 진술서에 지장 몇 번 찍어주고, 부르는 대로 받아 써주기만 하면 쉽게 끝나는 걸 왜 고난을 자초하느냐고.

그것은 한 인간의 자존에 관한 문제였다. 단지 어떤 사상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불법으로 감금하고, 최소한의 법적 보호도 없이 고문하고, 있지도 않은 사실을 부풀려서 조작하기를 일삼는 국가 권력에게, 그럼에도 국가보안법의 시퍼런 칼날도 결코 굴복 시킬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이 진정 인간됨을 지키기 위한 사상의 자유라는 것을 그들에게, 나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검찰로 넘어가던 날, 곰은 내게 말했다.

"이렇게 잘해줬는데도 니네들은 나가기만 하면 한결같이 고문당했네, 어쨌네 떠들어 대더라."

그들에게는 전기고문, 물고문, 팔 다리를 묶어서 거꾸로 매다는 통닭구이만 고문이었다. 나는 속으로, 여기서 나가면 절대로 아무 것도 떠올리지 않겠노라, 꿈에서라도 당신들을 다시 보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리고 정말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다. 15년이라는 세월은 고통의 시간을 희미한 기억의 뒤편으로 밀어내 주었다. 나는 애써 그 시간의 기억들을 묻어두고 지워버리며 살았다.

얼마 전, 재일동포 간첩단 조작 사건으로 고문을 당하고 20년 가까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신 신귀영 선생님의 증언을 바로 옆에서 들을 기회가 있었다. 아직도 그 당시를 떠올리는 선생님의 음성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고문 수사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를 때 종이를 든 손에 애써 참으려 핏줄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서 나도 따라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먹먹해왔다.

나는 그 시간을 잊으려 애써왔다. 선생님은 고령에 고문 후유증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조작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고 애쓰면서, 오직 잊지 않기 위해서 참담한 고통의 시간들을 얼마나 힘겹게 되새기고 또 되새기면서 살아 오셨을까.

국가보안법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지난 역사 속에 자행된 고문과 조작의 진실은 결코 밝혀지지 않을 것이며, 또한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지난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이상 우리는 야만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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