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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대사의 비극

▲ 우당 이회영
ⓒ 우당기념사업회
나라가 외침 당했을 때 피지배 백성들은 대체로 세 부류로 나뉜다.

외세에 과감히 맞서 빼앗긴 나라를 도로 찾겠다는 의로운 무리가 하나요, 그와 반대로 외세에 굴복하여 그 앞잡이가 되어 동족 위에 군림하는 민족 반역의 무리가 또 하나요, 마지막 하나는 좌고우면하면서 가족이나 일신의 보신에만 급급하면서 살아가는 무리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았을 때 외세에 맞서 과감하게 싸웠던 분들이 전면에 나서 다시 나라를 세우고, 침략 기간 동안 동족을 괴롭혔던 반민족 행위자들을 찾아서 처벌했어야 정의가 넘치는 반듯한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데 바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있다.

독립운동사에 까막눈이었던 필자가 최근 5년여 동안 국내외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답사하고,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을 만나 증언을 듣게 됐다. 그리고 먼지 묻은 독립운동사 책장을 펼친 탓으로 어슴푸레하게나마 그 실체를 알게 되었다.

옛 글에 "집이 가난해지면 어진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어진 재상을 생각한다(家貧則思良妻, 國亂則思良相)"라고 했다. 즉, 진짜 애국자는 국난을 당할 때 나라를 구하겠다고 온몸과 재산을 바친 분들이다.

필자는 항일유적 현장을 답사하고 묵은 책장을 넘기면서, 일제 강점기 동안 온몸으로 맞선 여러 훌륭한 어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분들의 뜨거운 겨레 사랑과 나라 사랑에 감동했으며 그들과 같은 한민족으로 태어난 게 자랑스러웠다. 그분들의 정신이 이어지기에 우리 나라는 앞으로도 무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보고 들은 것이 적어서 잘못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 나라 삼대 항일 명문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왕산(旺山) 허위(許蔿),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집안이라고 한다.

세 집안 모두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나라를 빼앗긴 후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망명길에 올라 만주의 언 땅에다가 조국 광복의 씨앗을 뿌리는 데 앞장 섰다.

최초의 독립군 양성소,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다

▲ 우당의 주도로 세운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옛 터(2004년 5월 필자가 제3차 항일유적답사 때 촬영)
ⓒ 박도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려 하자 우당은 이동녕, 이상설 등과 함께 상소를 올리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일본과 내통한 일부 대신들이 이 조약을 맺었고 우당의 아우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은 항의 표시로 외부 교섭국장 관직에서 물러났다.

▲ 유하 현 삼원포 추가가(현 명성촌)에 있는 우당 6형제가 거처한 것으로 추정되는 옛 집 터.
ⓒ 박도
우당은 외교적인 방법으로 나라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독립기지를 세울 터를 물색하기 위해 이상설, 이동녕과 함께 만주로 갔다. 그리고 우당 일행은 간도 용정에 머물면서 서전의숙을 설립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의 밀사를 보낸 것도 우당이 주도면밀하게 고종 황제에게 몰래 주청해 실행한 것이다.

1910년 8월 마침내 나라가 완전히 일제에 넘어가자 그해 12월 우당 6형제의 가족 40여명이 망명의 길에 올랐다(권속까지 60여명).

우당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11대 후손이다. 이 집안은 8대를 내리 판서를 배출한 삼한갑족으로, 8대의 판서 중 6명의 영의정과 1명의 좌의정을 낸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우당 6형제(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가 가산을 모두 처분하여 마련한 40만냥(현 시가 약 600억원 상당)은 모두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건립 등 독립자금으로 쓰였다.

이들 우당 6형제 가족은 그해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 단동)에서 머문 후 다시 이듬해 정월 안동을 떠나 횡도천으로, 거기서 다시 출발 2월 초순에야 목적지인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도착했다.

이어서 석주 일가와 일송 김동삼 일가 등 우국 망명객들이 추가가 일대에 속속 도착해 한인촌을 이루자 현지 중국인들의 의혹이 커졌다.

▲ 동삼성에 토지 매입 및 입적을 청원한 문서, 이회영과 이계동(이상룡 아우)의 명의로 되어 있음
ⓒ 박도
"이전의 조선인들은 남부여대로 산전박토나 일궈 감자나 심어 연명했는데 이번에 오는 한인(조선인)들은 마차 수십대에 살림을 실어 오는 걸 보면 필경 일본과 합하여 우리 중국을 치러 온 게 분명하니 빨리 꺼우리(한인)들을 몰아내 주시오"라고 현지인들이 유하현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회영이 나서서 북경에서 총리대신 원세개를 만나 협조를 구한 끝에 동포들의 입적과 토지 매매 문제가 원활히 해결됐다. 1912년 합니하에 번듯한 신흥무관학교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우당 일가의 자금과 원세개의 도움으로 토지 매매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최초의 독립군 양성소로 10년간 약 3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그들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승첩에 주역이 됐다. 일찍이 월남 이상재 선생은 우당 가문을 다음과 같이 기리고 있다.

동서 역사상에 국가가 망할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처럼 6형제 가족 40여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일제히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 청산리 어귀에 있는 청산리 항일대첩기념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이 전투에 중견 간부로 활약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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