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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뜨기 직전. 하늘과 바다가 붉게 물들기 시작합니다
ⓒ 이정근
'대한뉴스' 애국가에도 나오는 동해안 촛대바위. 드라마 '모래시계' 방영 이후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른 정동진. 호랑이 꼬리인지 토끼 꼬리인지 아직 분명하지 않은 호미곶. 삼대에 걸쳐 공덕을 쌓은 이에게만 보여준다는 지리산 천왕봉, 제주 성산 일출봉 등등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일출 명소를 보아왔건만 석굴암 해맞이는 생애 미답의 길이었다.

토함산 일출을 보지 못한 나에게 '석굴암에서 일출을 보지 않고는 한국 문화를 말하지 마라'는 말은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는 말이었으며 숙제를 다하지 못한 수험생처럼 늘 내 마음을 짓눌러오던 미완의 문제였다.

▲ 토함산에서 바라본 일출
ⓒ 이정근
새벽 5시. 중문 숙소에서 석굴암 일출에 대한 설렘 때문에 잠을 설치고 일찍 일어났다. 지도에 의지한 채 새벽길을 달리려니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토암산 진입로에 들어서니 북악 스카이웨이처럼 꼬불꼬불한 길이 낯선 외지인을 주눅들게 만든다.

귀가 막혔다 뚫렸다 반복하는 것을 보니 상당한 고도에 올라온 것 같은데 목적지로 정한 곳은 나타나지 않는다. 내려오는 차는 하나도 없고 어둡고 호젓한 길을 혼자 오르려니 혹시 길을 잘못 들었나 불안하다.

▲ 석굴암이 있는 석불사
ⓒ 이정근
백미러를 살펴보니 다행스럽게도 2대의 자동차가 꼬리를 물고 뒤따라온다. 한참을 달려도 계속 오르막길이다. 안되겠다 싶어 오르막길 간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지도를 보려 하니 뒤따라오던 차도 나를 따라 차를 세운다.

혹시 현지인 차일까 싶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쌀쌀한 바람이 상쾌하다. 말을 걸어보니 그 역시 외지인으로서 일출을 보기 위하여 토함산을 오르는 나그네란다.

▲ 구름에 가렸던 태양이 다시 나왔습니다
ⓒ 이정근
지도를 살펴보니 3분의 2 정도 오른 것 같다. 다시 출발하여 한참을 올라가니 주차요금을 받는 곳이 나타난다. 주차요금을 주면서 일출 시간을 물어보니 6시 40분이란다.

현재시간은 6시. 주차장에 도착하니 벌써 도착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제일 좋은 자리에 삼각대를 세우고 카메라를 장착해 놓고 있는 대여섯 명의 무리들은 사진 동호회 회원들이거나 사진을 직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 석굴암 일주문
ⓒ 이정근
6시 30분이 지나니까 관광버스도 몇 대 도착하여 주차장이 차기 시작하더니 일출을 구경하려는 숫자가 300여명쯤 되는 것 같다.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만 희미하게 보이던 칠흑 같은 감포 앞 바다가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6시 40분. 예정된 시간이건만 태양은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한참 후, 숨죽이며 기다리던 사람들 앞에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 석굴암과 석불사
ⓒ 이정근
그 모습을 바라보는 모든 이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눈부신 태양이 동해에서 떠오른 것이다. 그것도 잠시, 정확히 10초 정도 살짝 모습을 보여준 해가 구름 사이로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아쉬움에 자지러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잠시 후 구름 속으로 그 모습을 가렸던 태양이 다시 나타난다. 여기저기서 손뼉을 치며 환호성이 다시 터져 나온다.

▲ 석굴암 가는길
ⓒ 이정근
일출을 맞이한 후 서둘러 석굴암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른 관광지는 입장객을 받지 않을 이른 새벽인데도 일출 명소와 함께 있어서 그런지 입장권을 팔고 있었다. 잘 다듬어진 석굴암 가는 길도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

돌계단을 따라 석굴에 도착하니 본존불이 거기 있었다. 신라인의 예술 혼이 살아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본존여래좌상이 거기 있었다. 그 아미타 불상을 바라보는 순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모나리자 미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라인의 미소가 동해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 석굴암 본존여래좌상
ⓒ 이정근
토함산 정상을 기점으로 서쪽에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동쪽에 전세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지어달라는 경덕왕의 명에 따라 서기 751년에 김대성이 착공했다는 석굴암. 인도와 중국처럼 천연 암벽에 조각한 불상이 아니고 화강암을 인공적으로 다듬어 조각한 본존여래좌상은 국보 중에 단연 으뜸이었고 우리 민족 석조 미술의 걸작이었다.

연화무늬가 새겨진 대좌 위에 오른손은 무릎에 얹고 두 번째 손가락은 다음 손가락에 겹친 채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 가슴이 뛰면서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내 핏속에 흐르는 한국인 유전자 원형질 조각을 찾은 것 같은 충격의 느낌이었다.

이토록 찬란한 우리의 문화유산 본존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 전기까지 면면히 이어져온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불교 미술로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 가사(袈裟)를 걸친 우견편단(右肩遍袒) 양식의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교과서나 정부 자료는, 일본 학자들이 우리나라의 창조적인 불교 미술을 폄훼하기 위하여 명명한 '석가여래(釋迦如來)'라는 황국사관을 따르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 석굴암에서 바라본 일출
ⓒ 이정근
주차장에 마련된 일출 전망대에서 바라본 해돋이는 그저 관광지의 해맞이일 뿐, 진정 토함산의 해돋이는 석굴암에서 바라본 일출이었다.

장인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신라 미술의 결정체 본존여래불상이 바라보고 있는 위치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묻혀 있는 해중왕릉을 바라보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석굴암을 완성한 신라인의 건축 과학의 치밀함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석굴암이 창건될 그 시대 신라인들은 한 해의 끝과 시작을 동지로 생각했다. 석굴암의 아미타불상이 동짓날 해뜨는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판석 360장으로 궁륭형(穹形) 천정을 만들고 대형 판석 2장을 얹은 후 그 위에 흙을 덮었지만 1200년이 흐른 현재까지 감실의 습도를 조절하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의 각도까지 조절하는 신라인의 축조 기술은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석조 미술의 걸작으로서 그 비밀은 현대 첨단 과학으로도 풀지 못하고 있다니 신비스러울 뿐이다.

▲ 감포 앞바다에 있는 해중왕릉. 석굴암 본존여래좌상이 바라보는 위치가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의 수중릉이라는 설도 있지만 실측한 결과 0,9도 차이가 난다고 밝혀졌습니다
ⓒ 이정근
밖으로 나와 본존여래좌상과 같은 위치에서 동해바다를 바라보니 바다에서 솟아오른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찬란한 태양이었다. 그 태양은 가슴 벅찬 충격의 환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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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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