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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자! 학교는 신문지국, 교사는 신문배달부." 소년신문 학교 안 집단 구독을 놓고 터진 몇몇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외침이었다. 2002년 교원단체와 학부모단체들이 소년신문 강제구독 거부운동을 펼쳤지만 폐습은 여전한 상태다. 언론권력이 ‘코흘리개 초등학생’들의 전당인 학교 안까지 뻗쳐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서울교육청 새 교육감 취임 직후 학교장 명의의 ‘가정통신문’이 일제히 발송되는 등 문제가 점점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소년신문 학교 안 강제 구독의 폐해를 몇 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 필자 주


▲ 육군기념일 특집판 소년조선일보 1940년 3월 15일치. 물론 여기서 말하는 육군은 곧 황군이다.
ⓒ 언론재단DB
1937년 1월 10일. <소년조선일보>가 <조선일보부록> 형식을 띠고 이 땅에 처음 나온 날이다. 이 소년신문의 등장은 이 땅의 어린 영혼들에게 희망이었을까, 절망이었을까.

이 날치 <조선일보> 사고는 희망을 약속했다.

"앞날 사회의 주인공이요, 젊은 조선의 단일 희망인 우리 어린이들을 위하여 본사가 새해 새 사업으로 계획한 소년조선일보는 그동안 만단 준비를 마치고 금일로부터 그 씩씩한 얼굴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소년조선>, 구독자에게 부록으로 지급

<소년조선일보>란 제호가 처음으로 쓰인 때는 1936년 1월 13일이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자사에서 낸 <조선일보 80년사>란 책에서 <소년조선일보> 창간 일을 37년 1월 10일로 잡고 있다.

이 때 비로소 별지 형태로 신문을 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본지에 붙어있던 내용이 따로 떨어져 나와 타블로이드판 4면으로 간행된 것이다. 이 신문은 매주 일요일자로 일주일에 한 번씩 발행됐다. 지금처럼 학교에서 일괄 구독한 방식이 아니라 <조선일보> 구독자에게 부록형태로 지급했다.

이렇게 나오던 신문은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 폐간에 따라 막을 내렸다가 1955년에 부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일보 80년사>란 책에서 주 독자층은 특별히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주로 현재의 초등학생들인 당시 소학교 학생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 윤근혁 기자
67년이 흐른 지금도 <조선일보>는 <소년조선일보>에 대한 이 같은 소개를 하고 있다. 인터넷 사이트의 자사 홍보화면에서 "소년조선일보는 일제하의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탄생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

물론 이 같은 말은 오늘날 <소년조선>을 구독시키는 전국 대부분의 학교에서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말 잔치는 허망한 거짓구호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소년조선> 지면은 증언한다

40년 8월, 폐간 때까지 4년여 동안 발행된 <소년조선일보>. 이 신문의 지면은 조선일보가 생각하는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다.

1939년 11월 26일치 2면 머릿기사의 제목은 '전 조선학생 어린이의 정성으로 된 황국신민서사 주'라고 적혀 있다.

▲ 1939년 11월 26일치 2면 머릿기사의 제목은 “전 조선학생 어린이의 정성으로 된 황국신민서사 주”라고 적혀 있다.
ⓒ 언론재단DB
"송림이 우거진 서울 남산에 전 조선 학생어린이들의 정성을 다하여 쓴 황국신민서사 백사십일만 오천장을 간직한 황국신민서사 주의 제막식은 지난 이십사일 오전 열시부터 서사 주를 건설한 그 자리에서 열리었습니다."

전국 소학교 학생 등 141만5천명의 학생이 황국신민서사를 적어 탑을 만들어놓은 사실을 전하는 내용이다. 이 당시 학생들이 써넣은 황국신민서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1.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臣民)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이 기사는 다음처럼 이어진다.

"어린이 대표들의 귀여운 손으로 막이 열리자 전 조선학생 어린이들의 근로하여 모은 돈 십만원을 가지고 …당당하고도 웅장한 자태가 아침햇볕을 받아 우뚝 솟아났습니다."

이 기사는 황국의 신하가 되겠다는 서약을 한 학생들과 탑의 모습을 '귀여운 손', '웅장한 자태'라고 묘사해 이채롭다. 이런 정성스런 글 솜씨는 곧 일본 왕실에 대한 왕실역사교육으로 이어진다.

<소년조선>은 왕실역사를 담은 충견이었다

1940년 1월 7일치 '황기 2060년에 전국적으로 기념행사'란 제목의 기사는 일본 왕실에 대한 남다른 <조선일보>의 교육의지를 엿보이게 한다.

▲ 40년 4월 14일치 기사 '황태자 전하 어입학'.
ⓒ 언론재단DB
이 2면 머릿기사는 "금년은 제 일대이신 신무천황께옵서 왕위에 오르옵신 지 이천육백년이 되는 해"라면서 일본판 건국신화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맺고 있다. 글쓴이의 왕실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실린 대목이다.

"지나 사변 제 4년을 맞이하여 동아의 신질서를 건설하려는 이때, 금년이야말로 가장 의미 깊은 새해라고 하겠습니다."

왕실에 대한 충성심과 경외감 고취교육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소년조선> 39년 10월 29일치에서는 명치천황을 추모한다는 '명치절'에 대해 설명하고, 다음 해 2월엔 '기원절'이란 기념일을 가르치고 나서기도 했다. 이는 모두 일본의 명절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왕실의 일거수 일투족이 이 <소년조선>에 모조리 보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왕실에서 황후가 군인을 만나 위로한 사실이나 애를 낳은 내용,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킨 내용들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다음은 40년 4월 14일치 기사 '황태자 전하 어입학'.

"일억 국민이 높이 모시는 황태자 전하께서는 반갑게도 지난 8일에 학습원 초등과에 어입학을 하셨습니다. 천황폐하, 황후폐하께옵서는 얼마나 반가와 하옵실지 일반국민도 황공하옵게 삼가 경축해 마지않는 터입니다."

▲ 38년 6월 26일치 1면 전면을 장식한 내용.
우리나라 국화는 국화, 국어는 히라가나

왕실에 대한 충성고취 내용은 다방면에 걸쳐 기량을 선보인다. 이 신문 38년 6월 26일치 1면 전면을 장식한 내용은 '나라마다 다른 국화이야기'였다. '아국의 국화는 국화꽃'이라는 내용이다. 일본의 국화(國花)인 국화(菊花)가 우리나라 국화라는 사실을 머리 속에 넣어주기 위해 전체 면을 떼어내 보도한 것이다.

현재 <소년조선> 등 소년신문 지면의 1/4 가량은 학습문제풀이가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70여 년 전 <소년조선>에도 학습문제가 있었다. 이름하여 '학습 페-지(학습페이지)'란. 39년 3월 5일치 국어과목 학습문제 내용은 놀랄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인 교사로 보이는 전아무개 선생이 낸 문제 내용을 살펴보자. 이 문제는 '국어연구'란 영역이었지만 일본어로 되어 있었다.

제 24과 “육탄 3용사”
-육탄 3용사는 어떤 각오를 가지고 폭약 통을 가슴에 품고 일어섰을까요?
-육탄 3용사는 어떤 의무를 지고 사지에 뛰어 들었을까요?

제 26과 “조선통치”
-어떤 취지에 기초하여 일한양국은 합병을 했을까요?
-제국정부는 일한병합 후 통치에 있어서 어떤 방침을 세웠나요?
-역대 총독의 조선통치의 치적은 불과 20여 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그 실제 예를 들어보세요.
-특히 최근 전 반도에 걸쳐 나타난 기뻐해야 할 현상은 무엇일까요?


▲ 39년 3월 5일치 국어과목 학습문제 내용.
ⓒ 언론재단DB
자! 이제 처음의 물음에 대한 답을 할 때다.

<소년조선일보>의 탄생은 이 땅의 어린 영혼들에게 희망이었을까, 절망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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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교육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살아움직이며실천하는진짜기자'가 꿈입니다. 제보는 bul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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