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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식 도쿄케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는 "국보법은 하루라도 빨리 철폐돼야 한다"며 "재일 조선인들을 폭력적으로 갈라놓은 게 국보법"이라고 강조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나에게 있어서 국가보안법은 이 법 때문에 장기간 복역했던 내 형님(서승, 서준식)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국보법은 하루라도 빨리 철폐돼야 한다. 재일 조선인들을 폭력적으로 갈라놓은 게 국보법이다. 이 법으로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 구금, 고문에 시달렸다. 재일 조선인들은 교류를 통해 조국의 역사문화를 알고싶지만, 국보법의 그물 때문에 스스로 검열하는 모습이 벌어지고 있다."

서경식 도쿄게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는 재일 조선인이다. 서경식 교수는 간첩단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다 고문의 잔혹함을 고발하기 위해 난로를 끌어안았던 서승 선생과 인권운동가 서준식씨의 동생이기도 하다. 서경식 교수는 일제시대 일본에서 나고 자라 한국말이 서툴다. 그래서 본인 스스로 '언어의 감옥'에 갇혔다고 말한다.

일본사회에서 재일 조선인의 신분으로 사는 서경식 교수는 최근 그 삶을 담은 책(<소년의 눈물> 돌베개 간)을 펴내 재일교포로는 처음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다.

서 교수는 지난 16일 <오마이뉴스>와 만나 "한국 독자들이 '디아스포라(diaspora 팔레스타인 외역에 살면서 유대적 종교규범과 생활관습을 유지하던 유대인 혹은 그들이 살던 지역)' 존재들에 대해 동정하거나 연민의 정을 느끼기보다 그들의 사고방식, 관점의 문제를 함께 가졌으면 좋겠다"며 "이것은 우리 나라의 평화, 또 동북아 평화를 위해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서 교수는 이날 가진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 개폐논란을 비롯해 재일 조선인들의 참정권 문제, 과거사 청산문제와 일본의 반성, 디아스포라로서의 삶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다음은 서경식 교수와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서경식 교수는 누구?

서경식 교수는 국내에서 서승, 서준식 형제의 동생으로도 이름이 높다.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1974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소년의 눈물>로 1995년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고,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으로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그 외에 <나의 서양 미술 순례> <분단을 살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청춘의 사신> 등을 출판했으며, 현재 도쿄케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서경식 교수는 전작 <나의 서양 미술 순례>에서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슬픈 가족사와 미술작품과 완벽하게 조화시켜 독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번에 새로 낸 <소년의 눈물>도 서 교수 문체의 독특한 매력이 잘 드러나 있다.
- 최근 한국사회에서는 국보법 개폐논쟁이 한창이다. 일본에서도 이 논쟁을 접했을텐데.
"나에게 있어서 국가보안법은 이 법 때문에 장기간 복역했던 내 형님(서승, 서준식)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보법은 하루라도 빨리 철폐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이 법의 폐지가 공론화 된 것에 감사를 느낀다.

- 재일 조선인 사회도 국보법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들었다.
"나는 재일 조선인의 입장에서 국보법 철폐문제를 말하겠다. 재일 조선인은 일제 식민지배 결과 일본사회에 남게 된 조선인이다. 해방 후 일본정부는, 1952년 재일 조선인의 일본국적을 부정했다. 그래서 재일 조선인들은 무국적자로 일본사회에 남게 됐다. 또, 재일 조선인들이 소속돼야 할 한반도는 분단에 직면하게 됐다.

한반도는 남북으로 잘려 있지만, 재일 조선인들은 남북으로 갈릴 이유가 없었다. 재일 조선인들은 남북으로 갈리지 않은 '하나의 집단'으로 일본사회에 남게 됐다. 그 일본사회에서 집단으로 존재하는 재일 조선인들을 폭력적으로 갈라놓은 게 국가보안법이다.

재일 조선인들은 한 가족 안에서도 아버지는 조총련 소속인데, 아들은 거류민단 소속인 경우, 또 가족 중 어떤 이는 북한에 가고, 또 어떤 사람은 한국에 가는, 아주 미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가족들 중 한 사람이 한국을 방문할 경우, 너의 아버지는 조총련 소속이거나, 북한에 갔다고 해서 한국경찰에 끌려가는 일이 벌어졌다.

국가보안법은 분단시대의 산물이다. 국가보안법은 한국사람들에게나 재일 조선인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던 법이다."

- 재일 조선인들이 국가보안법으로 당한 피해는 주로 어떤 것들인가.
"1965년 한일협정 조인으로 인해 나는 한국국적을 취득했다. 자유롭게 이주하고 유학도 가능해졌다. 그런 상태에서 두 형님이 국가보안법으로 체포되고 고문당하는 현실이 벌어졌다. 재일 유학생이 국가보안법으로 체포돼 옥고 치른 사람이 100여명이다. 1970년대 이후 정치범으로 몰린 유학생들이 100여명이다. 대학 선후배들, 조총련계로부터 무슨 지령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진짜 많았다.

지금 내가 100여명이라도 얘기한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눈에 보이는 일에 불과하고, 보이지 않은 사건을 치면 더 많았을 것이다."

- 대표적인 악용사례가 있다면.
"재일 조선인들은 일본사회의 민족차별정책으로 우리 민족교육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재일 조선인들은 조국과의 교류를 통해 조국의 역사문화를 알고싶어하는 데도 국가보안법의 그물 때문에 스스로 자기 검열하는 모습이 벌어지고 있다.

서승 형님의 경우, 초기 유학생이었다. 서승 형님은 한국에 간 뒤 간첩단사건에 걸려 국보법으로 고초를 겪었다. 본국에서 민족교육을 받고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하고 싶었는데 옥고를 치른 것이다. 유학생들이 조국과의 교류를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지만, 나도 서승 형님과 같은 일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서승 형님 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알고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겠지만, 국보법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재일 조선인들은 본국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형성하는 데 큰 보탬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국보법은 남북분단의 장벽이자 남한사회를 보수와 진보로 가르는 장벽, 국내와 해외 동포들을 분단시키는 장벽으로 작용했다."

"일본이 역사적 책임을 부인하는 마당에 그 일원이 될 수는 없다"

▲ 일본에서 NPO전야의 이사로도 활동중인 서경식 교수는 "재외 동포들의 참정권 문제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 한국전쟁 중에 태어나 분단 속에서 성장했다. 일본에 살면서 이런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나.
"당연히, 나도 혼란스러운 나라를 못 본 체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니다. 옥중에 계셨던 두 형님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못했던 것은 재일 조선인들에게 일본은 좋은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재일 조선인으로서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안락한 사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 일본사회에 대해 가장 크게 느낀 문제점은 무엇인가.
"해방 뒤, 일본이 과거의 식민지배를 평가하고 책임지는 사회였다면 긍정적으로 일본사회에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일본사회가 역사적 책임을 부정하는 마당에 그 나라의 일원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두 번째는 내면적인 이유가 있다. 열 다섯의 나이에, 1966년 나는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그때 경험이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재일교포 하계휴가학교였는데, 주로 반공교육과 우리말교육을 하는 '섬머프로그램'이었다. 이때 처음 받은 인상은 한국사회의 경제적 비참함이었다.

일본에서 넉넉하게 산 편은 아니었지만, 껌 파는 아이들과 구두 닦는 아이들을 보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내가 만일 인도나 에티오피아처럼 여행자의 마음으로 조국을 방문했더라면 크게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돈 좀 주세요!' 하는 소년은 나 자신이나 마찬가지였다.

해방 뒤 사촌 할아버지가 귀국해 어렵게 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일본에 남아 한국으로 귀향한 친척들의 생활비를 보탰다. 아버지가 그들처럼 귀향했다면 나도 그 소년들과 똑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 북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졌나.
"당시 나는 반공교육의 일환으로 전방에 갔었다. 망원경을 통해 북한군을 바라보았고, 그때 우리들은 이 북한군이 언제 남한을 칠 지 모른다는 '교육 아닌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북한 쪽에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살고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와 함께 일본에 살던 동포들이 저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으로 간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받는 차별을 피하기 위해서 북송선을 탔다. 그들은 조만간 남북통일이 되어 곧 만난다는 기대를 가지고 북으로 갔던 것이다. 북으로 간 사람들이 분단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만일, 나의 아버지가 반공주의자가 아니었다면 나도 북한에 갔을 지 모른다. 또, 경제적으로 가난했다면 북으로 갔을 지 모른다. 내가 원하는 민족통일은 선진조국의 건설을 바라는 게 아니다. 식민지 시대이래 분열된 자신의 여러 모습들을 통일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민족통일은 각기 떨어져 있는 자신의 분신을 자유롭게 만나고, 교류하는 과정 속에서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은 북한, 중국 등 전세계에 퍼져있는 우리 민족들이 서로 만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해외동포법도 마찬가지다. 조선적을 가지고 있는 10만 명의 해외동포들은 이 법의 대상자가 아니다. 이 법의 목적은 재미동포들의 투자를 촉진하는 데 있다고 들었다. 이 법은 남북대립 상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세력만을 강화시킬 뿐이다."

"재일동포들은 한국, 일본, 북한 모두에서 단 한번도 투표해본 일이 없다"

- 현재 해외동포들은 선거권이 없다. 따라서 참정권이 금지돼 있다고 봐야 하는데,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
"놀라운 일이겠지만, 재일 동포들은 한국, 일본, 북한 모두에 단 한번도 투표해본 일이 없다. 우리는 투표권이 없다. 본국에 대한 투표권과 일본 정치에 대한 참정권 문제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우선, 국내문제를 먼저 말하겠다. 대통령선거와 국민투표의 경우에는 반드시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정부가 어떤 정부냐는 재외동포들에게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과 일본정부가 한일협정을 체결하면서 과거사에 대해 애매하게 넘어갔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당시 상황과 지금의 정치의식은 굉장히 다르다. 지금의 정치의식은 매우 성장해 있다. 당시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게 재일 동포들의 참정권문제를 지적하지 않은 것은 문제다."

- 재일동포들은 국내선거에 관심없다는 주장이 있다.
"국내에서는 재일 동포들이 이기적이다, 정치의식이 없다, 무관심하다고 비판하겠지만, 그것도 이유가 있다. 정치행위를 해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한일협정 체결당시 일본사회도 매우 시끄러웠다. 그때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인들과 똑같이 평등선거를 치렀다면 우리는 그 협정에 반대했을 것이다. 한일협정은 결코 재일 조선인에게 유리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 일본에서는 어떤가.
"일본의 경우, 일본국적을 가진 사람만 투표권을 준다. 헌법상으로는 국적에 상관없이 투표할 수 있다. 주민세를 지불하는 사람은 투표권은 준다는 규정이 있다. 물론 나는 주민세를 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투표권이 없다.

오사카의 이쿠노구의 경우에는 재일조선인이 1/4이다. 이들이 이 지역 주민세의 1/4을 내고 있다. 그러나 일본 지방자치법에 따라 투표할 수 없었다. 최근 이런 기묘한 상황을 인식한 사람들이 외국인 중 주민세를 지불하는 사람들에게 참정권을 달라고 요구하는 운동이 진행중이다.

그런데, 일본의 보수언론은 이 움직임을 반대하고 있다. 보수언론들은 투표하고 싶으면 일본국적으로 귀화하라는 식으로 나온다. 과거 식민지배와 관련해 역사적 청산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더러 귀화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굴복이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국적 있는 사람들에게만 참정권을 주는 것은 '국민주의'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한국정부도 한국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보호한다. 한국정부의 '국민주의'도 일본의 '국민주의' 흐름을 강화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재일 동포인 정태균 코마자와대학 교수는 일본 보수언론이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주장을 하고 있다. 재일 조선인들에게 주민자치권을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다닌다. 정태균 교수는 한국말도 못하고, 한국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왜 일본인이 되지 않느냐, 왜 참정권을 주장하느냐고 말하고 있다.

정태균 교수의 말은 일본 우익들이 좋아하는 발언이다. 더군다나 일본사회에 살고 있는 소수자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더욱 좋아한다. 그러나 재일 조선인의 입장에서 이 말은 매우 힘 빠지는 발언이다."

"진상규명 없이 화해와 용서를 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서경식 교수는 이날 인터뷰에서 새 책 <소년의 눈물>에 대해 얘기하면서 "디아스포라를 동정하기보다그들의 사고방식, 관점의 문제를 함께 가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 현재 과거사 청산 논의가 진행중이다. 이 논의의 방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화해'라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는 것에 반대한다. 도서출판 삼인에서 나온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의 공동저자 다카하시 테츠야 선생에 대해 말하겠다. 다카하시 선생은 화해, 진상규명, 용서 이 세 가지에 대해 말했다. 진상규명 없이 화해와 용서를 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사회의 경우, 화해와 용서라는 단어가 진상규명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진상규명은 진정한 화해와 용서를 찾기 위한 기본인데도 마치 진상규명이 용서와 화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인 양 인식되고 있다.

원리적으로 보면, 죄가 있어서 용서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죄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 재일 조선인의 쓰라린 경험에서 비춰보자면 식민지배가 있었는지, 누가 식민지배를 했는지, 누군지 알아야 죄를 물을 수 있고, 용서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왜 식민지배를 했는지도 모르는 데 어떻게 용서와 화해를 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화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그 이유는 철저하게 해결하지 못한 애매한 역사가 이어져왔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자꾸 화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왜 일어났는지, 그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도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조사하거나 사과를 받지 못했다.

피해자도 가해자에 대해 용서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진상규명, 진실을 밝혀내는 게 필요하다. 가능한 한 섬세하게 조사하고 진상규명의 노력을 하지 않는 한 다음 시대로 넘어갈 수 없다. 과거사 청산은 애매한 화해를 위한 게 아니다."

- <나의 서양미술순례기>는 한국독자들에게 널리 읽힌 책이다. 이 책에 이어 <소년의 눈물>이라는 새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을 쓰게 된 배경과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까지 인터뷰한 내용들의 배경과 설명이 이 작품 속에 들어있다. 1960년대는 일본이나 조국이나 민족의 분기점이었다. 분기점을 사춘기로 보내면서 일본사회의 두터운 장벽에 고립됐고, 나는 조국과 조국의 일에 대해 생각하면서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이 책의 특징은 소수인 재일 조선인이 다수인 일본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데 강조점을 두었다."

- 한국독자들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
"간절히 바라는 것은 한국독자들이 '디아스포라' 존재들에 대해 동정하거나 연민의 정을 느끼기보다 그들의 사고방식, 관점의 문제를 함께 고민했으면 한다. 그것은 우리 나라의 평화, 또 동북아 평화를 위해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이탈리아계의 유태인 작가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다.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그는 이스라엘을 강력히 비판했었다. 당시 프리모 레비는 유대민족의 역사 중에 있는 '디아스포라'적 전통을 상실하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되어 레바논을 침공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나는 정체성이라는 말도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을 국가와 연결시키면서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자기의 식구가 누구냐, 이웃이 누구냐, 이런 것을 되풀이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갖지 않으면 우리 같은 '디아스포라'는 하루도 못 살 것이다.

유태인은 유럽에서 넓은 시야와 관용의 정신을 갖고 살고 있다. 우리도 국가를 통해서만 여러 세상을 보는 것을 넘어야 한다. 프리모 레비는 아니지만 한국의 동포들도 재일 조선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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