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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조사관
친일청산 문제를 놓고 여야가 정면대치 하고 있는 가운데 1948년 제헌국회 당시 반민특위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한 정철용(79)씨의 '회고록'을 단독입수,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할 예정입니다.

정씨의 회고록에는 반민특위에 몸담게 된 계기, 친일문인 이광수 등 반민 피의자 체포 경위, 현 정치권에 보내는 고언 등이 담겨 있습니다. 반민특위 관계자들이 거의 작고한 상황에서 정씨의 '기억들'은 귀중한 사료가 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친일문인 춘원 이광수와 청주 군수공장 사장 김아무개씨 체포, 연행에 이어 내게 세번째로 임무가 다시 주어졌다. 때는 1949년 3월 15일경으로 기억된다.

특별검찰부 차장으로 있던 노일환 검사는 내게 국방부 내 친일군인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특히 친일군인들의 명단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앞서의 업무와는 달리 체포, 수색이 아닌 정보수집 및 조사 업무였다. 당시 군부에는 일본군 장교는 물론 일제 때 경찰을 하다가 군대로 숨어든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 전봉덕 전 헌병부사령관
ⓒ 연합뉴스
나는 특경대원 2명을 대동하고 남산에 있는 헌병사령부로 향했다. 정문 경비초소에서 국방부 출입증을 제시하고 전봉덕 부사령관 면회를 요청했다. 당시 사령관은 광복군 출신의 장흥 대령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요업무는 전봉덕 부사령관(중령)이 처리한다고 들었다. 말하자면 '실세'였던 셈이다.

잠시후 초소로부터 연락을 받고 장교 한 사람이 나와 우리를 부사령관실로 안내하였다. 그는 초면인데도 친절히 우리를 영접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부사령관 집무실로 들어선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우선 초등학교 교실만큼 넓은데다 모든 비품들이 으리으리할 정도로 고급품이었다. 소파, 의자, 책상 모두가 일반사회에서 볼 수 없는 호화스러운 물품들이었다. 그에 비하면 반민특위 요원들이 사용하는 비품들은 너무도 초라했다.

전 부사령관의 요청으로 특경대원들을 가까운 별실에 대기시키고, 나와 단 둘이 마주 앉앗다. 처음엔 서로 마주보기만 할 뿐 쉽게 말문을 열지 않았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 때 부사령관이 초인종을 누르자 순식간에 많은 장교들이 방 안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순간 위압감을 느꼈다. 또 혹시 무슨 행패나 부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스쳐갔다.

전 부사령관은 장교 한 사람 한 사람을 나에게 소개하고는 인사를 시켰다. 그들은 군대식으로 관등성명을 대고는 내게 거수경례를 했다. 그들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나는 순간 긴장했으며, 또 한편으론 쑥스럽기도 했다. 능수능란한 전 부사령관의 처세술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었다.

전 부사령관은 연륜, 학식, 경험 모든 것이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러나 나는 반민족 행위자를 조사, 체포하는 반민특위 요원이라는 자긍심에다 사명감, 그리고 뱃심을 토대로 나보다 기득권 세력이었던 그를 당당히 맞서 상대하였다.

나는 그들 앞에서 군부의 모든 장교는 친일행위자임을 강조했다. 일제하 자진해서 일본 사관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거나 또 일본 천황이 임명한 장교들이었다면 그들은 마땅히 친일행위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일제하 조선청년들이 일본군에 입대한 부류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지원병. 일제는 조선 청년들의 관심과 환심을 끌기 위해 감언이설로 일본군 입대를 권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생활고 해결을 위해 입대한 자도 없지 않았다. 일제는 입대자들의 공적을 조작해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지원을 권유하기도 했다.

둘째, 학도병. 원명은 '학도특별지원병'으로, 겉으로는 '지원'이었지만 사실상 강제징집이었다. 대상은 전문학교, 대학 재학생들로 이들을 강제 입대시켜 일본군 장교로 양성하거나 또는 군수공장에서 일을 시켰다. 중국내 일본군에 징집됐던 학도병 가운데 일부는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였다. 장준하, 김준엽 등이 그들이다.

셋째, 자원입대자. 이들은 자원하여 만주 군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 등에서 일본군 교육을 받고 장교로 임관된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들 수 있다. 그는 문경보통학교 훈도(교사)로 재직 중 군인이 되기 위해 교사직을 내팽개치고 만주로 건너가 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졸업한 후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

넷째, 징병제도. 만 20세가 되면 무조건 입대해야 했다. 이른바 강제징집이다. 중국 대륙을 점령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지금의 월남, 미얀마, 필리핀, 인도차이나 등 동남아 각국을 차례로 침략했다.

후방에서는 매일 일장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승리를 축하했다. 전쟁이 계속되고 싸움터가 넓어지자 병력, 군수물자 부족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일제는 징병제를 실시, 조선청년들을 강제로 전쟁터로 끌어갔으며, 부족한 군수물자를 채우기 위해 놋그릇 등 쇠붙이 공출은 물론 심지어 소나무 뿌리까지 캐도록 했다.

▲ 특별재판소에서 반민 피의자를 재판하는 모습.

나는 전 부사령관에게 친일장교들의 명단 제출을 요구했다. 특히 이들이 해방 조국에서 스스로 자숙 내지 근신은커녕 약삭빠르게 미 군정에 붙어 일신의 영달을 꾀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일본군인 정신으로 무장된 자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충성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고 역설했다.

일제 침략전쟁을 주도한 군국주의자들은 패전 후 연합국 주도의 '도쿄 전범재판'에 회부돼 여럿 처형당하였으며, 또 감옥살이를 하였다. 전범 가운데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자결하기도 했다. 그런데 해방후 우리 군인들 가운데 '양심선언'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한심한 노릇이었다. 나는 그들 앞에서 이런 점을 강하게 추궁했다.

나는 또 전 부사령관의 전력을 거론했다.

"당신은 재주가 있어 일제하 출세의 관문이자 모두가 부러워하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수재로서 일본 경찰의 최고위직인 경시까지 승진하여 일제에 충성했다. 해방 후에는 경찰 간부(경기도 보안과장)로 일하다 군에 들어와 요직 중의 요직인 헌병 부사령관에 발탁되었고, 일제때 악명높은 친일경찰들을 군으로 마구 편입시켜 도피처로 제공하고 있으니 양심있는 지식인의 행동인가..."

순간 나는 몹시 흥분되어 있었다. 나는 겨우 흥분을 자제한 후 필요한 명단을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전 부사령관은 자신의 신상문제까지 언급되자 잠시 묵묵부답이었다. 당번인 듯한 한 군인이 차를 가져왔다. 향기가 좋은 고급 차인 듯하다. 잠시 후 그가 말을 꺼냈다.

"정 조사관의 말씀은 모두가 지당합니다. 우리 군인들이라고 해서 애국심이 없겠습니까. 유사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야 할 우리 군인들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실정을 잘 알고 계시지요. 친일행위자 처벌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습니다. 나라가 있어야 특위도 있고 군인도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린 공산당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 당시 우리사회는 무질서, 불법, 살인, 폭동 등 매일 매일이 전쟁이었다. 사회의 혼란뿐 아니라 식량 구하기도 어려웠고, 미군정의 원조로 겨우 연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일선 경찰은 직접 공산당과 싸우고, 체포하고, 조사하고, 군인은 군인대로 이북 공산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공산당을 잡는데 아주 유능한(사찰, 정보, 수사에 경험이 풍부한) 경찰을 특위에서 마구 잡아가니 경찰력이 마비상태인데 군부까지 손을 대면 이 나라가 온전하겠는지 묻고자 합니다. 우선 공산당과 싸워 이기고, 다음에 조사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의 물음에 오히려 내가 설득당하는 느낌이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정권은 장악했으나 국내에 지지기반이 약하고 후원단체가 없었다. 이 대통령은 일제에서 미군정을 거쳐 이어받은 공무원, 경찰, 검찰, 법관만이 믿을 수 있는 정권지지 기반이었고 이들의 협조 없이는 정권을 지탱할 힘이 없었다. 특히 일선 경찰은 이 대통령이 지극히 아끼고 비호하는 집단이었다.

그런데 당시 경찰 대부분은 일제하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들을 체포, 고문하거나 밀정노릇을 하였다. 특위는 바로 그런 친일경찰들을 법에 따라 잡아들이고 있었다. 경찰과 특위, 정부와 국회와의 갈등, 대립 속에서 특위의 업무가 제대로 이루어질지 매우 걱정스러웠다. 특히 이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특위에 불만을 표시하며 특위의 입지를 위축시켰다.

나는 전 부사령관에게 친일군인 명단을 반드시 준비하라고 얘기하고 돌아가려는데 연락장교가 와서 그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 갔다.

“정 조사관님, 각하께서 만나자고 하시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한다. 나는 “대통령께서 오십니까?”하니 “아닙니다. 채병덕 대령이십니다.” 당시는 장군이 아니더라도 총사령관이나 사단장급 이상 장교에게 '각하'라는 존칭을 사용했다.

▲ 채병덕 총사령관
잠시 후 주위가 시끌시끌하더니 마치 눈사람같이 똘똘 뭉친 거구의 채병덕 총장이 들어왔다. 그는 전 부사령관의 소개로 나에게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수고하십네다. 잘 부탁합네다. 모든 것 부사령관과 잘 이야기하시라요. 잘 될 것 이외다.” 이북 사투리인 듯 했다.

악수를 하면서 나는 채병덕 장군을 다시 보았다. 그의 손이 어찌나 큰지 마치 야구장갑을 잡은 듯 했다. 짚차를 타면 그의 몸무게 때문에 타이어가 반 이상 쭈그러진다고 한다. 정말 거구였다. 내가 말 할 여유도 주지 않고 그들은 별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나는 그들과 작별하고 발길을 돌렸다.

마음이 착잡하고 답답하였다. 나는 조용한 곳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머리를 좀 식하고자 특경대원들에게 먼저 특위로 들어가라 하고는 곧바로 덕수궁으로 발길을 옮겼다. 조용히 생각 좀 하고 복잡한 생각을 정리를 하고자 했다. 현 시국과 특위 업무에 대한 군부의 입장, 정부의 방침, 경찰의 임무, 국회의 현실 등등. 쉽게 결론을 얻을 수가 없었다. 짧은 해는 저물고 어느새 추위마저 느껴졌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노일환 검찰관이 나를 호출했다. 그는 아무 보고도 없이 특경대만 돌려보내고 혼자서 어디 가서 무엇을 했는지 해명을 하라며 나를 강하게 질책했다. 심지어 내가 친일군인들을 옹호하는 행위를 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듯도 했다.

공무수행 차 출장을 나간 내가 업무가 끝난 뒤 제대로 보고를 하지 않은 것이 큰 실수였다. 나를 추천한 박우경 의원도 나를 점잖게 나무랐다. 나는 참으로 유구무언이었다.

그 때 나를 위로하고 용기를 준 사람이 서상열, 이원용 조사관이었다. 우리는 제2조사부에서 같이 일을 했었고 서로 마음을 통하여 친밀하게 지냈다. 그러나 특위 해산 후 서로 소식을 모르고 지냈다. 지금은 그들 모두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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