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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자! 학교는 신문지국, 교사는 신문배달부.”
소년신문 학교 안 집단 구독을 놓고 터진 몇몇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외침이었다. 2002년 교원단체와 학부모단체들이 소년신문 강제구독 거부운동을 펼쳤지만 폐습은 여전한 상태다. 언론권력이 ‘코흘리개 초등학생’들의 전당인 학교 안에까지 뻗쳐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서울교육청 새 교육감 취임 직후 학교장 명의의 ‘가정통신문’이 일제히 발송되는 등 문제가 점점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소년신문 학교 안 강제 구독의 폐해를 네 차례에 걸쳐 싣는다. 이 글은 그 첫번째 기사다. - 필자 주


▲ 초등학교 교장들이 소년신문 업체를 대신 해 보낸 구독 종용 가정통신문.
ⓒ 윤근혁
“1학년 어린이들도 아침자습 시간과 학급 학습활동에 신문을 이용한 교육을 하고자 합니다.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가급적이면 구독할 수 있도록 학부모님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랍니다.”

서울 ㅇ초등학교에 ‘코흘리개’ 1학년 자녀를 보낸 학부모들은 개학 다음 날인 지난 27일 이 같은 내용의 가정통신문을 일제히 받았다. 보낸 이는 이 학교 교장이었고 구독신문은 <소년조선일보>라고 적혀 있었다. 현재 전국 상당수의 초등학교는 <소년조선일보>를 비롯 <어린이동아>, <소년한국일보> 등 3개 소년신문을 집단 구독시키고 있는 상태다.

자녀가 갖고 온 통신문을 받아 든 학부모들은 좌불안석에 빠졌다. 갓 한글을 터득했을 뿐인 1학년 자녀가 6학년 학생들과 같은 신문을 봐도 교육이 될 수 있는 것인지, 꼭 <소년조선일보>만 학교에서 집단으로 봐야 하는 것인지가 문제였다.

학부모들 울며 겨자 먹기식 구독 승낙

하지만 해당 학교 교장 명의로 쓰여진 ‘아침자습에 활용할 것이니 가급적 구독하라’는 엄포성(?) 글귀를 본 대다수의 학부모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소년신문을 구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장들이 소년신문 구독을 사실상 강요하는 이 같은 통신문을 보낸 곳은 이 학교뿐만이 아니다. 31일 밝혀진 곳만 서울 ㅂ초, ㅎ초, ㄱ초, ㅅ초, ㄷ초, ㅁ초, ㅈ초 등 20여 군데가 넘는다. 서울지역은 물론 경기, 인천 지역 등 전국의 적지 않은 초등학교가 비슷한 통신문을 아이 손에 들려보낸 것으로 드러났다.

전교조 서울지부(지부장 유승준)가 이날 밝힌 자료에 따르면 ㄱ초, o초, ㅎ초는 ‘아침자습 등 교과학습에 활용하겠다’는 글귀까지 적었다. 서울시교육청은 올해 5월, ▲소년신문 아침자습 강제 활용 금지 ▲소년신문 구독 관련 대가성 기금 수수 금지를 뼈대로 한 단체협약을 맺은 바 있다.

김민석 전교조 서울 초등위원장은 “비교육적인 신문 내용과 특정상품 불법 강매라는 비판을 받아온 소년신문을 업체를 대신해 초등학교 교장들이 구독을 강요하거나 종용하고 나섰으니 큰 일”이라고 혀를 찼다. 그는 “단체협약이 체결됐지만 보수적인 새 교육감이 취임한 이후 대부분의 학교가 소년신문 구독 대가로 돈을 받는가하면 아침자습 활용도 여전하다”고 말했다.

서울만 신문 구독 대가로 기부금 32억원 받아

▲ "학교는 신문지국, 교사는 신문배달부"
ⓒ 기진호
실제로 현재 소년신문을 집단 구독하는 학교가 서울지역에서만 전체 초등학교 554개의 85%에 해당하는 470여 개나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소년신문 구독 대가로 업체를 통해 학교가 받은 돈 또한 지난 해 3월부터 올해 4월까지 모두 31억9984만7천원이나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같은 사실은 이건 서울시 교육위원이 서울시교육청을 통해 조사해 최근 밝힌 내용에서 드러났다. 이 내용에 따르면 서울에서만 전체 초등학생의 54%인 38만4903명의 학생이 학교에서 소년신문을 집단 구독하고 있다.

학교장이 소년신문 구독 '협조' 통신문을 보내고 일부 교사들이 아침자습에 활용해 소년신문 구독자를 늘리는 대신, 소년신문사는 학교에 수십억원의 기부금을 건넨 셈이다.

소년신문 기부금을 지급, 관리하는 서울어린이후원회 관계자는 “소년신문 한부 구독료 3500원 가운데 700원 정도를 학교에 돌려주고 있다”면서 “이는 학교 교사들이 배달을 대신 해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와 일선 초등학교에 따르면 단체협약 체결내용과 달리, 5월부터 현재까지도 기부금은 그대로 학교로 들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교육청 소년신문 담당 류아무개 장학사는 31일 전화통화에서 “일부 학교장이 학부모에게 가정통신문을 보내 물의가 생긴 관계로 각 학교에 오늘자로 시정 공문을 보낼 예정”이라면서도 “소년신문만 갖고 아침자습을 하는 것은 문제지만 소년신문도 아침자습으로 활용할 수는 있다”고 애매하게 답했다. 그는 또 “소년신문사 쪽에서 각 학교에 주는 돈이 대가성이 있는 것인지는 학교에서 판단할 문제”라고 말해 단체협약 내용에서 한발 빼는 모습을 보였다.

“기부금 받으며 구독 강요, 죄 짓는 일”

이에 대해 이건 서울시교육위원은 “초등학교에서 담임 교사가 아침자습을 위해 신문을 교실로 배달해주는 상황에서 신문을 보지 않는 아이는 ‘왕따’ 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고 말했다.

또 박경양 참교육학부모회 회장은 “광고성 기사와 문제풀이로 가득 찬 소년신문을 학교가 기부금을 받으며 구독시키는 자체가 비교육적”이라면서 “서울시 교육청은 단위학교에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관리감독 기관으로써 해결방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년신문 사업에서 손을 떼십시오”
[기사후기] 교장선생님과 교육청에게 보내는 서신

몇 달 전 <고래가 그랬어>란 어린이 잡지사 대표 김규항씨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소년신문에 얽힌 자신의 추억을 다음처럼 털어놓더군요.

“몇 해 전까지 줄곧 소년신문 후원금을 냈어요. 낙도 어린이들이 이 신문을 공짜로 볼 수 있다고 하는 바람에 기부금을 냈지요.”

그러던 그가 후원금 내는 일을 멈췄다고 했습니다. 그의 기부금 중단 사유는 다음과 같았죠.

“소년신문이 그저 좋은 것인 줄만 알았는데 내용을 훑어보니 아이들이 봐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른들의 잘못된 생각들이 기사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들어가 있었어요.”

물신풍조, 컴퓨터 오락, 문제풀이, 정치에 대한 편협한 생각 따위를 부추기는 내용이 버젓이 들어가 있더랍니다. 그는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고 말했습니다.

소년신문 내용 나아졌습니까?

사실, 소년신문의 질적 발전을 가로막은 곳이 바로 학교인 셈이지요. 학교의 일괄구매 방식은 독과점 신문시장을 만들어 놨습니다. 신문사가 아이들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와 같은 소비자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별로 없게 만든 게 바로 이런 체제입니다. 신문사로선 학교 관리자 한두 명한테만 잘 보이면 수백 명의 구독자를 거저 얻을 수 있으니 신문 발전에 투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겁니다.

다행히 2002년 ‘학교 안 집단구독 반대운동’ 이후 소년신문의 내용은 이전보다 나아졌습니다. 장삿속이 들여다보이는 광고기사, 엉뚱한 만화, 단순 문제풀이는 줄어든 게 사실이죠.

때문인지 ‘이제 내용이 좋으니까 학교 안 구독도 괜찮다’거나 ‘신문활용교육(NIE)의 완전학습 확보를 위해서 일괄구독은 필요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이렇게 학교에서 특정 상품을 막 팔아도 되는 것일까요. 학교에서 책이나 학용품 장사를 하는 일과 소년신문 장사를 하는 일은 그 본질에서 같은 것입니다.

이것들은 부교재, 또는 특정 상품인 관계로 학교 안에서는 법에 따라 학생들한테 팔 수 없는 것들입니다(초중등교육법 제29조 1항, 학교에서는 국가가 저작권을 가지고 있거나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 검정 또는 인정한 교과용 도서를 사용하여야 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날마다 교실이란 공간에서 교사의 손에 의해 소년신문이 판매되는 것 또한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 '학교는 신문지국, 교사는 신문배달부'란 어처구니없는 말은 언제쯤 사라질까요.

교장선생님, 그만 해 주십시오

최근 새 학기 시작과 함께 학교 교장 ‘선생님’들이 소년신문 구독을 사실상 종용하는 가정통신문을 보낸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소년신문사 소속 업자들이나 지국장들이 해야 할 일을 학교 관리자가 하고 있다는 비판도 일고 있습니다.

서울시교육청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각 학교에 공문을 서너 번 이상 보냈습니다. ‘구독 강요로 민원이 생기지 않도록 유념해 달라’는 것이 그 뼈대인데요. 교육관계법에 어긋나는 소년신문 학교 안 집단 구독행위 자체가 곧 민원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요, 아니면 알고서 모르는 척 하는 걸까요.

진짜 민원 해결을 바란다면 교장선생님들은 소년신문 사업에서 손을 떼십시오. 교육청도 함께 손을 터십시오.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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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교육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살아움직이며실천하는진짜기자'가 꿈입니다. 제보는 bul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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