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수석 졸업하는 박정희 생도 신경군관학교 2기생 예과 졸업식에서 박정희는 우등상을 받고 부상으로 부의 황제 명의의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대열 앞에서 생도 대표로 인사하는 사람이 박정희다. (만주일보 1942.3.24)
강덕(康德) 9년(1942년) 3월 23일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 현 長春) 교외 납납둔(拉拉屯) 소재 육군군관학교(일명 同德臺)에서는 제2기 예과 졸업식이 성대히 거행됐다. 1기생 졸업식 때는 부의(溥儀) 황제가 참석했었으나 이번에는 치안부대신, 시종무관, 그리고 관동군의 고위 장성 등 내빈만 참석했다.(부의가 졸업식에 참석했다는 일부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3월 24일자 <만주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날 졸업식은 오전 10시, 남운(南雲親一郞. 육군 중장. 교장 재임기간 1940~1943) 군관학교 교장의 '서류봉정과 상황보고'에 이어 우(于) 치안부대신 집행 하에 관병식을 한 후 졸업생 일동은 무도장에 정렬, 생도대표 강견상언(岡見尙彦. 일본계) 등 2명의 강연과 유도 및 검도 시범, 측도 작업 등 실습행사를 가졌다.

이어 11시50분부터 다시 교정에 집결한 후 졸업증서 수여와 함께 시종무관으로부터 우등생에 대한 시상식이 거행됐다. 이날 우등상 수상자는 모두 5명으로, 일본계 2명, 만주계 2명, 그리고 조선계가 1명이었다. 조선계 1명이 바로 박정희 생도였다. 이들은 만주국 부의 황제가 내린 금시계를 은사품으로 받았다.

만주국 황제 부의가 내린 금시계 받아

<만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박정희가 만주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1940년 4월 4일이었다. 그 해 2월 중순 그가 문경에서 만주로 향한 지 보름여 만이다. 교사직은 3월 31일부로 '의원면직' 처리됐다. 어릴 적부터 군인을 꿈꿨던 그는 마침내 그 꿈을 이룬 것이다.

박정희가 군관학교 시험을 치기 위해 만주행에 오른 것은 1939년 9월 하순경이다. 그 때 아직 그는 교사 신분이었다. 합격을 장담할 수 없었던 그는 만주로 향하기 전 주위사람들에게는 "잠시 어디 좀 다녀 오겠다"(여제자 정순옥씨 증언)며 말을 아꼈다. 조선땅을 지나 봉천-신경-길림을 거쳐 수험지인 목단강까지는 멀고 먼 거리였다.

▲ 박정희는 만주 신경군관학교 입교시험에서 240명 중 15등을 했다.
ⓒ 만주국 공보
강덕 7년(1940년) 1월 4일자 치안부대신 명의의 '육군군관학교 제2기 예과생도 채용고시 및 (합)격자 공고'에 따르면, 목단강에서 시험을 본 박정희(수험번호 15번)는 15등으로 합격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와 동기생으로 봉천에서 시험을 본 이한림(전 건설부장관)은 20등을 했다. 2기생은 일본인 240명, 만주인 228명, 그리고 조선인 12명 등 총 480명. 그러나 일본인 생도들은 별도로 교육을 받았다.

일본은 1931년 9월 관동군(關東軍)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강점한 뒤 이듬해 3월 1일 괴뢰국 만주국을 수립하고는 청조(淸朝)의 폐제(廢帝. 宣統帝) 부의를 집정(執政)에 앉혔다. 수도는 신경(新京. 지금의 長春), 연호를 대동(大同)이라 정했는데, 최규하 전 대통령이 졸업한 '대동학원'은 이 연호에서 따온 것이다.

만주국군 양성소, 만주 군관학교는 어떤 곳?

▲ 군관학교 생도들의 훈련장면. 생도들은 오전에는 학과수업을, 오후에는 보병전투 등 야외훈련을 주로 받았다.
ⓒ동덕대

만주국은 국군 간부 양성을 위해 건국하던 그 해 봉천(奉天, 현 瀋陽)에 2년제 간부훈련소(사관학교)를 세웠다. 이곳이 이른바 봉천 군관학교로, 한국인들은 4기생 때부터 입교가 시작됐다.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 초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신현준 등이 5기생 출신이며, 숙군 때 박정희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백선엽은 이곳 9기생 출신이다. 봉천군관학교는 9기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박정희가 예과를 마친 신경군관학교는 봉천군관학교 후신으로, 1939년 수도인 신경에 세워진 정식 4년제 사관학교였다. 이 해 4월 만계(滿系) 1기생 90명이 입교한 것이 그 첫출발로 1945년 8월 패전 때까지 만계는 7기, 일본계는 6기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했다.

조선인 출신으로는 김동하, 윤태일, 이기건, 방원철, 박임항, 이주일 최창언 등 1기생이 13명, 김묵, 이재기, 박정희, 이한림, 김재풍 등 2기생이 11명, 최주종 등 3기생이 2명, 예관수, 장은산 등 4기생이 2명, 강문봉, 황택림 등 5기생이 5명, 김동훈, 육굉수, 김윤근, 김학림 등 6기생이 9명, 그리고 마지막 기수인 7기생은 김광식 등 4명 등 총 44명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박정희가 5.16을 모의, 주도했을 때 주체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뒤에는 걸림돌이 되면서 박정희 친위세력에 의해 이른바 '알래스카 토벌작전'으로 숙청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봉천, 신경 두 군관학교를 통털어 조선인 입교생들의 상당수는 함경도, 평안도 지역, 즉 이북지역 출신이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봉천군관학교 5기생 출신인 정일권의 권유가 큰 영향을 끼쳤다. (신경 5기생 강문봉의 경우 박정희가 군관학교를 수석졸업하면서 상을 받는 뉴스영화를 보고 입교를 결심했다는 얘기도 있다.)

박정희처럼 이남지역에서 군관학교에 입교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봉천 5기 출신인 송석하(99년 작고)가 그 몇 안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데 그는 충북 영동 출신으로 청주고보를 다니다 군관학교에 들어갔다. 신경군관학교 1기생 출신인 방원철씨(용정 출신. 육본 초대 전사감. 육군대령 예편. 99년 작고)가 지난 97년 필자에게 남긴 증언이 이같은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광명중학 졸업 직전 당시 정일권 선배가 장교가 돼 학교에 와서 군관학교 입교를 권유해 '괜찮아 보인다'고 생각해서 군관학교 시험을 본 것이 합격이 돼 입교했다. 그러나 당시(16세)로선 애국투쟁을 위해 군인이 되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봉천 5기생 정일권의 권유가 입교에 큰 영향

신경 1기생은 전체 13명으로, 광명중학에서 20명이 시험을 봐 12명이 합격하였고, 유일하게 이기건(육군준장 예편)이 안동(현 단동)중학 출신이었다. 당시 광명중학은 일반 중학교와는 달리 5년제여서 졸업 후 일본내 대학 진학도 가능했으며, 4학년부터 군관학교 입학시험 자격이 주어졌다. 반면 인근 대성중학의 경우 4년제여서 졸업 후 광명중학 4학년에 편입, 졸업한 예(고 문익환 목사 등)가 더러 있었다.

지난 99년 필자는 동북3성 내 항일유적지 취재길에 장춘에 들러 옛 신경군관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장춘 시내에서 이도하자(二道河子)를 거쳐 대략 4km 정도 떨어진, 길림으로 가는 도중 납납둔에 위치해 있었다. 교사는 거의 원형대로 보전돼 있었는데, 현재 중국군 기갑학교로 사용중이었다. 1기생 방원철씨는 "당시에는 허허벌판이었던 이곳 주변에 달래가 많아 조선인 생도들은 이를 캐 '달래김치'를 만들어 먹었다"고 말한 바 있다.

만주군 '예비 소위' 박정희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졸업 후 2개월 간의 사관 견습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하기 직전인 1944년 6월말 일본군 소조(曹長, 상사에 해당) 복장으로 찍은 모습.
신경군관학교는 만주국 장교 양성을 위해 세운 사관학교였으나 일본 관동군이 만주국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던만큼 사실상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분교나 마찬가지였다. 군관학교 예과 졸업생 가운데 성적우수자를 선발, 일본육사 편입 특전을 부여한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하겠다.

이는 사관학교 생도들의 일상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됐다. 생도들은 새벽 6시 기상하여 점호를 마친 후 먼저 동쪽을 향해 일본 천황에게 '궁성요배'를 한 후 다시 서쪽을 향해 만주국 황제에게 '궁성요배'를 올리고는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예과시절 오전은 대부분 학과수업을 하였으며, 오후에는 연병장이나 야외에서 격검·총검술·유도·보병전투 등 술과(術課. 훈련)교육을 받았다.

조선인 생도들이 포함된 만계(滿系) 2기생 240명은 모두 2개 중대 8개 구대로 편성, 1개 구대는 30명씩이었다. 2기생이 교육중일 당시 만계 생도중대는 모두 3개 중대로, 1기생(90명)이 1중대, 2기생이 2·3중대였다. 박정희 생도는 제3중대 제3구대 소속이었다. 그가 속했던 3 중대장은 부의 황제의 바로 아래 동생 부걸(溥杰) 소좌(소령)이었으며, 구대장은 중국인 장연지(張連芝) 중위였다.

매일 아침마다 일본 천황-만주국 황제에 '궁성요배'

박정희와 동기생으로 당시 3중대 2구대 소속이었으며, 임관 후 만주군 보병8단에서 같이 근무했던 중국인 고경인씨(97년 당시 75세로 미국 라스베가스 거주)는 97년 필자에게 당시 박정희 생도에 대한 기억을 다음과 같이 들려줬다.

"자기 목표 달성을 위해 죽음도 불사할 정도로 성실하고 신중했다. 언젠가 당시로선 금기였던 조선역사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어물어물하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른사람이나 역사에 대한 평론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조선인 동기생 중에서 뭔가 특성이 있는 사람으로 이한림과 박정희 두 사람 정도였다."

박정희보다 1년 선배로 그가 속했던 제3중대 취체(取締. 감독)생도를 지낸 방원철씨는 그에 대한 기억 하나를 필자에게 소개한 적이 있다.

"2기생이 입교한 지 한 달 정도 지나서 2기생 김재풍과 박정희를 따로 불러내 기합을 준 적이 있다. 박정희는 1기생 선배들한테 좀 뻣뻣하게 대하고, 김재풍은 인사할 때 잘 웃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걸 두고 1기생들 사이에서 두 사람이 군기가 빠졌다고 했다. 그래서 동기생 중에 덩치가 큰 내가 두 사람을 불러 '이빨 꽉 깨물어!'하고 주먹으로 몇 대씩 때렸다. 김재풍과 달리 박정희는 내 주먹을 맞고도 딱 버텨냈다. 순간 '독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교 후 처음 맞은 것이어서 아마 평생 못잊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군관학교 시절 성적도 우수했고, 매사에 성실한 생도였다는 게 동기생들의 대체적인 증언이다. 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같이 다닌 중국인 동기생 반의정씨(潘義靜. 97년 당시 73세. 방사선과 의사 출신)의 97년 당시의 증언을 들어보자.

"교양수업이나 군사훈련 중에도 부동자세로 입술을 굳게 다문 그의 모습에 감히 타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또 휴식중에도 말 수가 적고 타인과의 접촉을 삼갔는데, 단기 카즈미(香住. 이한림의 창씨명)와는 종종 한국말로 무슨 얘길 나누곤 했다. 일본 육사 시절에는 그와 같은 보병반에 속해 있었는데 그 때도 학습과 훈련에만 열중하고 대인관계를 자제하는 편이었다. 그는 결코 심중의 얘기를 꺼내는 법이 없어 우리는 항상 피상적인 동기생 관계로만 있었다."

일본 육사 생도시절의 박정희 만주 군관학교를 우등졸업한 박정희는 일본 육사에 편입돼 57기로 졸업했다. 앞줄 오른쪽 끝(붉은 원 안)이 박정희 생도.
1942년 만계 240명 가운데 수석졸업한 박정희는 성적이 좋은 이섭준, 이한림, 김재풍 등 세 한국인 동기생과 70여명의 만주계 생도들, 그리고 일본계 동기생 240명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육사 유학생대에 편입했다. 당시 3학년이었던 일본 육사 57기가 그와 동기생인 셈이다.

4년 2개월 교육 마치고 '황군 소위' 임관

2년 본과 과정을 마치고 1944년 4월 일본육사 유학생대를 3등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소련-만주 국경지대인 제제합이(齊齊哈爾) 주둔 관동군 635부대에 배속돼 3개월간 견습군관(사관견습) 생활을 했다. 견습군관 시절 그의 계급은 상사 대우였다.

예과 입학 이후 견습사관을 마치기까지의 전체 기간은 대략4년 2개월로, 이 가운데 10개월을 대부(隊付)근무, 즉 현지부대에서 근무를 해야 했다. 박정희는 이 긴 여정을 성실히 마치고 1944년 7월 1일 마침내 '황군(皇軍) 육군소위'로 임관, 만주군에 배치됐다. 그가 해방을 맞은 것은 이로부터 1년 1개월 보름만이었다. 해방으로 그의 1차 군인생활은 일단락 됐다.

군관학교 조선인 수석졸업생들의 면면

▲ 부의 황제가 은사품으로 내린 금시계를 앞에 놓고 기념촬영을 한 송석하 생도. 우측 아래 인물사진이 주인공인 고 송석하씨(97년 촬영)
박정희는 1942년 3월 신경군관학교 예과를 졸업하면서 만주족과 조선족이 포함된 만계(滿系) 2기생 240명 가운데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이날 부의 황제 명의의 금시계를 은사품으로 하사 받고 일본육사 유학생대 편입 특전을 받았다.

그런데 박정희 이외에도 조선인 생도 가운데 군관학교 수석 졸업자가 적지 않았다. 박정희의 1년 선배기수인 1기생 때는 박임항(육군 중장 예편)이 수석을 했고, 4기 때는 장은산(육군 대령 예편, 포병사령관 역임)이 수석을 했다. 3기 때는 중국인 생도가 수석을 차지했다.

군관학교 전체 생도 가운데 조선인 생도는 숫적으로는 중국인 생도의 2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인 생도들이 이처럼 우수한 성적을 기록한 것은 입교 전 교육수준이 높았던데다 학업에 임하는 열의와 성실성 때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에 앞서 봉천군관학교 시절에는 5기생 출신인 송석하(육군소장 예편)가 역시 수석졸업을 했다. 지난 99년 작고한 송석하는 생전에 필자에게 "그 때도 금시계를 황제 은사품으로 받았다"며 "(금시계는) 6.25 때 잃어버렸는데 황제가 줬다는 것보다 수석졸업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생전에 필자에게 자신이 군관학교 졸업식 때 부의 황제로 부터 하사받은 금시계를 곁에 놓고 찍은 사진을 첫 공개한 바 있다.


관련
기사
[실록 1] 좌익혐의로 무기징역..재심서 '구사일생'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