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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선생님' 박정희는 20세 되던 해인 1937년 3월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 꼭 3년간 교사로 근무했다. 사진은 1939년 봄 학교 맞은 편 신사 자리에서 여제자들과 함께 찍은 모습으로, 뒷줄 왼쪽 끝이 군관학교 시절 편지를 주고 받았던 정순옥씨.
ⓒ 정순옥씨 제공
1940년 봄 어느날 그 해 보통학교를 갓 졸업한 정순옥(문경보통학교 26회 졸업생, 97년 당시 71세로 서울 강동구 거주함)씨는 한 살 아래인 사촌여동생(당시 문경보통학교 6학년)으로부터 분홍비단 손수건과 편지 한 통을 건네받았다. 그가 동생에게서 건네받은 손수건은 문경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편지를 받아 겉봉의 발신자를 보니 '만주 신경 육군군관학교 제3구 4연대 박정희'라고 적혀 있었다. 낯익은 글씨에 반가운 이름이었다. 편지를 보낸 주인공은 보통학교 6학년 때 1년간 자신을 가르쳤던 '박정희 선생님'이었다. 편지에는 조선말로 "처마 끝에 참새같이 짹짹이던 너희와도 이제 마지막이다. 어디로 갈 지 모르겠다. 씩씩하고 훌륭한 조선여성이 돼 주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 박정희의 문경보통학교 여제자 정순옥씨.(97년 촬영)
ⓒ 정운현
지난 97년 취재차 만났을 때 정씨는 반세기 가까이 전의 일을 마치 엊그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만주로 가신 뒤 박 선생님 한테서 평균 2개월에 한 통 꼴로 편지가 왔습니다. 한번은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했다고 알려왔더군요. 또 더러 편지에 사진을 같이 부쳐오기도 했는데 한번은 칼을 든 사진도 보내왔었습니다. 군관학교에 가신 후 2년여 편지왕래가 있었는데 마지막 편지 때 쯤 '이제 본과는 일본으로 간다'고 쓰셨던 기억이 납니다."

문경보통학교에서 훈도(교사)로 근무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교사 박정희'는 왜 돌연 만주로 간 것일까? 그의 '만주행'은 박정희 개인의 역사는 물론 우리 현대사에서도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만주행이 없었다면 '군인 박정희'는 없었을 것이고, 또 이후의 '5.16'도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만주행에 대한 비밀은 아직도 완전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당사자인 박정희 그 자신이 밝힌 것은 생전에 비서관에게 한 마디 툭 던진 정도가 전부이며, 주변 사람들의 증언 역시 정연한 것은 아니다. 이제 그 진실의 모자이크를 하나씩 꿰맞춰 보자.

그간 나온 박정희 관련 연구서나 잡지 기사 가운데 박정희의 만주행을 언급하면서 자주 거론되는 단골메뉴는 '장발사건'이다. 이 이야기의 발단은 그와 대구사범 동기생인 권상하(97년 당시 81세)씨의 증언에서 비롯됐다. 다음은 권씨의 증언 요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당시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전의를 고양시키기 위해 교사들도 군인처럼 머리를 빡빡 깎게 했다. 복장도 국민복, 국민모에 각반까지 차고 다니게 했다. 그런데 그 시절 박정희는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 해 가을 마침 연구수업 시찰을 나온 일본인 시학(장학사)이 박정희의 긴 머리를 보고 "아직도 총력정신이 결여된 교사가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날 저녁 시학을 위해 교장 관사에서 연 연회에서 이것이 다시 논란이 됐고, 이튿날 교장이 그를 불러 간밤의 행동을 질책하자 울컥한 끝에 교장을 두들겨 패고는 그 길로 짐을 챙겨 문경을 떴다."

'교사 박정희'의 마지막 흔적 사진은 박정희가 (소화 15년)1940년 3월 31일부로 '의원 면 본관', 즉 본인의 희망으로 교사직에서 물러난 사실을 발령한 사령 원부.
ⓒ 문경군청 소장
권씨의 이같은 증언은 객관성이 상당히 결여돼 있다. 우선 당시 일개 평교사가 일본인 시학과 교장에게 그같은 행동을 하기가 현실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것이다.

특히 당시 '교사 박정희'의 모습을 담은 여러 장의 사진을 살펴 봐도 그의 장발 모습은 찾을 수 없다. 반면 당시 장발은 그가 아니라 학생들이었다는 한 여제자의 증언이 있다. 박 교사 부임 당시 2학년이었던 이순희(97년 당시 70세)씨가 그 증언자다.

"머리가 긴 것은 박 선생님이 아니라 학생들이었습니다. 당시 동네에 바리캉이 한 두 개 뿐인데다 그걸 빌리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돈을 주고 빌리기도 쉽지 않았구요. 그래서 제 때 머리를 깎지 못해 머리가 긴 학생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일본인 교사들은 이런 사정은 제쳐놓고 무조건 머리가 긴 학생들에게 벌을 세우곤 했습니다. 이런 일로 박 선생님과 일본인 교사간에 언쟁이 더러 발생하곤 했습니다."


'장발 사건'은 권씨가 꾸며낸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과장됐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대체 그를 만주로 이끈 것은 무엇인가. 필자와의 얘기 끝에 여제자 이씨가 실마리가 될만한 얘기 하나를 불쑥 꺼냈다.

"어느 핸가 시학관이 학교로 시학을 온다고 연락이 와서 3학년 여학생들이 옷을 잘 차려입고 정류소 앞에 도열해 기다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박 선생님은 학교에서 평소 좋아하던 나팔을 불고 있었는데 급사가 가서 내려오시라고 해도 듣지 않자 일본인 교사들이 가서 박 선생님을 집단 구타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박 선생님은 '내가 꼭 복수해 주겠다. 조선에는 사관학교가 없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간다'고 얘기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뒤에 들으니 박 선생님께서 졸업한 제자에게 돈을 빌려 김천서 하룻밤을 자고 만주로 갔다고 들었습니다."

1932년 봄 구미보통학교를 졸업(11회)한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했다. 대구사범의 경우 당시 지방학생들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했다. 대구-구미간을 열차로 오가던 박정희는 열찻간에서 당시 대구간호학교에 다니던 네 살 연상의 '누님'을 한 사람 알게 됐다.

두 사람은 당시 학생사회에서 유행하던 S-B(Sister-Brother, 누나-동생)사이가 되었다. 이들의 인연은 박정희가 교사가 된 이후에도 계속됐다. 주인공 주현숙(재미, 97년 당시 85세)씨를 취재한 한 전직 언론인의 증언을 들어보자.

"박 대통령은 문경 교사 시절 때도 '집(구미)보다 여기가 가깝다'며 토요일마다 예천 주여사 댁으로 놀러오곤 했답니다. 그 때 두 사람은 모두 결혼한 상태였는데 박 대통령은 '마누라가 미쁘다고(마음에 안든다고) 꼬집어대서 못살겠다'는 얘기를 자주 했답니다.

그런데 언젠가(1939년말) 한번은 박 대통령이 놀러와서 '군인이 돼 높은 사람이 돼서 오겠다'며 일본군가, 혁명가를 부르더랍니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와서는 '누님, 내일이면 헤이다이상(군인)이 되러 갑니다. 술 좀 사주십시오' 해서 술을 사주었는데 그 다음날 예천역에서 만주로 간다며 떠났답니다."


앞에서 여제자 이씨가 언급한 '김천'은 어쩌면 '예천'의 잘못인지도 모른다. (참고로 66년 1월 27일 경북 예천역 광장에서 열린 경북선(예천~점촌) 재개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이 행사장에서 주씨를 만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을 재미교포인 주씨의 아들이 지난 97년 필자에게 보내온 바 있어 두 사람의 '인연'은 확인되고 있다.)

주씨의 증언을 살펴보면 그의 만주행에는 가정생활에 대한 불만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이 읽혀진다. 실지로 그는 첫 부인과 부부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문경에서 교사로 3년간을 보내면서 그가 부모형제와 처자가 있는 구미 본가를 찾은 적은 거의 없었다.

▲ 박정희가 하숙했던 하숙집 주인 아들 임창발씨.(97년 촬영)
ⓒ 정운현
지난 97년 문경 현지취재 때 필자는 박정희가 교사 시절 2년여 동안 하숙했던 하숙집 주인의 아들 임창발(97년 당시 78세)씨를 만났다. 그는 박 대통령보다 두 살 아래로 친구처럼 지냈다.

임씨는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셔서 나팔을 부셨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면서 "방학 때도 고향에 안가시고 우리집에 머무셨고, 또 만주 군관학교 생도시절 휴가 때도 본가로 안가시고 우리집에 계시다가 가셨는데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으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만주행은 부인과의 불화로 인한 도피심리가 한 요인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여제자 이씨와 '누님' 주씨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일본인에 대한 복수심이 단초가 됐고, 여기에 군인이 돼 출세하겠다는 야심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생전에 그는 터놓고 얘기를 나눴던 김종신(74, 부산문화방송 사장 역임) 비서관에게 "긴 칼 차고 싶어 (만주로) 갔지"라고 얘기한 바 있다.

여기서 박정희가 언급한 '긴 칼'은 권력의 상징어로 볼 수 있다. 즉 그는 당시 군국주의 하에서 최고의 권력집단이었던 군인을 평소 동경했고, 그래서 군인이 되기 위해 만주로 갔다는 얘기다. 그와 '긴 칼'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 한 토막이 있다. 증언자는 앞에 등장했던 여제자 이씨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박 선생님이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누런색 군복에 빨간 견장, 붉은 군모, 그리고 에리(목 컬러)에는 별이 하나 그려져 있더군요. 그리고 칼을 하나 차고 있었는데 칼끝이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습니다.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후 박 선생님께서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 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머리숙여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박 선생님이 교사 시절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모두 그 장면을 보고 통쾌해 했습니다."


박정희의 만주행은 그것이 개인적인 울분에서 기인한 것이든, 아니면 시대상황이 빚어낸 시대사적 산물이든 동기 자체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의 만주행이 '교사 박정희'를 '군인 박정희'를 만들었고 이후 그가 '권력자 박정희'로 변신하는 하나의 단초가 됐다는 점이다. '군인 박정희'가 없었다면 '대통령 박정희'도 우리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주로 떠나기 직전 '교사 박정희' 1940년(소화 15년) 2월 7일 와다나베 경부 송별식 기념촬영 사진. 이 사진은 그가 만주행에 오르기 직전 찍은 사진으로, 붉은 원 안이 박정희 교사다. 당시 그의 머리칼은 짧고 단정한 편이다.

"전사 소식 접하면 향 한 대 피워주게"
만주로 떠나는 박정희 교사 환송식 장면

1940년 2월 중순경 박정희는 만주행에 올랐다. 당시 (일본)군에 가는 사람에게는 모두 환송식을 해주는 관행이 있었다. 그 역시 군인이 되려 군관학교로 가는 길이니 이에 해당됐다.

당일 행사는 문경보통학교 바로 옆에 있는 버스정류장 자리였다. 마침 봄방학이어서 환송식 행사에는 몇몇 동료 교사와 학생 5~6명이 모습을 보였고, 주민들도 더러 참석했었다. 이들은 길 양 옆으로 도열해 만주로 가는 박 교사를 환송했다.

당시 전송식 행사장에 참석했던 오태구(문경보통 31회 졸업생, 97년 당시 69세)씨는 "학교에서 간단한 행사를 마치고 참석자 일행이 버스정류장까지 따라 나가서 길가에 도열해 박 선생님을 전송했다"며 "당시 박 선생님은 붉은 글씨가 씌어진 띠를 머리에 두르고 있었으며, 전쟁터에서 목숨을 지켜준다는 센닌바리(千人針)을 들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박 교사는 환송 나온 동료교사들에게 "전사 소식을 접하면 향 한 대나 피워주게"라며 짧고도 비장한 한 마디를 던졌다. 그리고 훌쩍이는 어린 제자들의 어깨를 다독이며 "섭섭해 하지 말아라. 긴 칼 차고 대장이 돼 돌아오겠다"고 위로했다. 만주에서 그로부터 편지가 제자들에게 날아든 것은 이로부터 대략 한 달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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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