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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문제제기로 시작된 '정체성' 논란이 정치권에서 좀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박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두고 정체성이 의심스럽다며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의 간판을 내려야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 바 있다. 또 한나라당은 당 차원에서 정체성 관련 특별 대책기구까지 구성했다.

여권에 대한 박 대표의 이같은 정체성 문제 제기는 최근 여당의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 제출 등이 계기가 된 듯하다. 논란이 된 박 전 대통령의 일본군 복무경력과 창군 초기 그의 좌익전력은 현재 정치권에서 일고 있는 정체성 논란과 결코 무관치 않다. 문건과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친일-좌익행적을 '실록'으로 남긴다... 편집자 주


▲ 미국은 오랫동안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하고 감시했다. 사진은 5.16 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주한유엔군 총사령부를 방문(1961.8.21), 당시 멜로이 사령관과 악수하고 있다.

육사 8기생 졸업식(1949.5.23)이 있기 일주일 전 쯤인 5월 중순경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이 전투정보과 사무실로 불쑥 들어섰다. 당시 전투정보과 과장은 유양수(육군 소장 예편, 현 박정희기념사업회장) 대위였다. 이 자리는 원래 소령 T/O였으나 워낙 인원이 없어 유 대위가 과장 대리격으로 있었다. 백 국장은 유 대위를 향해 반가운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임자, 채병덕 (3군)참모총장의 특별지시로 전투정보과를 보강하기로 했네. 이번에 졸업하는 8기생 가운데 임자 마음대로 필요한 인원만큼 선발해서 쓰시오. 참, 가는 길에 계인수(정보국 첩보과장) 중령이랑 같이 가지..."

백 국장 말이 떨어지자 무섭게 유 대위는 즉각 교무처로 달려가 8기생 졸업생 명부를 구했다. 그리고는 1등부터 30등까지 30명 전원 개인면접을 거친 후 최종 15명을 선발했다. 당시 1등 졸업생은 엄용승이었다. 유 대위는 이들을 전원 전투정보과에 배치시키고는 추가로 15명을 선발, 타 과에도 배치시켰다. 이들은 배치전 2주간 청량리 정보학교에서 기본교육을 받았는데 그 인연으로 '청정회'라는 친목단체를 꾸렸다.

육본 정보국의 '무급 비공식 문관'

▲ 박정희와 같이 육본 정보국에 근무했던 유양수씨. 사진은 지난 61년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일행의 기념사진으로 박정희 왼쪽이 유씨.
8기생 신참 15명을 대거 보강해 과의 면모를 갖춘 7월초 유 대위는 정식 과장에 취임했는데 뒤이어 보름 뒤 유 대위는 다시 소령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보름 뒤인 7월말 백 국장이 예고도 없이 다시 유 과장의 방을 찾아왔다. 백 국장은 더러 부하들의 방을 직접 찾기도 했다.

"임자, 박(정희) 소령 알지?"
"아다마다요, 사관학교 때 우리 중대장을 하셨는데요!"
"어때, 지금 그 사람 놀고 있는데 같이 일하면 안되겠나?"
"좋습니다. 보내주세요. 과거에 모신 적도 있습니다.
"알았네, 나도 도울테니 같이 잘 지내게"


형집행정지로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박정희는 한동안 민간인 신분으로 지내다가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의 도움으로 정보국 전투정보과에서 문관으로 지냈다. 당시 신분이 민간인 비공식 문관이어서 그에겐 급료가 없었다. 그래서 주변에서 백 국장의 기밀비 일부를 떼고 씨레이션을 팔아 그의 급료를 마련했다. 이 때 박정희는 풀이 죽어 지냈다.

숙군 당시 중형을 선고받은 군인 가운데 구명된 케이스는 박정희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과연 어떤 사정으로, 누구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졌을까?

박정희가 김창룡팀에 의해 처음 끌려간 곳은 서울 충무로 입구 신세계백화점 인근 서울헌병대였다. 당시 헌병대 건물은 콘센트 막사였다. 그는 이곳 영창에서 1주일을 보냈다. 박정희와 육사 2기 동기생인 김안일(육군 준장 예편) 정보국 특무과장은 이 무렵 박정희를 불러 직접 신문한 적이 있다.

김 과장은 박정희에게 양면괘지 한 묶음을 건네며 '자술서'를 쓰라고 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써내려 갔는데 그 속에서 좌익세포들의 명단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수사팀은 이 명단을 토대로 마치 '고구마 캐듯' 세포들을 색출해 냈다. 김창룡 등 수사팀은 '박정희 리스트'의 위력에 혀을 내둘렀다.

수사실무팀에서 나온 '박정희 구명운동'

'은인' 백선엽에 대한 박정희의 보답

▲ 박정희의 최대의 '은인'인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

'박정희 구명'의 최대 공로자랄 수 있는 백선엽(84, 육군대장 예편, 전 육군참모총장)씨에 대해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후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백씨가 교통부장관(1969-71) 시절의 일화 한 토막.

백씨가 장관 부임 직후 어느날 정부-여당의 당정회의에서 백 장관이 국회의원에게 호되게 당하자 박 대통령이 의원들의 말을 막고 나서며 "백 장관이 부임한 지 얼마 안돼 아직 업무파악을 제대로 못한 모양인데 다들 좀 봐주시오!"라며 분위기를 바꿨다.

박정희는 집권 기간 내내 그에게 대만 대사 등 여러 나라 대사와 장관, 국영기업체 사장 등의 '자리'를 만들어 줘 나름대로 자신을 구명해준 은혜에 대해 보답했다.
수사 실무책임자인 김안일 과장은 "박정희를 살려주자고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은 다름아닌 그를 수사했던 김창룡 대위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박정희와 육사2기 동기생이었던 김 과장은 김창룡의 구명 건의를 받아들여 직속상관인 백선엽 정보국장에게 박 소령을 한번 만나줄 것을 요청했다. 다음은 백선엽씨가 자신의 회고록 <군과 나>에서 밝힌 관련 내용이다.

"...숙군 5단계 작업이 완결될 즈음인 49년초 어느 날 방첩대의 김안일 소령이 나에게 '박정희 소령이 국장님을 뵙고 꼭 할말이 있다고 간청하니 면담을 해주십시오'라고 전했다. 김 소령은 아울러 박정희 소령이 조사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들어 꼭 만나봐줄 것을 요청했다. 김 소령은 나의 승락이 있자 곧 박정희 소령을 나에게 데려왔다.

내가 박 소령을 면담한 곳은 정보국장실이었다. 박 소령은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한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작업복 차림의 그는 측은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면담 도중 전혀 비굴하지 않고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평소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약간 알고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에도 침착한 그의 태도가 일순 나를 감동시켰다. "도와 드리지요." 참으로 무심결에 이러한 대답이 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박정희의 구명운동은 그를 체포하고 수사한 수사팀에서부터 출발했는데 어쩌면 그래서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수사실무자인 김창룡과 김안일 과장이 박정희에 대한 신원보증서 겸 구명사유서를 만들어 백 국장을 찾아가서 결재를 받아낸 것이 사실상 구명운동의 시작이었다.

수사팀에서 그를 살리기로 결정이 내려지자 이후 일정은 수사팀 몫이 돼버렸다. 백 국장은 미 군사고문단에 양해를 구하고 또 육본에 재심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 구명운동은 이밖에도 다양한 채널에서 진행됐다. 만주인맥이 큰 힘이 됐다. 만주 군관학교 교의(校醫, 중좌)를 지냈고, 박정희가 첫 부임한 춘천 8연대 시절 연대장을 지낸 원용덕이 백선엽 국장을 움직였다. 백선엽이 평양사범 졸업 후 의무복무 도중 군관학교에 입학해 말썽이 됐을 때 원용덕이 나서서 도움을 줬는데 이 일을 두고 백선엽은 늘 고마워했었다. 백선엽 역시 만주인맥의 일원(봉천군관학교 9기)이다.

같은 만주인맥의 일원이자 여순가담자 토벌에 참여했던 고 송석하씨(봉천 5기, 육사 2기, 육군소장 예편, 99년 작고)는 "여순사건 때 박정희가 남원까지 온 것으로 안다. 그 때 최남근과 박정희가 안보이길래 우리는 지리산부대(김지회 부대)에 잡혀간 줄 알았다"며 "그 때 원용덕이 박정희를 붙잡아 '살려면 남로당 조직표 내놔라'라고 설득해서 서약받은 후 백선엽에게 구명요청을 했다"고 지난 97년 필자에게 증언한 바 있다.

박정희 재판 때 재판장을 맡았던 김완룡씨는 당시 주변사람들의 구명 노력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다음은 김씨의 증언.

"재판을 앞두고 있는데 백선엽 국장한테서 전화가 왔더군요. 백 국장은 '박정희가 (좌익활동 했다는) 구체적 증거가 없고 피해 없으면 목숨만 살려줄 수 없느냐'며 박정희를 살리는데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당시 박정희는 '지리산'에도 관계하고 해서 일단 잡아 넣은 상태였죠."

김씨는 "백 국장 이외에도 당시 나와 약수동 앞뒷집에 살았던 송요찬 장군과 김형일 장군 등도 그의 구명을 요청해 왔다"고 밝히면서 "당시 박정희는 구체적인 행동이 드러난 것이 없었고, 수사에 적극 협조한데다 머리좋은 수재라 죽이기 아깝다는 여론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고 회고했다.

숙군 관련 전권을 쥐고 있던 백선엽 정보국장

'장군' 박정희 좌익전력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능력과 주변의 도움으로 박정희는 장군으로 진급(1953.11.25)했다. 사진은 육군대학 졸업(1957.3.20)후 포천 주둔 6군단 부군단장 시절(준장)의 박정희.
박정희와 육본 정보국에서 같이 근무했던 김점곤 원장도 이와 비슷한 의견이다. 그는 "박정희를 서대문형무소에서 풀어줄 때 이미 그를 살리기로 결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후의 군사재판(무기징역 언도)과 육본의 재심(징역 15년 감형), 확인관 조치(형집행정지) 등은 사실상 후속조치에 불과했다"며 "당시로선 참모총장도 좌익에 대해선 살려주자고 말을 꺼내지 못할 시절이었는데 당시 숙군과 관련해 전권을 쥐고 있던 백선엽 정보국장을 움직인 탓에 박정희를 살려낼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군내 선배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이후 장군으로 진급도 했지만 그의 주변에는 '좌익 악령'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대통령선거 때마다 사상시비가 단골메뉴로 불거졌으며, 몇몇 좌익사범 사건 때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힘들게 한 것은 미국의 감시였다. 미국은 '전향자'인 그의 사상전력에 대한 의혹을 떨치지 못한 채 집권 기간 내내 그를 감시했다. 박 정권과 미국과의 갈등은 여기서 한 자락이 연원한 측면도 없지 않다.

숙군 회오리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장군으로 승진하고 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박정희에 대한 미국의 감시 눈초리는 끊이지 않았다. 특히 5.16 직전부터 '거사설'이 나돈 뒤부터 미국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지목하고 있었다. 당시 육본 정보참모부장(1957), 연합참모본부장(1959)으로 있던 김점곤 원장의 증언을 들어보자.

"5.16 직전 미8군 댄스톤 정보국장이 매그루더 사령관의 친필 메시지를 들고 나를 찾아왔었습니다. 그는 20명의 명단이 적힌 한국군 장교들의 명단을 한 명씩 보여주면서 그들의 좌익관련 여부를 묻더군요. 명단 속에는 내가 잘 아는 사람도 있었는데 거의 좌익이 아니었습니다. 박정희 장군도 물론 명단에 들어 있었습니다.

박 장군에 대해 묻길래 나는 '과거 형님의 죽음 관계로 공산당에 들어간 적이 있지만 지금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별을 두 개나 단 사람이 기득권을 버리고 공산당으로 갈 것로 보지 않는다'라고 답했습니다. 당시 그와 동행한 여비서가 우리들의 대화내용을 모두 녹음하더군요."


'전향자 박정희'에 대한 미국의 감시와 의혹의 시선

"애주가에 성격은 과묵, 상황판단 뛰어나"

박정희 '사인' 육본 전투정보과 시절 박정희가 만든 자신의 '사인'. 사진은 한무협씨가 97년 필자의 취재노트에 그의 사인을 흉내내 보인 것으로, 진짜 박정희의 사인과 구별이 안될 정도로 닮아 있다.

숙군에 협조한 공로로 석방된 박정희는 49년 초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전투정보과는 남, 북한반 2개 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북한반장은 유양수(7특, 육군소장 예편) 중위가 8기생 7명을 데리고 북한측 상황을 체크하고 있었고, 남한반장은 한무협(6기생, 육군소장 예편) 소위가 8기생 3명을 데리고 지리산, 속리산, 태백산 일대 무장공비 관련 사항을 취급하고 있었다.

한씨에 따르면, 당시 박 과장은 일본군대의 지휘관용 '상황판단' 전술교범을 늘 옆에 끼고 살았는데, 이 책을 완전히 소화한듯 했으며, 매사에 판단이 치밀하고 정확했다고 한다. 또 당시 박정희는 과묵한 성격에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날이 잦았으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때가 많았다고 했다.
육본 정보국에서 박정희 휘하에서 근무했고, 또 그와 친분이 깊었던 '정보맨' 한무협(육사 6기, 육군소장 예편)씨는 지난 97년 서울 북창동 소재 자신의 사무실에서 필자에게 이런 증언을 한 바 있다.

"민주당 시절 이종찬 장군이 장면 총리에게 박정희 장군의 중용을 건의한 적이 있습니다. 장 총리가 이 문제를 가지고 매그루더 사령관과 논의했는데 얼마 후 매그루더가 육본으로 박 장군의 신원조회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김형일 참모차장이 '박정희는 레프트(좌익)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랬더니 매그루더 가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며 항의를 했습니다. 당시 박 장군은 육본 작전참모부장이었는데 이 일이 있은 후 2군 부사령관으로 전보됐습니다."


미국의 감시도 감시였지만 당시 박정희에 대한 사상문제는 한국군 내부에서도 완전히 정리가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한 김형일은 이 일로 박정희와 등을 지고 말았는데 5.16후 군정에 반대하다가 참모차장 자리에서 예편했다.

그 뒤 2년간 미국 유학후 귀국, 야당으로 투신한 그는 6대 국회 때 정부전복 음모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9대까지 내리 4선을 하면서 신민당 원내총무 등을 지낸 그는 78년 55세로 타계했다.

"김창룡이 내민 조직표에 '박정희' 이름이 있었다"
김정렬 전 국방장관의 '회고록' 중 관련내용 발췌

▲ 김정렬 전 국방장관
ⓒ연합뉴스
숙군 수사팀의 일원이 아닌 사람 가운데 박정희의 좌익연루 사건을 소상하게 증언한 사람이 있다. 초대 공화당 의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김정렬씨(작고)가 그다. 김씨는 지난 93년 자신의 회고록에서 자신이 육군 항공사관학교 초대 교장으로 있을 때 휘하에서 교수부장으로 있던 박원석 대위가 어느날 좌익혐의로 끌려간 후 경위를 알아보니 조직도상에 박 대위가 박정희의 세포(조직원)로 돼 있더라며 당시 상황을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김씨는 일본육사 54기 출신으로 박정희(57기)의 3년 선배이자 박 대위의 4년 선배였다. 박 대위는 또 만주에서 해방을 맞았으며, 박정희와도 이미 알고지낸 사이였다. 다음은 <김정렬 회고록> 가운데 관련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필자 주


"...1949년 2월 육군 항공사관학교가 창설되고 내가 교장으로 부임해서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날 밤 관사 문을 요란히 두드리길래 나가봤더니 직속부하인 박원석 교수부장이 건장한 장정 서너 명에 둘러싸여 “저는 잘못이 없습니다”며 울부짖고 있었다. 경위를 알아보니 숙군 수사팀에서 그를 빨갱이라며 체포하러 왔었다.

이튿날 수사팀이 일러준 명동 수사대 건물로 갔더니 김창룡 소령이 웬만한 사람의 키보다 큰 차트를 펼쳐 보였다. 알고보니 그게 남로당 군사조직표였는데 박원석 대위는 맨 하단에 이름이 올라 있고 바로 그위에 박정희 소령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공산주의자일 리가 만무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곧바로 나는 정일권 육군참모차장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정 차장은 “지금 김창룡이가 나를 빨갱이로 보고 나를 못 잡아서 안달인데 내가 어떻게 하겠소”라고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김창룡의 직속상관인 백선엽 정보국장을 찾아가 박정희와 박원석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백 국장은 “그건 저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묘안을 생각하다가 문득 김창룡의 약점이 떠올랐다. 그는 정규 일본육사 출신들에게 꿈벅 죽고 들어가는 성향이 있었다. 그 길로 채병덕(일본육사 49기) 육군참모총장 댁으로 급히 찾아갔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두 사람의 구명을 호소하자 “야! 지금 박정희 뿐이냐! 억울하게 잡혀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어떻게 박정희만 빼줄 수 있느냐!”고 쏘아붙였다. 그래서 마치 동생이 형에게 떼 쓰듯이 졸라댔더니 김창룡을 집으로 불렀다.

김창룡이 채 총장 집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잠시 얘기를 나눈 후 김창룡이 간 뒤 채 총장이 내게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인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풀어줄 길은 있다고 하는구만...”이라며 한가닥 실마리를 암시했다. 그래서 “그 길이 무엇이오?”하고 물으니 방첩대에서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갈 때 열 번 만 박정희를 앞세우고 얼굴을 내비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첫째, 박정희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여기에 협력하여 누명을 벗을 것이요, 둘째, 설사 그가 공산주의자라 하더라도 열 번이나 그들에게 반역을 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 세계에서 영원히 추방되고, 그 결과 확실하게 전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박정희가 이 일에만 협력하면 풀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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