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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공영권의 가장 건실한 신(新)질서를 건설해야만 될 것은 유구한 인류역사가 우리에게 부과한 중대 사명으로 …… 좀더 솔직하고 좀더 용감하게 신체제 건설에 희생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 특히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의 활동은 …… 민족협화(民族協和)의 신흥제국(新興帝國, 만주제국 지칭)에 있어서 가장 솔직한 자기반성으로 이 운동의 광휘 있는 실천은 장래 선계(鮮系, 조선인)국민에게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반드시 좋은 영향을 가져오리라고 봅니다……”―『삼천리』 1940년 12월호

누가 쓴 글일까? 만주국(滿州國) 건설에 조선인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호소하고 있는 이 글을 쓴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다.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인이다. 하성(霞城) 이선근(李瑄根. 1905∼1983년). 문교장관과 여러 대학에서 총장을 지낸 이선근이 바로 이 글의 필자다.

두 만주 친일파 1976년 6월 동국대 총장시절 고려대장경 영인본을 가지고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찾은 이선근. 그는 '만주인맥'을 중용한 박 정권 하에서 문화-교육계의 요직을 두루 섭렵했다.
‘과연 그가 이 글을 썼을까’ 하는 의문이 갈 정도다. 왜냐하면 이선근의 해방 후 경력은 ‘민족적인’ 냄새로 분칠이 돼 있기 때문이다. 「화랑도(花郞道) 연구」로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독립운동사』를 저술하기도 했던 그다. 언뜻 보면 그는 ‘친일(親日)’과는 거리가 먼 사람같이 보이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그는 해방 후 일찌감치부터 소문난 친일파였음을 알 수 있다.

일제당시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新報)』(『서울신문』의 전신)는 해방으로 미군정에 접수된 후 10월 25일 조선인 주주총회를 열고 사장 오세창(吳世昌), 부사장 이상협(李相協), 전무 김형원(金炯元) 등 새 경영진을 구성, 발표하였다. 이선근은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이 명단 속에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이 인사는 중도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유는 새로 임명된 주요간부 대다수가 친일경력자라는 것. 이선근도 이 친일경력자 명단 속에 들어 있었다. 과연 이선근은 친일파인가?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서, 어떤 활동을 했기에 역사는 그를 친일파로 기록하는가. 반세기 이전의 만주땅으로 그를 찾아가 보자.

조선일보 정치부장 출신...만주로 간 ‘야망가’ 이선근

이선근은 경기도 개풍(開豊, 현 개성)사람으로 본관은 전주(全州)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데다 일찍 신학문에 눈 떠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1922년)후 이듬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29년 와세다대학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귀국하여 첫 직장으로 『조선일보(朝鮮日報)』에 입사하였다.

당시 나이 24세. 그는 입사 1년 반 만에 최연소 정치부장을 거쳐 이듬해 약관 25세로 국장이 공석인 국장대리로 승진하여 사실상 편집국장이 되었다. 그 시절을 두고 그는 “입사 한 달 만에 사설을 쓰기도 했다”고 자랑한 바 있다. 그의 신문사 생활은 3년 만에 막을 내렸다.

한편 1937년 ‘만주행(滿州行)’으로 그는 인생에서 한 전환기를 맞는다. 이 무렵 만주는 ‘동양(東洋)의 서부’로 불렸다. 만주는 출세욕에 불타는 군인·지식인, 일확천금을 노린 모략자·협잡꾼들이 앞다퉈 모여들던 신(新)개척지였다. 특히 일본인과의 차별대우로 야망을 좌절당한 조선청년들에게 ‘무법지대’ 만주는 오히려 ‘희망의 땅’이었다.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긴 칼 차고 싶어’ 만주로 가서는 군인이 되었고 조선인 일본유학생 상당수는 만주로 가서 고급관리가 되었다. ‘야망가’ 이선근의 ‘만주행’은 당시 시대상황에서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로서는 놀라운 변신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가 만주에서 보낸 8년은 결국 그에게 ‘친일파’란 오명을 남겨주었다.

1940년 9월 21일자 『만선일보(滿鮮日報)』를 보면 이 해 만주국 협화회(協和會)전국연합회(약칭 전련全聯)조선계 대표 16명 중 한 사람으로 이선근이 소개돼 있다. 이선근의 당시 직책은 빈강성(濱江省) 오상현(五常縣) 안가촌(安家村)분회 부(副)분회장.

『조선일보』 퇴직 후 잠시 고향에서 교편을 잡던 이선근은 이 지역 출신 공진항(孔鎭恒, 전 농림부장관, 1900∼1972년) 씨와 의기투합, 1937년 만주로 갔다. 공씨는 개성 백만장자의 아들로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나와 파리와 런던에서 유학한 지식인.

그는 유럽 유학 후 귀국길에 시베리아, 만주를 경유하였는데 이때 만주에 대규모 농장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후에 계획대로 만몽(滿蒙)산업주식회사를 설립, 사장에 취임했다. 이 회사가 조선인 유랑민을 동원, 만주에 개척한 안가(安家)농장은 총면적 7천만 평, 수용가구(家口)만도 4천 가구에 달하는 대규모였다.

만몽산업서 일본군 군량미 지원

지난 94년 이선근의 친일행적 조사차 안가농장 현지를 답사한 구양근 교수(具良根. 성신여대·중문과)는 당시 안가농장의 성격을 두고 “관동군(關東軍)의 군량미 보급기지나 마찬가지였다”고 지적하고는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우창따미(五常大米)’는 지금도 중국 최고의 쌀로 소문나 있다” 밝혔다.

이선근의 친일활동은 그가 만몽산업의 상무이사로 있으면서 관동군의 군량미 충당에 협조한 점이 그 첫째다. 전통적으로 쌀을 주식으로 해온 일본군에게 있어서 쌀농사는 총포(銃砲) 이상 가는 전쟁물자 지원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선근은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친일파들과 어울려 친일대열에 가세한다. 대표적인 친일행적의 하나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활동을 들 수 있다. 1940년 10월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 현 長春)에서 발족된 이 단체는 선비(鮮匪, 조선인 항일세력), 토비(土匪, 만주토착 항일세력) 등 이 지역 항일세력들을 토벌하던 관동군을 측면에서 지원한 조선인 주축의 대표적 친일조직이었다.

당시 만주 건국대 교수로 있던 육당 최남선은 이 단체에서 고문을, 이선근은 협화회 봉천성 대표 서범석(徐範錫. 해방 후 6선의원 지냄) 등과 함께 상무위원을 지냈다. 나중에 그가 만주국의 국회격인 협화회 협의원에 발탁된 것도 이런 공로 때문이었다.

한편 해방 후 이선근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문교장관, 성균관대 총장 등을 거쳐 박정희 정권에 다시 줄을 대는데 여기에는 ‘만주 경력’이 작용한 면이 없지 않다. 박 정권은 만주군관학교와 만주국 관리양성소인 대동학원(大同學院)출신자 등 만주인맥에 권력기반의 한 줄기를 두고 있었다. 박 정권 말기 총리를 지낸 최규하 전 대통령도 대동학원 출신으로 만주국에서 관리를 지냈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이선근은 박 정권하에서 승승장구하였다. 문화재위원장(69년), 영남대 총장(69년), 동국대 총장(74년), 대한교련(敎聯)회장(76년), 초대 정신문화연구원장(76년) 등 교육·문화계의 요직을 거의 독식하였다.

그가 이 같은 초특급 대우를 받은 것은 유신(維新)체제 홍보의 나팔수를 자임한 공로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동국대 총장 취임사 한 구절을 보자.

‘권력의 전위대’ 노릇한 전천후형 인간

“…민족, 국가가 총력을 기울여 추진하고 있는 유신(維新)정신, 새마을정신으로 우리 동대(東大, 동국대)의 발전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동대신문(東大新聞)』, 1974년 7월 30일

그는 대학총장 시절에도 내놓고 유신체제를 선전한 인물이다. 정식으로 ‘유신옹호’ 논문도 쓰고 강연도 여러 차례 나갔다.

박 정권 말기인 78년에 문을 연 정신문화연구원(정문연)은 사실상 그의 주도로 설립됐다. 초창기에는 대만의 ‘중앙연구원’을 모델로 하여 순수 학술연구기관을 만든다고 선전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유신이념의 한국 사상사적 체계화’라는 설립취지 그대로 체제옹호용 기관이었다.

권력자를 향한 그의 ‘아부기질’은 이승만-박정희에 이어 전두환 시대까지 계속됐다. 광주(光州)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시점인 80년 8월. 그는 한 인터뷰에서 “전두환 장군은 위기상황 극복의 최적임자”라고 추켜세우고는 “전두환 장군을 다음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된다는 데 국민의 여망이 모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국민의 의식수준이 높음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지적했다(『서울신문』, 1980년 8월 20일). 지금 그가 살아 있다면 뭐라고 변명을 해댈까.

해방 후 대다수 친일파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역대 정권 때마다 전천후형(全天候型) 인간으로 살다가 생을 마쳤다. 역사학계의 한 중진교수는 “자신의 과거경력을 위장하기 위해 그는 독립운동사와 같은 책을 의도적으로 썼다”며 “그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권력자의 전위대였다”고 혹평했다.

83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과거행적에 대해 단 한 번도 뉘우치거나 사죄한 적이 없다. 오히려 ‘국가유공자’로 지정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묻혔다. 그의 외아들은 우리 나라에서 손꼽히는 원자력공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고, 두 손녀는 모 대학 교수로, 또 모 방송사 어나운서로 각각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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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