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친일진상규명법 제정을 계기로 우리사회에 친일파 논쟁이 뜨겁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 편집국장이 지난 98년부터 1년여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서 연재한 후 단행본으로 묶어펴낸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개마고원 출간)의 내용을 '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형식으로 다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 인촌 김성수와 사이토 조선총독 간에 주고받은 편지. 왼쪽이 인촌이 보낸 편지(1930. 12.30)로, 편지 끝부분에 인촌의 서명이 보인다. 사이토의 답신은 이듬해 1월초에 보낸 것이다. (출처 : 일본 국회도서관)
ⓒ 오마이뉴스

"…이번에 건강이 좋지 않아 조선을 떠나시게 된 것은 정말로 유감스럽습니다. 각하가 조선에 계시는 동안에 여러가지로 후정(厚情)을 입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경성방직회사를 위해 특별한 배려를 받은 것은 감명해 마지않으며 깊이 감사말씀 올립니다. 석별의 정으로 별편(別便)에 조촐하지만 기국(器局)을 하나 보냅니다. 기념으로 받아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나는 작년 겨울 병으로 갑작스레 경성(京城)을 떠나 동경(東京)으로 오게된 바, 의사가 진단하기를 수개월의 정양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총독으로) 재직한 채로 오래 틀어박혀 있는 것은 본의가 아니라고 여겨 사직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병실에서 한가로이 쉬고 있습니다. 병환은 만성 기관지염으로 서두르지 않고 장기간 정양하면 완쾌된다고 하므로 염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번에 간독(懇篤)한 당신의 편지와 기국(器局)을 기증받아 정말로 감사합니다. 후의를 기념하여 오래오래 귀중히 하겠습니다…."


첫 편지는 동아일보 창업주 인촌 김성수(金性洙)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齋藤實)에게 보낸 것이고 두번째 편지는 사이토가 답신으로, 인촌의 편지는 1930년 12월 30일자, 사이토의 답신은 이듬해 1월(일자미상)에 보낸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사이토는 3·1의거 후 하세가와(長谷川好道)에 이어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다가 1929년 다시 제5대 총독으로 부임했던 인물이다. 역대 조선총독 중에서 두 차례나 조선총독을 역임한 자는 그가 유일하다.

'민족지' 사장이 조선총독에게 '안부편지' 보내

첫 부임해서는 소위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오히려 이전의 '무단통치' 때보다도 더 악랄한 고등수법으로 식민통치를 했던 장본인이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민간지가 탄생한 시기는 바로 그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지 얼마 안돼서였다. 인촌의 편지는 '은인' 사이토가 1930년 겨울 병으로 갑자기 총독직을 사퇴하고 도쿄로 건너가자 그의 문병을 겸해서 쓴, 안부편지다.

'민족지' 동아일보의 사주인 인촌이 조선 식민통치의 최고책임자였던 총독에게 보낸 이 편지에는 그가 평소 (사이토) 총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총독으로부터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 동아일보 창업주 인촌 김성수
인촌 김성수는 1891년 전북 고부에서 지주 김경중(金暻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로 입적되어 호적상으로는 김기중의 아들로 돼 있다. 김기중·경중 형제는 인근 일대에서 천석군으로 통하는 부자였는데 그들이 부를 축적한 경위를 두고서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대표적으로 이 두 형제가 벼슬길에 있을 때 관권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했다는 주장도 있고, 심지어는 중국·일본과 밀수를 하여 돈을 모았다는 주장(<다시 쓰는 동아일보사사(史))>, 위기봉)도 있으나 구체적인 자료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집안의 배경을 바탕으로 일찍 신문물에 눈 뜬 인촌은 1914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 이듬해인 약관 25세에 당시 대표적 민간 사립학교인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중앙학회의 부속학교로 당시 경영난에 처해있던 이 학교를 인수한 후 그는 1917년 교장에 취임하였다.

당시 일본 유학생들은 약소국의 실력양성의 두 축으로 교육과 산업을 설정하였는데, 그가 우선 손댄 분야는 교육이었다. 이 해 그는 조선인 중소기업가들이 합자하여 운영하던 경성직뉴(京城織紐)주식회사를 인수, 마침내 산업분야에도 진출하였다.

이듬해 그는 고하 송진우(宋鎭禹)에게 중앙학교 교장자리를 넘기고 사업가로 전신하였다. 3·1의거 직후 그는 회사명을 경성방직(京城紡織)으로 바꾸고는 초대사장에 박영효(朴泳孝)를 영입하였는데, 이는 그가 당대의 거물친일파 박영효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총독부와 조선 내 유지세력들을 사업에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풀이할 수 있다.

이는 동아일보 역시 초대사장에 박영효를 앉혔던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1924년 동생 김연수(金秊洙)가 일본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자 그에게 경영을 맡기고는 그는 일선에서 물러났다.

경성방직 초대사장에 친일파 박영효를 '얼굴마담'으로

한편 인촌이 당시대의 거물로 등장한 사회적·물적 기반은 단연 동아일보였다. 이는 광산거부 계초 방응모가 1932년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무명인사에서 일약 하루아침에 유명인사로 등장한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일제의 민간지 발행허가 계획에 따라 창간된 동아일보는 근본적으로는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했다고는 하나 식민지시대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기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사주인 그의 개량주의 노선은 이같은 동아일보 노선의 사상적 골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민족 차원의 의거로 일컬어지고 있는 3·1의거를 그는 중앙학교 교장시절에 맞았다. 그러나 '민족교육'의 기치를 내걸고 교육사업에 투신한 그가 보인 면모는 딴판이었다. <인촌 김성수>에는 "…단판승부는 자폭행위이며, 운동은 2선·3선으로 이어져야 하고 중앙학교를 살려야 한다는 주위의 강권에 의해 인촌은 2월 27일 고향 줄포로 낙향했다"고 나와 있다.

이는 같은 민간사립학교인 보성학교의 교주 의암 손병희(孫秉熙)와 교장 윤익선(尹益善)이 3·1의거에 가담했다가 체포·투옥된 사실과 정반대되는 사례라고 하겠다. 결국 인촌은 학교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민족적 거사를 외면하면서 동시에 일제와의 정면대립을 교묘하게 피한 셈이다.

3·1의거 직후 그는 전국의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독립운동 자금으로 생각하고 출자하라"며 자금을 모집하여 그 해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했다. 당시 그는 3·1의거 직후 고조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비교적 수월하게 거액의 자금을 모집할 수 있었다. 결국 3·1의거의 방관자였던 그가 3·1의거의 최대의 수혜자가 되었으니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제 당시 인촌은 고향친구 송진우를 앞세워 동아일보를, 와세다 동문인 설산 장덕수(張德秀)를 앞세워 보성전문을, 그리고 친동생 김연수를 앞세워 경성방직 등 기업군을 관리한 '거물기업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는 부를 바탕으로 호남인맥, 와세다인맥 중에서 당대의 최고 엘리트들을 대량으로 휘하에 두고 있었는데 이들이 그 자신의 '악역'의 상당부분을 대리 수행, 즉 '바람막이' 역할을 해줌으로써 그는 역사의 회오리를 대부분 피해갈 수 있었다.

3·1의거 방관자가 3·1의거의 최대의 수혜자로

한편 민족기업, 민족언론, 민족교육을 표방하며 당시로선 '재벌총수'로 등장한 인촌은 1922년 '물산장려운동'을 표방하고 나섰다.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이라며 저변에 민족감정을 깐 이 캐치프레이즈는 근본적으로는 가동을 앞두고 있는 경성방직의 영업정책의 일환이었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끌려온 김연수는 당시 경성방직이 생산한 광목에 태극성마크를 새긴 것을 두고 '민족적'이었다고 항변하였지만 이는 설득력이 약하다. 당시 경성방직의 광목은 생산지만 조선이었을 뿐 사실상 일본제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선 방직기계는 총독부의 후원과 일본계 은행들의 금융지원을 받아 일본제 도요다(豊田)방직기계를 들여온 것이었고, 원사(原絲)는 오사카(大阪)의 야기(八木)상회에서 장기계약으로 공급받은 것이었으니 경성방직의 광목은 단지 조선 사람들의 노동력을 빌린 데 불과한 것이었다.(<다시 쓰는 동아일보사사(史)>)

'민족지'에 내걸린 '친일 구호' 서울 광화문 네거리 소재 <동아일보> 사옥(현 일민미술관)에 '보도보국(報道報國)' '내선일체(內鮮一體)' 구호가 내걸려 있다. 촬영 시기는 1930년대 후반이나 1940년경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를 위해 인촌은 일본의 광고주들에게 금강산 관광·기생관광 등의 향응을 베풀기도 하였다. 일본인 기생관광의 뿌리가 '민족지' 동아일보에서 비롯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한 언론학자는 당시 동아일보는 '민족지'를 표방한 채 계열기업의 선전지 역할을 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혹평한 바 있다.

한편 물산장려운동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그는 1924년 자치운동의 일환으로 '연정회(硏政會)'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는 소위 '민족개량주의' 혹은 '실력양성론'이라는 미명하에 일제의 '문화정치'에 발맞춰 일제와의 타협 속에 추진된 것으로, 비타협 민족세력의 반발로 중단되고 말았다.

이 무렵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쓴 '민족적 경륜'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재등실일기」에 따르면 이 무렵 인촌과 그의 오른팔격인 송진우는 월 1회꼴로 사이토 총독을 만난 것으로 나와 있다. 연정회 설립과 관련, 이들과 총독부 측과의 사전교감은 물론 총독부 측의 내락이 있었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1926년 그는 '연정회 부활운동'을 다시 전개하였으나 이는 도리어 민족주의자들의 단결을 촉진하는 계기가 돼 이듬해(1927년) 좌우합작 민족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다. 그는 송진우를 앞세워 신간회를 주도하고자 했으나 사회주의 민족세력의 반발로 신간회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였다.

동아일보는 일본인 '기생관광'의 원조격

일제하 그가 민족주의자였는지 어떤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하나 있다. 흔히 동아일보가 '민족지' 운운하면서 단골로 내세우는 메뉴가 1936년에 발생한 '일장기 말소사건'이다. 우선 이 사건은 동아일보사 차원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당시 체육부 이길용 기자 개인의 애국심에서 비롯한 것임을 먼저 밝혀둔다.

"…급히 동아일보사로 오는 자동차 속에서 인촌은 히노마루(일장기)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리는 데서 오는 쾌(快)와 동아일보가 정간되거나 영영 문을 닫게 되는 데서 나는 실(失)을 생각하여 그 답은 분명했다…" ―<인촌 김성수>

이 사건을 처음 접한 인촌의 태도는 이랬다. 또 당시 사장 송진우는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다"며 주인공 이길용 기자를 사장실에 불러놓고 크게 꾸짖었다. 당시 총독부와 밀월관계에 있던 동아일보에 이런 불경스런 사태가 발생했으니 두 사람이 펄펄 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처사였는지도 모른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일장기 말소는 동아일보에 앞서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에서 먼저 행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조선중앙일보가 동아일보 지면을 모방하여 일장기를 말소한 것처럼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다(<인촌 김성수전>). 따라서 이 사건을 동아일보의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사건 이후 김성수가 한 것은 이에 관련된 10여 명의 기자들을 해고시킨 일이었다.

1937년 7월 7일 발발한 중일전쟁을 고비로 일제의 전시체제 강화와 함께 국내 지식인 계층의 대량 변절이 시작되었다. 인촌 역시 '시국강연' 연사로 참여하면서 노골적으로 친일대열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6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40년에는 이 단체의 후신인 국민총력연맹의 이사로 참여하였으며, 흥아보국단과 임전대책협의회의 통합단체인 임전보국단의 감사로 참여하였다.

인촌 "일장기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 관련 기자 10여명 해고

이 단체들은 모두 전시협력단체로 조선내 물자·인력동원의 첨병역할을 한 단체였다. 결국 그는 징병·학병 동원과 관련, 수 편의 친일논설을 남겼다. 인촌기념회가 발행한 <김성수전(傳)>은 당시 인촌이 쓴 글들은 모두 <매일신보>가 조작해서 썼다고 강변하고 있지만 납득하기 힘들다. 그동안의 그의 행위로 보면 사정이야 어쨌든 그가 직접 썼거나 아니면 그 같은 글을 묵인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의 동생 김연수는 형을 대신해 경방을 경영하면서 만주국 명예총영사, 중추원참의 등을 지냈다. 만주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그로서 이 같은 감투를 제의한 총독부의 요구를 거절하기도 힘들었겠지만 이 때문에 사업에 도움이 됐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씨 집안의 영향력은 아직도 '민족지' <동아일보>, '민족사학' 고려대학교, 삼양사 등의 거대세력으로 건재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청산하지 못한 역사>에서 김성수만 필자명이 없는 것도 그 한 증표일 것이다.

김성수, 건국훈장 2등급 서훈...'치탈' 목소리 높아
서대문형무소서 순국한 류관순 열사 '3등급'보다 높아

지난 93년 7월 8일 국가보훈처는 역대 독립유공 서훈자 가운데 친일의 흠결이 있는 자는 가려내 서훈을 취소하겠다며 대상인물로 8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8명 가운데는 '민족지' 동아일보를 창간, 경영한 공로로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은 인촌 김성수도 포함돼 있었다. 김성수가 받은 건국훈장의 훈격은 3.1의거 당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 순국한 류관순 열사의 3등급보다도 한 등급이 높은 것이다.

당시 보훈처의 이같은 방침에 대해 대다수의 신문들은 적극 환영의사를 표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이틀 뒤인 7월 10일자에서 '친일혐의 독립유공자 명단 근거 없이 작성 유출' 제하의 기사를 통해 보훈처를 비판하고 나섰다. 창간 이래로 '민족지'를 자임해온 동아가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려는 보훈처를 공박하고 나선 것은 창업주가 대상자에 포함된데 대한 '불만'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논란 끝에 지난 96년 국가보훈처는 가짜나 친일혐의가 있는 독립유공자 5명에 대해 서훈이 취소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속에 김성수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당시 민족운동 진영에서는 보훈처가 동아 눈치를 본 결과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는 "친일혐의가 분명한 인촌에게 주어진 건국훈장을 치탈해야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태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