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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진상규명법 제정을 계기로 우리사회에 친일파 논쟁이 뜨겁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 편집국장이 지난 98년부터 1년여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서 연재한 후 단행본으로 묶어펴낸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개마고원 출간)의 내용을 '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형식으로 다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 <조선일보> 전 사주 계초 방응모
일제당시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오늘날 신문재벌 방씨 일가의 중시조로 일컬어지고 있는 계초 방응모의 행적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우선 그가 조선일보 경영에 참여하기 이전까지는 거의 무명인사였던데다 또 6·25전쟁 때 납북된 이후로는 활동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실지로 그가 사회 저명인사로 활동한 기간은 1933년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1950년 납북될 때까지 불과 17년 정도다. 그러나 일제 당시 그는 양대 민간지의 하나였던 조선일보의 사주이자 손꼽히는 자산가 중의 한 사람이었으니 그가 우리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계초(啓礎) 방응모(方應謨). 그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그는 과연 일제하에서 '민족지' 조선일보를 중흥시킨 '민족언론'의 공로자인가, 아니면 '민족지' 간판 아래 일제와 결탁, 오늘의 족벌신문 조선일보를 키운 반민족 기업인인가.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처럼 정반대로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자들은 그가 일제 당시 행한 친일행각과 그가 사주로 있던 조선일보의 친일성을 들어 부정적인 쪽으로 무게를 싣는 것이 보통이다. 그의 이력을 통해 그의 삶을 추적해보자.

민족언론 공로자인가, 반민족 기업인인가

방응모는 1883년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방계준(方啓畯)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해 1월에는 인천항이 개항되었고, 우리 언론사로 보면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가 창간된 해다. 가난 때문에 신학문을 배우지 못한 그는 서당을 다녔는데 12세 때 서당훈장이 그를 접장으로 삼아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을 정도로 총명했다고 그의 손자 방우영(方又榮) 조선일보 회장은 <조선일보 사보>에 쓴 바 있다.

그가 처음으로 사업다운 일을 시작한 것은 1923년 나이 40이 되던 해에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인수, 운영하면서부터다. 그러나 워낙 소자본으로 시작한데다 수금사정이 여의치 않아 온갖 고통을 겪었는데 이때 당한 수모(가산차압)와 시련이 훗날 그가 조선일보를 인수케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주장도 있다.

결국 그는 2년 만에 이 일을 그만두고 새 사업을 물색하다가 이때 손댄 것이 바로 광산사업이었다. 그는 집문서를 저당잡혀 마련한 돈으로 초창기 덕대(德代)생활부터 시작하였다. '덕대'란 남의 광산을 도급맡아 일정한 금액을 내고 채광하는 방식으로 주로 영세업자들이 흔히 광산사업을 시작하던 방식이었다.

그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였다. 마침내 그는 금맥을 발견하였다. 그는 '전세살이' 덕대생활을 청산하고 금광을 매수하여 교동(橋洞)광업소라 이름짓고는 본격적으로 사업을 키워나갔다. 한 연구서에 의하면 한창 사업이 번성하던 1931년 당시 교동광업소는 국내 5대광산 반열에 올라 있었으며 노동자 수가 1천1백 명에 달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광산재벌' 방응모는 이렇게 탄생된 것이다.

한편 1932년 그는 당시 한창 성업중이던 교동광업소를 135만 원을 받고 일본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하였다. 그가 이 시점에서 광산을 매각한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광산업을 시작한지 7년 만에 그는 적수공권에서 일약 '조선반도 제일의 거부'로 변신하였다.

적수공권에서 일약 '조선반도 제일의 거부'로 변신

그 해 연말 그는 광산매각 계약금을 받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당시 조선일보 사장 고당 조만식(曺晩植)을 만났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고당으로부터 <조선> 인수를 권유받았다. 당시 조선일보는 경영악화로 타개책을 찾고 있던 중이었는데 고당은 새 물주로 그를 지목했던 것이다. 결국 방응모가 조선일보와 인연을 맺은 것은 노다지로 축적한 자본을 바탕으로 고당의 권유를 받은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듬해 1933년 1월 그는 자본금 20만 원을 일시금으로 불입하고 '주식회사 조선일보'의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다시 3월에는 정식으로 경영권을 인수하여 그 자신이 부사장에 취임하였다. 사내 분위기 쇄신을 위해 그는 1차로 이왕직(李王職) 소유의 태평로 1가 부지 1천4백 평을 12만원에 사들여 인근 일대에서 가장 고층인 4층 건물의 사옥 신축에 착수하였다.

▲ 지난 2002년 1월30일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조선일보 반민족 반통일 민간법정'에서 방응모 전 사장의 장남 방재선 씨가 증인으로 출두해 부친의 친일행위에 대해 사죄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이어 4월 26일자로 혁신호 1백만 부를 제작, 전국에 무료로 배포하였는데 당시로선 파격적인 것이었다. 특히 그는 동아일보의 이광수(李光洙)와 서춘(徐椿)을 부사장과 주필로 영입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그와 동향 출신인이었다.

이밖에 그는 활자제작과 윤전기 구입 등 시설투자에 50만 원을 들여 회사를 재정비하고는 7월에 사장에 취임, 마침내 '방응모 체제'가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광산재벌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하루아침에 저명인사로 등장하게 된 과정은 대충 이렇다.

한편 그가 '기업인 방응모'의 면모를 과시하기 시작한 것은 광산매각 대금 중 조선일보 인수비용으로 지출되고 남은 돈으로 사업다각화를 시작한 점이다. 그는 조선일보 인수 2년 뒤인 1935년 경기도 수원에 97만 평 규모의 간척사업을 추진하였는데 여기에 소요된 금액은 조선일보 인수비용과 동일한 50만 원이었다.

또 이듬해에는 함경남도 영흥 일대에 무려 3천2백만 평 규모의 조림사업을 벌였는데 이는 장차 신문용지 확보가 주목적이었다고 한다. 본지 이외에 자매지로 종합월간지 <조광(朝光)>, 여성지 <여성>, 소년월간지 <소년> 등이 창간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재력을 바탕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은 기업가의 기본적인 생리라고는 하나 재벌의 언론사 경영은 이미 이 당시 조선일보의 사례에서도 극명히 드러나고 있다.

방응모의 친일은 '기득권 유지'에서 기인

계초 방응모가 친일행각을 시작한 것은 비단 당시의 시국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친일은 조선일보를 비롯한 각종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총독부와의 '거래'가 불가피했고 여기에 중일전쟁 이후 일제당국의 압력이 가중되어 증폭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친일은 흔히 '먹고살기 위해서' 친일을 했다는 변명과는 사안이 다르다. 한마디로 그의 친일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였다.

특히 당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신문의 사주였던 그의 친일은 그가 소유하고 있던 신문의 논조에 영향을 줌으로써 여타 친일파들과는 또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2차대전 후 드골 정부가 나치정권에 협조한 언론인을 숙청하면서 언론사 사주에 대해 가혹한 처단을 내린 것은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동안 그의 친일행각은 조선일보의 '민족지' 간판에 가려 거의 축소, 은폐돼왔던 것이 사실이다. 90년대 이후 친일파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더러 공개되긴 했지만 아직도 소상히 조사된 것은 아니다. 30년대 후반 이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그의 주요 친일행적을 더듬어보자.

그의 친일행각은 크게 두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중일전쟁 이후 생겨난 각종 친일단체에 참여하여 일제통치와 군국주의를 찬양한 대목과 또 조선일보 폐간 후 자매지 <조광>을 통해 친일논설을 직접 쓰거나 발행을 주도한 점이다.

그가 공개적으로 친일활동을 시작한 것은 중일전쟁 개전 이듬해인 1938년 6월 당시 총독부가 결성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부터다. 이 단체는 조선문예회, 조선방송협회 등 59개 단체와 김활란(金活蘭), 김성수(金性洙) 등 개인 56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일제의 황민화 정책과 전시체제 구축을 적극 홍보한 단체다.

9월에는 다시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白寬洙) 등과 함께 총독부가 결성한 제2차 전선(前線)순회 시국강연반에 동원돼 '조선명사59인 각도(道) 순회강연'을 다니며 일제의 침략전쟁에 전국민의 동참을 호소했다.

각종 친일단체서 활동... 전비 조달위한 채권 판매도 나서

▲ 방응모가 황국주의 지식인 일본인 덕부소봉에게 보낸 신년 연하편지(1938.2월초) 그는 이 편지에서 "천리나 떨어져 있지만 같은 바람 속에 있다"고 친근감을 표시한 뒤 "그 사이에 뜻밖의 보살핌을 내려주셔서 위로가 된다"고 썼다.
ⓒ 오마이뉴스
중일전쟁이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일제는 전쟁물자와 병력동원을 위한 전시총력체제를 구축하였다. 1941년 친일잡지 <삼천리> 사장 김동환(金東煥)의 발기로 전시보국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가 결성되었다. 그는 이 단체의 위원 35명 중 1인으로 참여하여 종로 화신(和信) 앞에서 김동환, 이광수, 모윤숙(毛允淑),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전비(戰費) 조달을 위한 채권가두유격에 나서기도 했다.

다시 10월 들어 친일단체의 총집결장인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되자 그는 다시 이 단체의 이사로 참여하였다. 이밖에 그는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사재를 털어 고사포를 기증하기도 하고, 특히 그는 비행사 신용욱(愼鏞頊)을 중심으로 중추원참의 고원훈(高元勳), 경방 사장 김연수(金秊洙) 등이 1천만 원을 투자하여 설립한, 당시로서는 조선 내 유일무이한 전쟁조력회사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의 중역으로 피선되기도 했다.

한편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그는 자매지 <조광>을 본격적인 친일잡지로 개편하고는 그 자신이 직접 친일논설을 기고하는 등 친일행각을 멈추지 않았다.

<조광> 1940년 10월호 권두언('조광사 혁신의 사(辭)')에서 그는 사내 기구 혁신을 밝히고는 다음호인 창간5주년 기념호의 권두언에서 "이와 같은 역사적 대 변전기에 처하여 본지는 그때 그때 본지에 허여(許與)된 직책을 다하기에 미력을 다하여 왔다"고 자찬하고는 "안으로는 신체제 확립과 밖으로는 혁신 외교정책을 강행하여 동아 신질서 건설을 완성시켜 나가는 데 일단의 노력을 더할 것"을 다짐하였다.

중일전쟁 3주년 기념호(1940년 7월호)에서는 "우리 총후(銃後)국민은 더욱 노력하여 이 성전(聖戰)의 결과가 완수되기까지 은인자중, 멸사봉공의 희생적 정신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며 총독부를 대신해 전쟁협조를 독려하고 있다. 40년대 들어 <조광>은 한글잡지임에도 불구하고 일문(日文)기사를 게재하는 등 극렬한 친일잡지로 변해 있었다.

권두언 이외에 그가 <조광>에 쓴 친일논설로는 42년 2월호에 '타도 동양의 원구자(怨仇者)'라는 글이 있다. 이 글은 태평양전쟁 개전 직후에 쓴 것으로 그는 "이번 대동아전쟁은 그들(미국)에게서 동아(東亞)를 이탈하여 공영권을 건설하고 세계의 평화를 도모하려는 것은 물론이지만 일편으로 보면 참아오던 원한 폭발이라고도 할 것이다"며 미국은 원수로, 일본은 평화의 사도로 묘사하고 있다.

현대사의 주역들 인물평가 대부분 '긍정'에 치우쳐

그는 이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을 주장하고 아울러 국민개로(皆勞)운동, 물자절약, 저축강화 등을 촉구하고 있다. 그가 이 글에서 내린 결론은 "어떻든 반도민중은 이 때에 심혈총력을 경주, 물력(物力)과 심혈을 총 경주하여 국책에 협력하자"는 것이었다.

일제가 황민화정책을 추진하면서 내건 시책 중의 하나는 국어상용(國語常用)이었다. 여기서 국어는 당연히 일본어를 말한다. 44년 당시 통계로 보면, 조선 내에서 일어해독자는 3백20만 명 정도로 전체인구의 26%였다.

이와 관련 <조광>은 '국어를 상용합시다'라는 권두언(44. 8월호)을 통해 "영문(營門)을 들어서는 징병자와 내지(內地)의 노무자들이 국어를 해득치 못하는 데서 오는 곤란은 상상 이상일 것"이라고 지적하고는 대만의 일어해독자 6할에 비하면 이는 훨씬 뒤떨어지는 것이라고 개탄해 했다.

이같은 주장은 친일어용지 <매일신보> <경성일보> 등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창간 초기 문화·예술분야에서 어느 정도 공로가 있었다고는 하나 <조선일보> 폐간 후 <조광>은 대를 이어 친일보도를 한 셈이다.

일제 식민지시대와 해방정국의 격동기를 살아오면서 우리 현대사의 주역들은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살아왔다. 그들의 삶의 진면목을 보기 위해서는 이 모두를 균형 있게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동안 대부분의 역사인물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면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계초 방응모 역시 마찬가지다.

일제하 그의 친일행적은 그가 발행한 매체 곳곳에 잘 기록돼 있다. 그러나 80년에 간행된 그의 전기(<계초 방응모>)의 서문 첫 줄은 "암흑기의 민족에게 언론의 횃불을 밝혀 민족의 길을 비추었던 선구자"로 시작하고 있다. 과연 몇 사람이나 이를 수긍할지 자못 궁금할 따름이다.

"조선군사령관 저녁초대에 갔다와서 고사포 기부..."
<삼천리> 보도에 나타난 방응모의 사교 행각

방응모의 친일행각은 그가 <조선일보>를 인수, 경영을 시작한 직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파인 김동환이 창간한 <삼천리>(1934년 4월호)에 게재된 '신문사 사장의 하루-방응모씨'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저녁이면 사교관계로 명월관, 식도원(食道園)으로 돌아다니며 재벌과 대관(大官)집을 찾기도 하고…천도(川島) 군사령관의 저녁초대를 받고 갔다가 돌아와서는 고사포도 기부하고…"

명월관과 식도원은 당시 경성(현 서울)시내에서 가장 호화로운 음식점으로 거부나 고관들이 가끔씩 찾는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사교를 하면서 조선군사령관의 저녁초대를 받고 갔다 와서는 전쟁 물자인 고사포를 기부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 기사에는 특히 이런 대목도 있다.

"…비록 신문 지면은 일시적으로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좋으니 오직 오래오래 (경영)하도록 지구방책(持久方策)을 세우는 데 전력한다…"

이는 그의 경영관의 일면을 보여준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조선일보>를 '민족지'로 키우기보다는 순전히 사업의 도구로만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1940년 8월 <조선>이 문을 닫은 후 자매지 <조광>에 그가 쓴 글이 몇 편 실려있긴 하나 그를 언론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언론사를 경영하면서도 전형적인 '장삿꾼'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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