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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인들의 식탁 대화의 최대 화젯거리는 지난달 25일 개봉돼 첫 주 박스 오피스 1위를 기록하고 현재까지 인기가 줄지 않고 있는 마이클 무어 제작의 다큐멘터리 <화씨 9/11>이다.

기자가 잘 알고 있는 미국 패션잡지사의 편집장인 프랭크 리타(41)는 며칠 전 기자에게 "'화씨 9/11'을 보았느냐"고 묻고는 자신은 11세 된 딸과 장인 장모를 포함한 전 가족이 함께 보았다면서 "장모는 영화를 보면서 웃다가 울다가 했다"고 전했다.

열렬한 케리 지지자이자 '부시 헤이터'인 그는 '화씨 9/11'을 가리켜 "금세기 최고의 정치 코미디"라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고는 "아마도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앞으로 부시나 월포위츠(국방차관)가 TV 화면에 비치면 웃음부터 터뜨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개봉 첫날인 지난 6월 25일 미국 개봉관에서 '화씨 9/11'을 보고 나서 며칠 전 다시 그 영화를 보았다. '화씨 9/11'에는 기자의 친구로 하여금 자다가 말고 일어나 앉아 웃게 할 정도로 기막힌 장면들이 등장한다.

다큐멘터리를 이렇게 웃기게 만든 마이클 무어는 천재다. 현재의 미국이라는 나라와, 정치지도자를 포함한 미국인의 실체를 이보다 더 유쾌하게 까발린 영화가 또 있을 것인가.

도대체 어떤 장면들이 이 영화를 그렇게 웃기고, 심지어 울리기까지 했을까. 대표적인 몇 개의 '웃기는' 장면들을 간추려 본다.

▲ <화씨 9/11>의 한 장면

웃기는 장면 1: 부시 집단의 화장 장면

웃기는 장면 1호는 단연 부시를 비롯한 럼스펠드, 월포위츠, 파월 등 부시행정부 주요 인물들의 화장(化粧) 장면들이다. 무어는 부시가 TV연설을 앞두고 코미디언 같은 표정으로 힐끗 흘끗 곁눈질를 한다거나 월포위츠가 머리 빗에 침을 탁탁 뱉어 머리 손질을 하는 장면들을 절묘한 컷으로 클로즈업시켜 관중들의 폭소를 자아낸다.

무어의 천재성은 바로 이것이다. 그가 심각해야 할 영화에 이처럼 코믹스러운 화장 장면을 집어넣은 의도는 처음부터 분명하다. 그는 부시를 비롯한 미국의 지도자 그룹들이란 애당초 '하나님의 메신저', '전시 지도자'로 '애국자'로 포장되어진 인물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다.

'화씨 9/11'에 나오는 부시와 주변 인물의 웃기는 장면들은 국가적 이익, 애국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강자의 폭력에 대한 해학적 까발림이다.

웃기는 장면 2: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껌 씹는 장면

무어의 이러한 해학적 까발림은 정치 지도자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무어는 영화 중간부분에서 현재 미국 젊은이들의 우상 중 하나인 여자 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인터뷰 장면을 담아낸다.

인터뷰어가 브리트니 스피어스에게 부시의 이라크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다리를 꼰 채 아무 생각 없는 듯한 표정으로 껌을 짝짝 씹으며 이렇게 말한다.
"부시는 우리의 대통령이고, 우리는 그를 믿고 따라야 한다."

관객석에서는 이 장면에 신음소리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묘한 웃음소리가 낮게 흘러나오다 이내 쑥 들어 들어간다. 이 인터뷰는 바로 이들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이들 중 90%는 부시의 이라크 전을 열렬히 지지하지 않았던가?

웃기는 장면 3: 마더 ××, 마더 ××

영화는 3분의 1정도 진행되면서 이라크전으로 화면이 옮겨진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되고 캐럴송이 불려지는 가운데 출동한 새파란 나이의 병사들이 탱크 위에서 '폭도들'을 향해 '드르르륵 따콩' '드르르륵 따콩' 사격을 가한다.

이들은 귀에 헤드폰을 끼고 느린 듯 기묘한 곡조의 음악을 들으면서 총질을 해대는데 이 음악의 노랫말은 '마~더 ××, 마~더 ××'로 도배되어 있다. 엄청난 화력의 총질 소리에 겹쳐지며 '마~더 ××' 노랫말이 극장을 뒤흔들 만큼 귓전을 때린다. 노랫말이 제법 길게 이어지며 관객석에서 어색한 킥킥거림이 간간이 들려온다.

무어는 생명의 가치에 대해 무감각한 이들의 총질 장면에 상스럽기 그지없는 노랫말을 얹어 놓아 '개떡같은 전쟁'에 아까운 젊은이들이 동원되고 있다는 외마디 부르짖음을 내뱉은 것이다.

▲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의 한 장면

웃기는 장면 4: "자, 내 드라이브 샷 솜씨 좀 보시지!"

영화는 9·11테러가 발생한 후 대 테러전에 골몰하던 와중에 텍사스 별장에서 골프 연습을 하고 있던 부시에게 기자들이 몰려가 인터뷰하는 장면을 잡아낸다. 기자들이 막 골프스윙을 하려는 부시에게 테러에 대한 대책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전시 대통령' 부시의 대답을 들어보라.

"(진지한 듯한 표정으로) 나는 이 테러리스트 킬러들을 억제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기 위해 전 세계 모든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땡~큐! (표정을 바꾸며) 자, 내 드라이브 샷 솜씨나 좀 보시지!"

방금 엄청난 테러를 당한 나라 지도자의 말이라고 여기기에는 참으로 막연하고 성의 없는 답변이다. 전쟁은 전쟁이고, 골프는 골프다. 너희는 전쟁하고 나는 골프를 친다.

관객들은 부시의 멋진 드라이브 샷에 '나이스 샷!'을 외치는 대신 '우~' 소리를 내며 야유를 퍼부었다. 영화는 부시는 9·11이 일어나기 전에 그의 일과의 42%를 개인 취미생활로 보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어의 유머 감각은 부시의 '단독 플레이'식 지도력의 허황함과 무책임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웃기는 장면 5: 30개국의 동맹군들?

부시가 테러리스트들을 잡기 위해 모든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모은 나라는 30여 개국이다. 무어는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동맹국들이 미국의 들러리, 아니 부시의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요절복통할 정도의 화면과 자문 자답식 내레이션으로 표현해 낸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동맹국? 흐음~ 아프가니스탄. (터번을 쓴 맨발의 아프간 군대에 이어 아프간 사막에서 싸우는 미군을 등장시키며) 거기에는 미군밖에 없다. 흐음~모로코? (모로코 길거리의 남루한 옷차림의 원주민들과 원시적인 탈것을 보여준 다음, 숲 속에서 원숭이떼들이 우르르 때지어 몰려가는 장면 등을 보여주며) 이 동맹국과 함께 전쟁을 치르겠다고?"

부시의 이라크전이 얼마나 '미국의, 미국을 위한, 미국에 의한' 전쟁인지를 이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을까.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위상이 얼마나 형편없는가를 기막히게 잘 표현한 장면이다.

마이클 무어가 한국을 거론했더라면 무어라고 했을까? 흐음~한국?….

웃기는 장면 6: "당신 아들 이라크에 보내지 않을래?

영화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무어는 부시의 이라크 침공 공범자인 국회의원들의 '껍질 벗기기'에 도전한다.

무어는 존 코니어스 하원의원(민주당·미시간주)을 만나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애국법'이 어떻게 의회에서 통과되었는지에 대해 질문했는데 그의 답변은 이렇다.

"아들 같은 친구, 잠깐 자리에 앉게나. 사실 우리는 (국회에 상정되는) 법안들의 대부분을 읽지도 않는다네!"

▲ <화씨 9/11>에 등장한 마이클 무어 감독
이제 무어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국회 의사당 앞으로 간다. 그리고는 이동식 아이스크림 트럭을 빌려 타고 '디동~댕댕' '디동~댕댕' 어린이 음악을 틀어 놓은 채 의사당 앞을 터덜터덜 돌며 애국법안을 큰 소리로 읽어댄다. 여러분들이 읽지 않은 것을 내가 대신 읽어주마! 이런 식이다.

무어는 급기야 의사당 건물 앞으로 진출한다. 그는 이라크전에 찬성했던 테네시 출신 의원을 비롯, 출근하는 의원들을 붙들어 세워놓고 입대지원서를 내밀며 "당신 아들을 군대에 보내라"고 요구한다. 모두가 손을 내저으며 잰걸음으로 달아난다. 관객석에서는 요절복통 웃음소리가 요동친다.

웃기는 장면 7: "또 속으면, 속는 사람이 부끄러워 해야"

무어는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관객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을 속 시원히 털어놓는다.

'화씨 9/11'은 시작하자마자 지난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앨 고어가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민들이 '플로리다 소동'의 와중에 부시에 속아넘어가 대통령 자리를 헌납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으로는 부시에 속아서 이라크 침공에 찬성해 온 미국민들을 조롱한다.

이제 마지막 장면에서 무어는 '부시다운' 부시의 인터뷰 내용을 집어넣었다.

"테네시의 옛 격언이 있다… 내가 알기로는 텍사스의 격언… 아마도 테네시 격언인 것 같은데. (어쨌든) 그 격언은 처음 속임을 당하면, 속인 사람이 부끄러운 짓을 한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또 속는다면, 속은 사람이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시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격언이 테네시 격언인지 텍사스 격언인지도(사실은 미국사회의 일반화된 격언)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더구나 이 말이 바로 자신을 두고 한 말로 역 사용될 줄 어찌 알았으랴. 무어의 의도는 분명하다. 선거에서도 속았고 이라크전도 속았다. 이제 다시는 속지 말자. 이것이다.

깊게 웃기는 무어의 내레이션

무어의 '화씨 9/11'에서 웃기는 장면들 외에 두고두고 여운을 남기며 웃게 할 대목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그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의 내레이션이다. 무어는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내레이터(해설가)를 맡아 영화 전체를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 간다.

사실 푸줏간 아저씨나 공사판 잡부 같은 인상의 무어 목소리는 전혀 선동적이지 않다. 보는 사람의 감정을 요동치게 하는 영화의 장면들과는 달리 오히려 그의 목소리 톤은 높낮이 없이 매우 차분하고 잔잔하다. 그러나 몇몇 장면의 끼어들기식 해설에서 그의 목소리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

▲ <화씨 9/11>의 한 장면
가령 사우디 대사가 TV토크쇼에서 빈 라덴의 인상에 대해 "He is so quiet and simple"(그는 매우 조용하고 단순하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무어는 짬도 주지 않고 "Hum~, quiet and simple?"이라고 부드러운 톤으로 끼어들기식 해설을 감행한다.

영화는 곧바로 부시가 플로리다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보좌관으로부터 쌍둥이 빌딩 테러 공격을 받고 멍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부시와 빈라덴이 닮았다는 것인가? 이러한 끼어들기식 해설은 이외에도 '동맹군들' 화면, 빈 라덴가와 부시가의 커넥션 장면 등에서도 등장해 속웃음을 선사한다.

'화씨 9/11'은 왜 슬픈 영화인가

무어는 영화 개봉 후 가진 한 기자회견에서 "내가 만들려 했던 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청중들이 좋아할 유쾌한 영화였다"면서 "주역 배우들인 부시와 럼스펠드, 월포위츠 등에 감사한다"며 익살을 떨었다.

▲ 지난 6일 뉴욕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마이클 무어 감독이 미국 내외신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김경미
아무리 봐도 '화씨 9/11'은 보기 드문 해학적 터치의 유쾌한 영화다. 훌륭한 배우들의 살아 있는 연기에 청중들은 포복절도할 정도로 웃고 박수를 쳤다. 그러나 '화씨 9/11'은 표피적 즐거움에 목적을 둔 영화는 절대 아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이 말한 것처럼, '화씨 9/11'은 미국의 언론매체들이 하지 못한 '공공 서비스'를 멋지게 해냈다.

무어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미국인들)은 아마도 우주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들일 것이다…. 공모와 속임수와 잘난 체하는 악동들에 매여 산다는 면에서. 우리 미국민들은 강요된 무지로부터 고통받고 있다. 우리는 우리나라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무지하다. 우리의 어리석음은 정말 우리 스스로를 당혹스럽게 한다."

무어는 '화씨 9/11'을 통해서 미국인들에게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무어는 이 영화를 통해 미국민들에게 진실을 알게 하고 느끼게 하고 싶어했다.

'화씨 9/11'은 부시를 비롯한 미국 정치인들의 진면목을 발견케 한 영화다. 나아가 9·11테러로 야기된 분노의 폭풍 속에서 통째로 속아넘어간 미국인들 자신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발견케 한 영화다.

하여 '화씨 9/11'은 미국민들을 한참 웃게 하다 슬프게 하는 영화다. 슬픈 장면들 때문뿐 아니라 '지구상에서 가장 웃기는 지도자를 둔 웃기는 국민들'이 자신들인 것을 알게 되어 슬픈 것이다. 잡지사 편집장의 장모가 웃다가 울다가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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