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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땅을 미치도록 사랑한 김정호에 의해 그려진 대동여지도에는 그 혼신의 힘이 묻어난다. 수십 개의 판각을 직접 하나 하나 끌을 들고 정을 세워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김정호는 아마도 국토사랑의 마음이 가장 컸으리라.
조선이라는 국가는 대한민국의 뿌리입니다. 그러나 조선은 우리에게 너무나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왜일까요?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일진데, 세계적으로도 500년의 단일왕조를 지켜낸 나라가 극히 드문데 어찌 그리 멀고 먼 역사 속의 나라가 되어 버린 것일까요?

일제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고, 처절한 이념 대립으로 강대국에 의해 반 토막으로 들어선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은 과연 조선이라는 나라를 기억하고 있을까요? 조선의 역사에 다가서면 설수록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리 속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허나 여기 조선 무인이자 협객인 ‘백동수’를 통해 잃어버린 조선의 무혼을 되새기며 대한민국의 너무나도 오래된 미래를 읽어보고자 합니다...<필자 주>


의협심이 강한 선비 ‘조선의 협객 백동수’

<조선의 협객 백동수>(푸른역사·2002)를 읽다보면 18세기 조선의 걸출한 위인들을 모두 만날 수 있다. 과거 역사시간에만 들어보았던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 성대중 등 이들 모두는 백동수와 긴밀한 관계로 처남, 매부 지간 혹은 지극한 벗으로 이 책에서 역사 밖으로 당당히 뛰쳐나온다.

▲ <조선의 협객 백동수>에는 조선 최고의 협객이자 무인인 백동수의 생애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오늘 한번 조선의 무인 백동수를 뜨거운 가슴으로 느껴보자!
중국 사기(史記)의 저자인 사마천은 ‘협객이란 사회 규범에서 벗어난 행동을 보이면서도 약속과 의리를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의 협객의 의미는 저자의 말처럼 ‘의로운 선비’ 다시 말해 문무를 겸비하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사람으로서의 진정한 도리를 지키는 사람을 협객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백동수를 당당히 ‘협객’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성해응이 남긴 글에서 협객의 면모를 짚어 볼 수 있다.

“영숙(백동수)의 집안은 본디 넉넉했지만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기를 좋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가업은 흩어지고 기울었지만 베풀어줌을 그치지 않았다.”

이처럼 백동수는 나눔의 아름다움을 몸으로 실천한 조선의 협객이었다. 저자인 김영호는 정통학계의 인물이 아니면서도 십여년의 무예수련으로 다듬어진 집중력으로 18세기 조선의 역사를 멋지게 풀어놓았다.

책이 출판된 후 실제로 <조선의 협객 백동수>를 읽은 사학관련 학자들 또한 그의 글을 읽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저자인 김영호는 오직 우직한 발걸음 하나로 장장 7년의 세월동안 백동수라는 인물을 추적하였고, 그에 관한 작은 단서를 찾기 위해 18세기에 출간된 거의 모든 문집과 자료들을 섭렵하여 조선의 무인이자 협객인 야뇌 백동수의 전기를 그림처럼 그려 놓았다.

▲ <무예도보통지>에는 이름처럼 무예에 대한 그림과 설명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특히 다른 그림의 경우 젊은 무관의 얼굴이 주를 이루는데, 마상월도와 격구에서는 수염을 근사하게 기른 장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무예도보통지 편찬 작업의 실기를 담당하였던 야뇌 백동수의 얼굴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저자는 던져 본다. 다시 못 볼 조선의 기남자 백동수.

야뇌 백동수 그는 누구인가?

백동수는 18세기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조선후기 무예 훈련 교범)를 토대로 이덕무 박제가와 더불어 무예 실기를 담당하여 정조대왕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던 조선의 무인이다.

유교적 이념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조선에서 그는 무인이자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에 끊임없이 부딪치는 역사적 약자였다. 그래서 처남, 매부 사이였다는 이덕무, 친구인 박제가, 박지원 등은 후세에 이름을 남긴 반면 무인 백동수는 문집은 물론 행장 하나 남은 게 없다.

그러나 그는 무예에 대한 열정으로 조선이라는 국가에 한없는 사랑을 던져 조선의 다시 없는 무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야뇌’라는 아호 또한 들사람처럼 거침없이 살고 싶은 조선의 청렴한 무인 백동수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 정조대왕은 억울하게 뒤주 속에 갇혀 승하한 젊은 군주 사도세자의 묘소를 방문할때면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군사들을 좌우의 호랑이처럼 부리며 원행길에 오르곤 하였다. 정조대왕 능행차 반차도 중 장용대장 서유대의 당당한 모습을 보라. 저들이 익힌 무예가 바로 '조선의 국기(國技) - 무예24기'였다.

그는 숙종 때 검선(劍仙)이라 불리던, 김체건의 아들 김광택에게 조선검법을 전수 받는 한편, 도가적 전통단학으로 내공을 쌓고 만약의 부상에 대비해 의술까지 익혔다. 이처럼 그는 청년시절에는 학문을 멀리하고 무협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어 주위의 우려를 사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의 주위에는 박지원, 이덕무 같은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중년에는 학문에 뜻을 두어 박지원, 성대중 같은 대학자들로부터 ‘무(武)로써 문(文)을 일궜다’는 평가를 받았다.

백동수는 1771년 식년무과(경국대전의 규정대로 문과 33명, 무과 28명만을 선발했던 과거시험)에 당당히 합격했으나 조선후기 만연했던 만과(萬科)로 인해 관직 수가 턱없이 부족해 벼슬을 얻지 못했다. 그러자 미련 없이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강원도 산골에서 들어가 10여년 농사를 짓고 조선의 무예를 연마하며 보냈다.

이후 정조가 즉위하고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조직하면서 서얼 무사들을 등용할 때 그는 창검의 일인자로 추천 받았고, 1788년 마흔 다섯에 드디어 장용영 초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가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일하고 있던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조선의 부국강병을 꿈꾸던 정조대왕의 명을 받아 무예서 간행작업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백동수는 발로 뛰어 문헌기록을 하나하나 살피고, 무예에 뛰어난 장교 여종주, 김명숙과 함께 군영마다 약간씩 차이 나는 무예의 기법을 통일하였다.

▲ 어정무예도보통지-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무예24기가 수록된 무예도보통지의 표지. 여기 잃어버린 조선의 무혼이 잠들어 있다. 누가 이 깊은 잠을 깨울 것인가?
한편 이덕무는 동양 삼국에서 간행된 병서를 살펴 무예의 역사와 원리를 정리하는 작업을 맡았고, 박제가는 무예서의 판본이 되는 글씨를 한 자 한 자 세심하게 살펴가며 정리하였다.

그리하여 1790년 4월 29일, 마침내 지상무예 열여덟 가지와 마상무예 여섯 가지를 총 정리하여 무예24기를 수록한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었다. 이 책은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의 중앙 군영은 물론 팔도의 군영에 보급되어 군사훈련의 교범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1800년 6월, 부강한 조선을 건설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정조가 49세의 한창 나이에 갑작스럽게 승하하였다. 정조가 승하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1802년 정월, 개혁정치와 부국강병의 상징이었던 장용영은 정조의 개혁을 반대했던 노론벽파에 의해 해체되었고 개혁인사들, 특히 군사적 역량을 장악했던 무장들이 축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백동수 역시 벼슬자리에서 쫓겨나고 유배형을 선고받는다.

▲ 화성행궁 옆에 고즈넉히 자리잡은 화령전에는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이끈 정조대왕의 어진이 고요히 모셔져 있다. 조선의 무사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정조대왕이시여. 편히 잠드소서.
아버지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12세에 왕이 된 순조의 집권 초기에 임진왜란 이후 약 200여년 동안 착실하게 쌓아둔 조선의 국부 또한 당쟁의 승리자인 노론 벽파와 외척들에 의해 모두 소진되고 만다.

이후 서얼 차별이 확대되는 등 역사의 비틀림은 세월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동료후배들에 의해 ‘다시 못 볼 조선의 기남자’로 평가를 받았던 백동수는 1816년, 일흔 넷의 나이로 포천 집에서 꿈에서도 그리워한 성군 정조대왕의 곁으로 떠났다.

조선의 무혼을 꿈꾼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에도 진정한 무인으로 불려진 협객 백동수를 가깝게 만날 수 있다. 중국에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유비, 관우, 장비 등의 무인들이 그들의 머릿속에 아직도 살아있고, 일본에는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이름의 검객이 여전히 일본인들의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과연 우리는 진정한 무인으로 누구를 가슴에 새기고 있는가? 관직에 얽매이지 않고, 가난하여도 나눔의 미학을 스스로 실천한 야뇌. 진정한 ‘협(俠)’의 세계를 꿈꿨던 조선의 무사 백동수! 나는 오늘 그를 내 마음 속의 진정한 무인으로 새기고자 한다.

▲ 광화문을 뒤로하고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앞에서 펼쳐진 무예24기의 시연. 여기 조선의 무혼이 부활한다.
ⓒ 푸른깨비 최형국


무사 백동수를 되살린 뚝심 있는 무예가
[인터뷰] <조선의 협객 백동수>의 저자 김영호

▲ <조선의 협객 백동수>의 저자인 김영호 무예24기보존회 대표
-조선시대의 다양한 인물이 존재하는데요. 굳이 백동수를 중심에 두고 글을 쓰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한국도 중국, 일본 못지 않게 무예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그러나 조선 500년의 역사 속에 무예인의 사표가 될 만한 단 한 명의 인물로 알지 못하는 게 또한 현실이다.

백동수는 동양 삼국의 무예를 집대성한 <무예도보통지>의 실기를 담당한 무사였다. 따라서 그의 생애를 더듬어보면 우리 무예의 역사는 물론이고 무사들의 삶 또한 밝혀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무모한 도전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에 관한 1차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행히 그가 박지원, 박제가 같은 문인들과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이들의 문집에서 하나 둘 단서를 찾아 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어려운 이웃과 약자를 돕는데 한결 같았던 협객이라는 사실이 나의 마음을 끌었다."

-역사학자들도 이러한 역사물을 책으로 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인데요. ‘조선의 협객 백동수’를 출판하시는데 남다른 고민이 있었는지요?
"원고를 마감하고 출판사에 넘긴 때가 1999년이었는데, 여러 가지 문제가 얽혀 출판까지 약 3년 이상 걸렸다. 그 3년의 기다림이 무엇보다도 지루하고 힘든 시기였다."

-이후 또 다른 책을 집필하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백동수는 조선의 18세기를 대표하는 무인이다. 그를 통해 한국 무예의 역사와 무인의 삶을 그려볼 수 있었다. 지금의 관심은, 조선이 몰락해 가는 19세기 초부터 식민지로 전락했던 20세기 초반까지의 한국 무예의 계보를 밝혀 보고 싶다.

기왕이면 이전에 시도한 ‘조선의 협객 백동수’처럼 무인의 삶을 통해 살펴 볼 생각인데 19세기 중반까지는 탁문한이라는 인물이 이러한 바람을 충족시켜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는 김광택 이후 최고의 검술에 뛰어나 검선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현재 19세기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섭렵하고 있다." / 푸른깨비 최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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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의 역사와 몸철학을 연구하는 초보 인문학자입니다. 중앙대에서 역사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경기대 역사학과에서 Post-doctor 연구원 생활을 했습니다. 현재는 한국전통무예연구소(http://muye24ki.com)라는 작은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