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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 역시 입양아 출신으로 입양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멜라니를 그녀의 사무실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 조명신
정재희, 멜라니 케이 와이사넨(Melanie Kay Waisanen), 멜라니 정-셔먼(Melanie Chung-Sherman).

미 텍사스주 달라스에 위치한 '버크너(Buckner International Adoption)'라는 입양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멜라니(26)가 그동안 사용했던 이름들이다. 처음에는 입양과 함께 새로운 이름이 생겼고 두번째는 결혼과 함께 성이 바뀐 것이다. 남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의 한국 성을 남편의 성에 하이픈으로 연결해 함께 쓰고 있다는 것.

입양아 출신으로 입양기관에서 인턴과정으로 일하고 있는 멜라니는 대학원 졸업과 결혼 등으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사무실에서 만나 그녀가 경험한 입양과 정체성 확립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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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7개월에 미국으로 입양

▲ 멜라니가 생후 7개월일때 양할머니가 한국을 방문해 그녀를 미국으로 데려왔다. 왼쪽은 위탁모.
ⓒ 멜라니
- 자신을 소개한다면?
"1977년 1월 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나중에 출생과정을 찾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5번째 딸로 경기도 출신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친아버지는 내가 아들이길 바랐기 때문에 출생 전부터 입양시킬 계획을 세웠고 태어나자마자 동방사회복지회로 보내졌다고 한다. 생후 2개월 때부터 해외입양이 준비되었고 7개월째에 미국으로 왔기 때문에 한국에 관한 기억은 전혀 없다.

바로 밑의 남동생 크랙(Craig) 역시 1978년에 한국에서 입양된 아이다. 양부모님들은 아기를 갖고 싶어 하셨지만 불가능했기 때문에 입양을 선택하셨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항상 동양아이를 입양하고 싶어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 우리가정의 축복이자 기적인, 막내 브래드(Brad)가 1980년에 태어났다. 나는 한국의 동방사회복지회와 미국의 딜론 인터내셔날(Dillon International)을 통해 입양되었고 처음 6년간은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 살았다. 그 이후 엔지니어셨던 아버지가 포트워스에 있는 록히드사에서 일하게 됨으로 가족과 함께 텍사스 지역으로 이사를 와서 21년 넘게 이 지역에서 살고 있다."

- 공부는 어디에서 했나?
"1999년 Texas Wesleyan Univ.에서 예술전공으로 학부를 마쳤고 UTA(Univ. of Texas at Arlington)에서 석사과정으로 사회학을 공부했다. 이번 8월에 졸업할 예정이다."

- 최근에 결혼했다고 들었는데 가족을 소개하자면?
"지난 3월 6일에 결혼했다. 남편의 이름은 그렉 셔먼(Greg Sherman)이고 작년 말에 TCU(Texas Christian Univ.)에서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휴스턴에서 자랐고 공부하기 위해 포트워스에 왔다가 크리스찬 데이팅 서비스를 통해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가족으로는 아버지 더글라스 와이사넨(Douglas Waisanen), 어머니 케이 와이사넨(Kay Waisanen) 그리고 두 명의 남동생이 있다. 크랙(Craig)은 25살이고 브래드(Brad)는 22살, 지금 컴퓨터공학을 공부하고 있다."

한국방문으로 정체성 혼란

▲ 멜라니가 생후 10개월 일때의 모습.
ⓒ 멜라니
동생이야기를 하던 멜라니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자신보다 한해 늦게 입양된 크랙의 이야기를 할 때였다. 그가 "여러 직업을 전전하는 등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짧게 덧붙였다.

-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나?
"1999년 이후 매년 여름마다 가고 있다. 7번 정도 되는 것 같다. 주로 내가 하고 있는 일과 관련해서 입양기관, 다른 입양인들 혹은 입양인 가족들과 같이 방문했다."

-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느낌이 특별했을 것 같은데?
"당시는 대학을 졸업할 때였다. 한국의 재외동포재단에서 연락이 왔는데 해외입양인들의 한국방문 행사에 참석하라고 권유를 했다. 굉장히 두렵고 떨렸다. 그래서 갈 수 없는 이유들을 찾기도 했다. 한국말을 할 줄 모르고, 한국의 문화를 잘 모른다 등. 그러다가 마음이 바뀌었다.

한국에 가기 위해 입양인들과 함께 아시아나 비행기에 탔을 때 '다른 일반 한국인들과는 달리 나는 한국말을 할 줄도 모르고 내가 많이 다르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2주를 보내면서 한국과 사랑에 빠졌다고나 할까. 한국의 문화가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다. 또한 동시에 상실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동안 내가 무엇을 잃고 살았는지 깨닫게 되었으니까.

자라면서 나와 내 동생은 우리 동네의 유일한 아시안이었고 주변환경 때문에 아무런 생각없이 백인사회에 동화되어 살았다. 내 가족이 다 백인이었기 때문에 나 자신도 백인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내가 한국계라는 사실을 잊었다. 그러던 가운데 첫 한국여행은 이런 나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여행은 그런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 한국방문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무엇이었나?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친구들을 사귀었고 방문할 때마다 그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내가 잘 알지 못했고 알기 위해 노력하는 한국 문화를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음식도 좋아하고 다양한 예술작품 등도 기억에 남는다."

21살 때 처음 이루어진 2주간의 모국방문. 성인이 되어 찾아 간 모국은 단순히 그녀의 신체를 태평양 건너 먼 고향으로 데려왔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정신까지고 흔들어 놓았던 것으로 보였다.

- 한국의 모습은 그동안 당신이 상상해 오던 것과 같았나?
"대부분의 입양인들은 자신의 모국에 대한 환상이 있다. 나는 한국이 참 가난하고 발전되지 못했으며 자전거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70년대 사진들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라는 동안 부모님께서는 내가 모국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입양기관에서 주관하는 '한국문화캠프'같은 곳에 보내주셨지만 나에게 있어 한국은 여전히 막연한 곳이었다.

따라서 막상 한국을 방문했을 때 상당히 놀랐다. 그곳은 세계적인 도시였다. 여자들은 매우 아름다웠고 남자들은 단정해 보였다. 약간의 문화적 충격도 느꼈고, 저기 어딘가에 내 친부모님들도 계시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었다.

대개의 경우 입양인들의 첫 번째 모국방문은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고 기쁘면서도 힘든 여행이 되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내 삶에 몰려 온 충격들을 생각해보고 여행을 정리하는데 1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친어머니를 위해 결혼예식 초를 하나 더 켠 양어머니

▲ 멜라니의 어렸을 적 모습.
ⓒ 멜라니
- 친부모님을 만나본 적이 있나?
"22살 때, 그러니까 첫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친부모를 찾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단순히 가족들의 의학적인 정보들만 알고 싶었는데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더 많은 것이 알고 싶어졌다. 아직까지 그분들을 만나지 못했다. 이름은 알고 있지만 그분들을 찾기 위한 정보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

친부모에 대한 환상이 시간이 지남과 동시에 현실적이 되어 가기는 하지만 쉽지는 않은 일이다. 내가 만약 친부모를 만나게 된다면 축복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바라기는 그분들이 죄책감이나 부끄러움 속에서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좋은 삶을 살고 있고, 당시 그분들은 나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할 능력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입양 보내는 것을 선택하셨으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러한 선택이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분들을 존중한다."

- 양부모들은 당신이 친부모를 찾는다는 것을 알고있나?
"물론이다.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기도 한다. 입양인들은 자신들이 친부모를 찾는 행위에 대해 걱정하는 부분이 있다. 혹시라도 양부모에게 상처가 될까봐 그렇다. 물론 나도 그랬다. 친부모를 배신하는 것으로 보여지거나 그분들이 나에게 해준 것들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실까봐였다. 그러나 양부모님은 내게 '이 일은 네게 참 중요한 일이고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돕고 싶다'고 하셨다.

그런 과정에서 양어머니가 내가 어렸을 때 찍은 사진들을 한국의 입양기관에 꼬박꼬박 보내오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혹시라도 친부모들이 나를 찾거나 소식을 궁금해 할 수 있으니 내가 잘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으셨던 것이다. 특히 내가 결혼할 때, 양어머니가 초를 3개 켜자고 했다. 양가를 대표해서 하나씩 그리고 나의 친부모님을 대신해서 그분들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하나를 더 켠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입양 부모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절대로 친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하는 집도 있다. 입양인들에게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 자신이 "백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랐다"고 했는데 처음으로 자신이 백인이 아님을 자각한 것은 언제였나?
"정확히 말하자면, 내면은 백인이지만 외모는 백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는 했다. 매일 거울을 보니까.

예전에는 동양인 가운데 카니 정(Connie Chung·기자 주 -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뉴스 앵커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밖에 몰랐다. 물론 지금도 동양인으로 역할모델을 해줄만한 사람이 많지는 않다. 해마다 양부모들이 '한국문화캠프'에 보내주었지만 별로 생각하지는 못했다. 대학 다닐 때도 크게 인식을 하지 못했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한국여행이 '한국계 미국인'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주었다. 그래서 20대 초반에는 '내가 누구인지'를 찾는 일에 주력했다. 당시에는 미국사회에도 한국사회에도 어울리지를 못했다. 많은 입양인들이 이 두 세계를 넘나들며 고민을 하곤 한다. 그리고 그 중간지대 어딘가에 도착하게 된다. 나 역시도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많은 고민을 했는데 지금은 '나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편하게 느낀다."

사고방식은 서양인, 생물학적으로는 동양인

▲ 멜라니와 남편 그렉 셔먼.
ⓒ 멜라니
- 지금은 자신을 누구하고 생각하는가?
"한국계 미국인. 둘 다다. 두 세계 모두를 경험했고 어느 한쪽의 극단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내 자신을 규정하는 많은 정체성이 있는 것처럼 다양하게 인식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규정하자면, 문화적으로는 미국인이다. 사고방식은 서양인이고 생물학적으로는 동양인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 두 가지를 어떻게 통합해야 하는 지를 배우고 있는 과정이고. 내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편안하게 느껴지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무거운 인터뷰는 이렇게 끝이 났다. 지면관계상 생략한 부분도 있지만 멜라니는 일관되게 "입양은 삶의 한 부분일 뿐"이며 자신은 "축복받았다"고 말했다. 가족에 의해 거부당했다는 경험이 상처가 되기도 했고, 남자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한국에 대해 분노하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가족들과는 다르지만 그 다르다는 것이 자신을 특별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국제입양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시기에 인종이 다른 자신을 입양한 양부모들을 '개척자'라고 생각한다고도 말했다.

멜라니는 자신이 미국인이지만 한국계임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것이 자신의 성에 굳이 정(Chung)이라는 한국계 성을 남겨놓은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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