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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이란 국가는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 조직이 지난 2001년 9월 11일, 전대미문의 테러를 일으키기 전까지는 세간의 관심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9·11 테러' 이전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아프가니스탄은 냉전시절 공산진영의 대들보격인 구 소련에 대항하여 치열한 게릴라전으로 소련을 축출한 회교국가 정도였다.

그러나 오늘의 아프가니스탄은 9·11 테러와 21세기 첫 전쟁 ‘항구적 자유작전(Enduring Freedom)’을 계기로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의 각축장으로 급격하게 변모해가고 있다.

▲ 도시로 몰려드는 인구로 인해 산까지 빽빽하게 들어선 가옥(카불 전경)
ⓒ 서준동

중앙아시아의 중심, 아프가니스탄 회교 과도국

'아프간 민족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아프가니스탄은 중앙아시아의 중심부에 위치한 국가로서 파키스탄, 이란, 투르크매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중국과 국경을 이루고 있다.

면적은 한반도 전체의 약 3배에 달하는 64만7천㎢, 인구는 약 2800만명, 인종은 아리안계 파슈툰족이 거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기타 타지크족(25%), 하자르족(15%), 우즈벡족(8%), 기타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발 1828m의 고지에 자리 잡은 수도 카불(Kabul)은 인구 300만(2002년 추정)의 대도시를 이루고 있으며, 전후 도시로 몰려드는 실업자와 빈민으로 인해 지금은 더 증가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 아프가니스탄 주요 도시 (지도)
아프간 지역은 평균 1450m의 고지로 국토의 70% 이상이 산악지대이며, 그나마 칸다하르(Kandahar)로부터 서쪽은 사막지대로 사람이 거주하지 못한다.

인구의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며 나머지는 유목민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 도시와 거주지는 ‘카불-칸다하르-헤라트-마자르 이 샤리프’를 연하는 순환도로를 따라 자리잡고 있으며, 농촌인구는 주로 강변에 집중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밀이 2/3를 차지하고 그밖에도 옥수수, 보리, 쌀 등의 곡물을 재배하며, 양, 소, 염소, 나귀, 낙타, 말이 사육되고 있다. 대륙성 기후로써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추운 편이다. 카불의 경우 연간 최고 40도에서 최저 영하 5도를 나타내지만, 지방 사막지대는 여름 최고 55도, 산악지대 겨울 최저 영하 35도에 이른다.

▲ 나무 한 그루 없는 사막과 산이 구분 없는 척박한 아프가니스탄 국토
ⓒ 서준동
아프간의 가장 강력한 종족은 파슈툰족(Pashtun or Pakhtun)이다. 파슈툰의 기원은 불투명하나, 파슈툰족은 자신의 혈통을 유대(현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인 ‘다윗’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파슈툰의 신화에 따르면 다윗은 ‘아프가나’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아프가나’는 다윗을 도와 예루살렘 성전을 세웠으며, 이후 유대인의 자손들에게 불행이 발생하자 ‘아프가나’는 40명의 아들을 이끌고 유대를 떠나 아프가니스탄 구르(Ghur) 산악지대로 가 현재의 파슈툰을 이루었다고 한다.

파슈툰족은 탈레반정권의 주축세력이었다. 또한, 이들은 아리안 민족의 일파로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이 특징이며, 탈레반의 본부가 있었던 칸다하르(Qandahar)를 중심으로 분포해 있고, 칸다하르는 아직까지 반정부세력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다. 현 가르자이 대통령이 파슈툰족의 대표적 인물이다.

▲ 주요 간선도로와 하천을 따라 주민들이 거주하는 마을이 모여있다.
ⓒ 서준동
현재 파슈툰족과의 권력투쟁에 나서고 있는 타지크족(Tajik)은 두 번째로 큰 종족이며 이란계 민족으로 일부 북쪽의 타지크는 몽골인종의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의 중류층을 이루고 있어며 다리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현 정부의 국방부장관이며 부통령인 파힘 칸이 바로 타지크족이다.

이외에도 하자라족, 우즈벡족, 아이막크족, 발로크족과 같은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아프가니스탄은 가족과 문중, 민족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언어 역시 인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파슈툰어와 다리어가 공통적으로 쓰이고 있으나 인종별로 32개에 이르는 각기 다른 언어와 사투리를 사용함으로써 민족간의 정체성과 배타심이 아주 강하다.

동서문화의 교류와 충돌, 피로 얼룩진 “침략과 항쟁의 역사”
역사상 단 한 번도 침략, 전쟁, 내전이 없었던 세대가 없는 암울한 역사

아프가니스탄은 지역적으로 이란고원의 북동부에 형성되어 북쪽으로는 중앙아시아와 연결되어 있으며, 동부는 인더스강 유역과 서부는 이란과 이어지기 때문에 예로부터 동서문화 교류의 요지였으며, 동서세력 확장시기에는 양대 무력이 격돌하는 전장터가 되어왔다.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이 세계열강인 미국과 유럽,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아랍세력의 완충 또는 격전장이 되어 버린 것 역시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BC 1000년경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살았다는 유적과 역사보고가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은 페르시아와 이란, 때로는 중국과 몽골의 지배를 받아왔다. 이처럼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는 다양한 종족의 침략과 약탈의 역사로 볼 수 있다. 여러 종족이 이 지역을 정복한 후 거주케 되었으며, 현재 아프간에 있는 종족들은 바로 이 침략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아프간 민족국가가 건국된 것은 1747년이었다. 이란 출신의 ‘아마드 샬 두라니(Ahmad Shar Durrani)’가 칸다하르에 자치정부를 수립, ‘두라니(Durrani)제국’을 건설하고 동으로는 인도 모굴(Mogul)제국 격퇴에 이어, 서로는 페르시아로부터 헤라트(Herat)를 탈환하면서 아프간의 영토를 공고히 하였다.

초기 건국 이후 수십년간 왕위 다툼이 일어났으며, 1838년 결국 바라크자이족의 ‘도스트 무하마드’가 왕위에 오르면서 비로소 아프간 ‘바라크자이 왕조’가 성립된 것이다.

19세기부터 아프가니스탄은 영국과 러시아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인도방위의 입장에서 러시아의 남하에 위협을 느낀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영국 세력하에 두려고 하였다. 영국은 인도제국 보호를, 러시아는 자신의 영향권으로 생각한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국의 개입을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

결국 2차에 걸친(제1차 아프간 전쟁 : 1838 1842, 제 2차 아프간 전쟁 : 1878 1880) 전쟁 결과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그러나 독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를 살아온 아프간인들의 끈질긴 항쟁으로 결국 1919년 제3차 아프간전쟁을 끝으로, 같은 해 8월에 ‘라왈핀디 화평조약’을 맺으면서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영국으로서도 제 1차 세계대전 직후의 상황에서 더 이상의 전쟁수행 여력을 상실하였으므로, 아프간과 휴전을 맺게 된 것이다. 그후 왕정국가로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1973년 7월, 국왕의 외유 중에 쿠데타가 일어나 ‘모하마드 다우드 칸’ 총리가 실권을 쥐고 공화제를 선언하였다. 소련의 군사적 원조하에 성사된 쿠데타 이후 아프간에서는 공산주의 세력이 점차 강화되게 되었다. / 서준동(아프간파병 공보장교)

대소 전쟁과 내전, 탈레반의 등장, 그리고 빈 라덴의 ‘9·11 테러’

구 소련의 지원을 받던 아프간 인민민주당은 공산주의 이념을 확산시키기 위한 강력한 중앙정부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이슬람교도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고, 1987년 9월 당 지도자인 ‘타라키’가 암살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아프간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소련은 이를 기회로 그해 12월 24일 8만의 병력으로 아프간을 침공하여 ‘파프라크 칼람’ 정권을 수립하였다. 공산주의 정권과 소련과의 관계는 아프간 사회의 전통적인 반외세 감정을 자극시켜 이슬람세력을 중심으로 무자헤딘을 결성케 했고 대소 무장투쟁이 대중적으로 확산됐다. 이때 미국, 파키스탄, 중국,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무기와 자금을 아프간에 제공하면서 대소항전을 지원했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정보부장인 ‘터키 빈 파이잘’ 왕자는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대항하기 위한 대소투쟁 세력의 확보를 위해 ‘오사마 빈 라덴’을 파키스탄 지역으로 파견하였다.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은 미국과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아 끈질기게 저항을 펼쳤고 소련은 무자헤딘 게릴라의 저항과 1988년 제네바협정이 체결되면서 철수를 시작, 1989년 2월 10만여 명의 소련군이 철수를 완료함으로써 ‘나지불라’ 공산정권이 약화된 가운데 각 지역의 무자헤딘 반군세력은 대대적 군사공격을 개시해 1992년 4월 25일 마침내 수도 카불을 점령함으로써 14년간에 걸친 장기간의 내전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때 소련은 10년간의 전쟁을 거치며 1만5천여 병력이 사망하고, 5만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으며, 항쟁기간 중 아프간인 100만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련과의 항쟁 이후에도 다양한 파벌로 구성된 무자헤딘 세력은 신정부 구성을 둘러싸고 주도권 다툼을 벌이며 대규모 무력충돌을 벌이며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적인 내전 상태를 지속하였다.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친미적인 태도에 반기를 든 ‘오사마 빈 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완전히 결별하고 순수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우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이슬람 투쟁 전선’에 돌입하여 민간인이건 군인이건 미국인을 살해하는 것은 합법이라고 선언, 미국을 대상으로 한 테러의 최선봉에 서게 된 것이다.

▲ 탈레반 시절 카불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탈레반의 모습
ⓒ 미 아프간동맹군사령부 제공
1994년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는 젊은 회교 원리주의자들로 결성된 탈레반(Taliban)당의 세력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1996년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정부가 해산되었고, 탈레반 세력간의 권력투쟁으로 ‘오마르’가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랍바니’전 대통령은 추종세력과 함께 북부반군을 결성하여 탈레반 세력과 또다시 내전을 펼치게 되었다.

탈레반은 1998년 북부동맹의 근거지인 '마자르 이 샤리프'를 점령하는 등 전국토의 90%까지 장악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정권을 장악한 탈레반은 극단적인 회교 원리주의에 입각하여 아프간을 지배하였고, 이에 동조하지 않는 조직이나 인원에 대하여서는 가차없이 살해하고 축출하는 혹독한 무단정치를 자행하였다.

탈레반의 공식 명칭은 ‘아프간 회교 운동 탈레반 당’으로서 파슈툰어로 “종교적인 학생들”이라는 의미를 뜻한다. ‘무하메드 오마르’를 지도자로 한 수니파 회교도들인 이들은 아프간 동부지역인 파슈툰과 파키스탄 지역의 회교학교인 ‘마르다사스’를 수료한 종교주의자들이 주축을 이루며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탈레반은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금지하고 여학교를 폐지하는 것은 물론, 가무금지, TV방송 금지, 심지어는 사진촬영까지 금지하는 회교원리주의에 입각한 급진정책을 실시했다.

1998년 ‘빈 라덴’은 테러조직 ‘알 카에다’를 활용하여 케냐 및 탄자니아에서 미국 대사관을 대상으로 200여명의 사망자를 낸 폭탄테러를 감행하였으며, 2000년 미 구축함 폭탄테러 등 미국을 대상으로 한 테러에 열을 올리게 되었고, 그 결과 UN 안보리는 테러의 배후세력인 ‘빈 라덴’ 인도 거부를 이유로 대 아프간 경제제재와 추가 제재 조치에 돌입했다.

이런 가운데, 알 카에다는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여객기 4대를 납치, 충돌공격으로 뉴욕 WTC 빌딩 붕괴, 워싱턴의 국방부(펜타곤) 일부 파괴, 항공기 추락 등 항공기 자살테러를 감행하여 소방관 300명과 민간인 3천여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테러가 발발하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항구적 자유작전(Enduring Freedom)’은 빈 라덴의 알 카에다 조직에 의한 9·11 테러사건과 이를 지원하는 탈레반 정권에 대한 보복 및 국제적 테러조직을 발본색원하기 위하여 2001년 10월 7일 미·영 공군의 아프간 공습을 개시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러 아프간에서의 군사작전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 수거된 지뢰를 한 자리에 모아 폭파 준비를 하고 있다.
ⓒ 서준동

‘지뢰밭’이 되어버린 아프간... 주거 밀집지역에 지뢰 2천만발 이상 매설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은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약 8%에 불과하다. 국토의 10%도 안 되는 이 좁은 공간에 매설된 지뢰량은 약 2200만발로 추정된다.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군사시설과 그 주변은 어디에나 지뢰가 묻혀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맹군 사령부(CJTF-76, Combined Joint Task Force)가 위치한 바그람은 2천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라고는 하지만, 바그람공항 옆에 붙어 있는 면소재지 정도의 시골마을에 불과하다. 구 소련군 점령시대와 탈레반 시절에 카불과 인접한 이곳에 군사공항과 시설을 건설하여 훈련장으로 사용하면서 주민들이 늘어난 뒤 최근에는 주민 대다수가 이곳 기지 안팎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거나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 한 자리에 수거된 지뢰를 폭파하는 장면
ⓒ 서준동
군사공항과 주요 간선도로가 지나가는 주요 거점인 바그람지역에는 구 소련군과 무자헤딘, 그리고 탈레반 시절에 군인들에 의해서 매설한 지뢰만도 약 1백만 발로 알려져 있다. 구 소련군이나 탈레반이 설치한 지뢰를 야간을 틈타 무자헤딘과 북부동맹에서 다시 캐내어 위치를 변경해서 정확한 매설위치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한반도 DMZ지역 전체에 매설된 양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규모의 지뢰가 바그람이라는 조그만 마을과 공항 주변에 깔려있다. 지뢰의 종류도 다양해 구 소련시대의 목판지뢰를 비롯하여 세계 모든 종류의 지뢰가 묻혀 있어 피·아를 불문하고 군인과 일반시민들까지 무차별로 피해를 입고 있는 실태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지뢰폭발 사고는 언제든지 누구한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인 것이다.

‘바달(Badal, 복수)’을 최고의 규범으로 생각하는 아프간 사회와 문화

전통적인 아프간 사회는 험악한 산맥과 사막이라는 지리적 특성에 따라 고립적이고 분산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종족들은 독립성이 강하고 전통을 엄격하게 준수하며 집단주의보다는 개인주의의 성격이 강하다. 아프간에서의 개인주의는 단순히 자기중심주의가 아니라 가족과 부족을 강조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파슈툰족은 아프간의 지배적인 종족일 뿐만 아니라 약 200년 동안 이 지역을 통치해 왔다. 따라서 파슈툰족의 문화적 특성이 아프간 전체에 영향을 미쳐 전통적으로 용기, 활력 및 호전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문화적 유사성 및 동질성 수호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파슈툰족 사회에서는 파쉬툰왈리(Pashtunwali)라고 불리는 불문법을 엄격히 추종하고 있다. 주요 골자는 바달(Badal, 복수), 멜마스티아(Melmastia, 환대), 나나와티(Nanawati, 보호)로서 이중에서 바달은 가장 중요한 의무사항으로 되어있다. 개인의 복수는 직계가족의 복수로, 가족의 복수는 그 마을, 나아가 그 종족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기까지 할 정도로 복수를 강조하고 있다.

파슈툰족 사회의 유일한 통치기구는 ‘지르가(Jirgah)’라 불리는 부족장 회의이며, ‘지르가’는 오랜 세월동안 존재해 오면서 관습법으로 제도화되었고, 전쟁이나 평화와 같은 중요한 문제의 결정은 항상 이 ‘지르가’에서 논의된다.

아프간의 최고 주권기관이 바로 이 ‘지르가’에서 유래된 '로야 지르가(Loya Jirgah)'이다. 로야 지르가는 대통령, 부통령, 상원 및 하원의원, 검사, 장관, 법률가, 헌법평의회 의장, 지역평의회 의장, 각 지역의 대표자 및 대통령이 임명하는 5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헌법을 개정하고 대통령을 선출하고 전쟁의 선포 등 국가의 운명에 관련된 중요한 사안을 결정한다. 의장은 대통령이며 2/3 이상의 출석에 과반수 찬성으로 안건을 결의한다.

아프간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과거로부터 페르시아, 그리스, 불교, 힌두교 및 이슬람 문화가 서로 교차되면서 관련 문화적 유물이 풍부하였다. 그러나 그동안의 전란으로 현재는 일부분의 유물만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특히, 탈레반 정권시절은 아프간 내에 남아있는 문화유산의 파괴가 가장 극심하였던 시기였다.

2001년 2월, 탈레반 지도자 ‘오마르(Omar)’는 아프간내 모든 비회교 동상을 파괴할 것을 지시했고, 이때 2천년의 역사를 지닌 바미얀 지역 석불파괴를 비롯하여 다수 문화재가 파괴되거나 파키스탄 및 서구지역으로 밀반출되었다.

▲ 바미얀 석불이 폭파된 현장(자동차의 크기와 석불의 크기를 비교해 보면 그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 서준동

바미얀 석불은 2세기에 조성된 거대한 석불로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의 유산으로 카불에서 서북쪽으로 150km 지점의 바미얀 고원지대의 붉은 색 사암절벽에 위치하고 있다. 탈레반 정권은 세계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탱크와 폭약을 이용하여 이를 폭파했으며, 현재 유네스코에서 이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야외수업 중인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
ⓒ 서준동

수 백년에 걸친 침략과 항쟁, 그리고 치열한 내전으로 교사와 학자들의 대부분은 처형되거나 외국으로 도주했다. 특히 탈레반은 1996년부터 여성에 대한 교육을 금지하고, 사립학교를 폐쇄함으로써 주민의 30%만이 글을 읽을 수 있으며, 여자의 경우는 불과 10%만이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6월 ‘가르자이’ 과도정부 수립이후 70%에 이르는 문맹율을 타파하기 위한 각종 교육제도 정비와 시설확충을 위한 노력을 전개 중이다. 최근의 아프간 주민들의 교육열은 대단히 높아서 현재 추진중인 “Back-to-School”운동으로 인해 약 3백만명이 취학하여 향학열을 올리고 있으나, 대부분 건물도 없는 텐트나 땅바닥에서 책·걸상과 교과서도 없이 그저 낡은 칠판을 이용해서 수업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미국 및 유럽국가로 구성된 PRT(Provincial Reconstruction Team, 지역재건을 위한 민사작전팀)를 비롯한 많은 구호단체에서 학교건설과 학용품 세트보급에 치중하고 있다. 우리 한국도 코이카(KOICA, 외교통상부 예하 국제협력단)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파라완주에 톱다라, 자파켈, 콸레에골라이 등 3개 초등학교와 카불주에 사카다라 고등학교 등 총 4개 학교를 건설 중에 있다.

▲ 칠판 하나로 향학열을 불태우는 아프간 소녀
ⓒ 미 아프간동맹군사령부 제공

탈레반 정권이 붕괴되었으나 이슬람 근본주의 색채가 아직도 일반인 생활에 많이 남아있다. 법적으로 여성의 교육과 일부 사회, 문화 활동이 허용되고 있지만 대다수 여성들은 집 밖에서 ‘부르카’를 착용하면서 사회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23년간의 내전으로 각종 사회기반시설이 붕괴되어 행정은 물론, 철도와 도로, 통신전기, 상하수도시설과 교육, 보건, 금융, 방송 등이 지극히 제한적이며, 대부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아프간인들의 문화생활은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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