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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진상규명법 제정을 계기로 우리사회에 친일파 논쟁이 뜨겁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 편집국장이 지난 98년부터 1년여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서 연재한 후 단행본으로 묶어펴낸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개마고원 출간)의 내용을 '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형식으로 다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 연대미상의 김갑순의 모습. 복장으로 봐서는 그가 군수자리에 있던 1910년대 전후쯤으로 보인다.(<동우수집>에서)
세월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공주!’ 하면 ‘공주갑부 김갑순’을 기억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서울 갈 때 절반은 남의 땅을, 그리고 절반은 자기 땅을 밟고 다녔다고 할 만큼 그는 한때 ‘조선 제일의 땅부자’였다.

그 무렵 김갑순은 ‘공주의 상징’이자 공주사람들의 자부심이었다. 김갑순이 대전으로 이사를 가던 날 공주의 촌로들은 “당신이 떠나시면 공주는 망합니다. 영감님 못 가십니다”라며 팔을 벌려 길을 막았다고 한다.

거부들 가운데 당대에 발복(發福)하여 김갑순만큼 재산을 모은 부자도 흔치 않다. 또 그 많던 재산이 한 대(代)를 넘기지 못하고 당대에서 끝난 것도 드문 경우에 속한다.

별달리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이 인생을 출발한 그가 어떻게 조선 제일의 부자가 되었으며, 또 군수·중추원 참의 자리에는 어떻게 오를 수 있었을까? 이래저래 그는 ‘연구대상’이다.

김갑순(金甲淳. 1872∼1960년, 창씨명 金井甲淳)은 공주 토박이 출신으로 1872년 공주시내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친과 형님을 여의고 13세 때 호주가 된 것으로 호적등본에 나와 있다. 어린 시절 모친은 장터에서 국밥 장사를 하였고, 그는 공주 감영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관노(官奴)였다. 하잘것 없는 신분으로 초년을 출발하였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투전판으로 노름꾼을 잡으러 갔다가 거기서 만난 묘령의 여인이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충청감사의 소첩으로 들어간 이 여인의 도움으로 총순(總巡)을 거쳐 마침내 군수자리까지 올랐다.

충청감사 소첩 도움으로 벼슬길 올라

「구한말 관원(官員)이력서」에 의하면 그는 1900년 충북 관찰부 주사(판임관 8등)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듬해 중추원 의관을 거쳐 그는 그 해 11월 내장원 봉세관(捧稅官)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는 이 무렵부터 치부를 시작하여 여기서 모은 돈으로 군수자리를 하나 샀다.

벼슬자리 욕심보다는 더 큰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 1902년 부여군수를 시작으로 10년 가까이 그는 충남지역 6개 군에서 군수를 지내면서 돈을 긁어모았다. 돈으로 벼슬을 사서 그 벼슬로 다시 본전을 뽑아낸 격이다.

「일제하 대지주 명부」에 의하면, 1930년 말 현재 그가 공주·대전지역에서 소유한 땅은 3,371정보(1정보는 3천 평)에 이른다. 평(坪)으로 환산하면 1,011만여 평 규모. 이 가운데 대전에 있는 소유지는 22만 평(1938년 현재). 당시 대전 시가지의 전체토지가 57만 8천 평이었으니 대전땅의 약40%가 그의 땅이었던 셈이다. 그가 얼마나 큰 땅부자였는지 짐작이 간다.

그렇다면 빈 손으로 시작한 김갑순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조선 제일의 땅부자가 되었을까. 의문에 비해 ‘성공비결’은 간단하다. 탐관오리와 전형적인 투기꾼의 양태가 그 답이다. 6개 군에서 군수를 지내면서 그는 공공연히 세금을 횡령하였다.

아산군수 시절에는 부정사건에 연루돼 삭탈관직을 당할 뻔한 일도 있었으나 ‘한일병합’으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재임시절에 맺어둔 인맥을 총동원, 개발정보를 사전에 입수하여 투자하거나 일제당국으로부터 인·허가권을 특혜로 획득하여 사업을 확장하였다.

▲ 공주시내에 남아 있는 김갑순의 옛집. 주인도 바뀌고 집터도 분할돼 옛 '영화'를 찾을 수 없다.(98년 촬영)
ⓒ 오마이뉴스 정운현

특히 그는 자신의 ‘돈과 빽’을 배경으로 조선인 부자들의 돈을 끌어들이거나 식산은행의 막대한 자금을 특혜로 대출받아 그 돈으로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쏟아져 나온 값싼 매물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땅투기꾼의 전형적인 행태라고 할 수 있다. 그를 ‘땅투기꾼 1호’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재산이 껑충 뛴 계기는 대전지역 땅투기가 성공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대전은 공주부(公州府) 관내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1904년 러일전쟁 무렵부터 철도가 건설되고 관공서가 들어서면서 서서히 도시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는 일찍부터 이곳을 주목하여 집중적으로 땅투기를 하였다.

1932년 그는 대전지역 유지들을 동원,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이곳으로 옮기는 데 성공하면서 마침내 떼돈을 거머쥐게 됐다. 1∼2전(錢)을 주고 산 땅이 하루아침에 1백 원 이상으로 뛴 것이다.

땅투기와 '정략 결혼'으로 거부로 성장

김갑순이 거부로 성장한 배경에는 남다른 축재술과 함께 ‘인맥관리’가 큰 역할을 했다. 그의 회갑(1932년 5월)때 명사들이 보내온 축시(祝詩)를 모아 출간한 『동우수집(東尤壽集)』(‘東尤’는 김갑순의 아호임)에는 당대의 거물인사들이 총망라돼 있다.

박영효(朴泳孝. 후작), 이해승(李海昇. 황족, 후작), 민영휘(閔泳徽. 황실 외척, 자작), 민병석(閔丙奭. 중추원고문), 이창훈(李昌薰. 이근택 아들, 자작), 권중현(權重顯. 을사오적 중 1인, 자작), 윤치호(尹致昊. 전 학부협판), 이윤용(李允用. 중추원고문, 남작), 민건식(閔建植. 중추원 참의, 남작) 등등.

그는 이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신분상승과 동시에 축재의 기반으로 활용하였는데 공통점은 하나같이 ‘친일파’라는 점이다. 그의 ‘친일’은 이들과의 인연에서 실마리가 비롯된다.

▲ 김갑순의 묘비 옆에 서있는 송덕비. 묘비에는 그가 일제 때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낸 경력이 자랑스럽게 적혀 있다.
ⓒ 오마이뉴스 정운현
1911년 아산군수를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으나 이후로도 그는 계속 관(官)과 줄을 대고 있었다. 1914년 그는 충청남도 참사(參事)를 거쳐 1920년에는 충청남도 도(道)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21년 중추원 참의에 임명돼 이후 3회 연속, 9년간 재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공주읍회 회원 2회, 충남도회 의원 4회, 충남도농회(農會)부회장, 우성(牛城)수리조합장, 1929년에는 조선박람회 평의원을 지냈다. 일제 초기 그가 친일 관변단체에서 활동한 것은 일제 당국으로부터 신용을 확보하고 조선인 친일세도가들과의 유대형성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중일전쟁(1937년) 이후 그는 기득권유지와 재산보전을 위해 본격적으로 친일대열에 가담하였다. 일제 황민화운동의 첨병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결성시 그는 발기인으로 참가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이 연맹의 경성(京城)연맹 상담역에 취임하였다.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충남대표 등 일제 말기 그는 충남의 대표적인 친일인사로 활동하였다.

거부친일파 김갑순이 일제에 아부할 목적으로 밀정(密偵, 스파이) 짓을 한 사례도 있다. 단군교 계열의 민족단체인 금강도교(金剛道敎)의 비밀을 탐지, 일경에 밀고하여 금강도교의 교두(敎頭)이하 간부 전원을 투옥시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피검된 교도는 63명, 이들 중 3명은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밀정 노릇에 '역대 조선총독 열전각'도 건립

이 사건 후 김갑순은 일경의 비호를 받으며 금강도교 소유의 단군성전을 압수하여 여기에 ‘역대 총독 열전각(歷代總督列傳閣)’을 건립하였다. 단군상 대신 역대 조선총독의 사진을 안치해놓고는 조선인들에게 참배를 강요하였다(『민족정기의 심판』 중에서).

해방 후 그는 공주 출신 제헌국회의원인 김명동(金明東) 반민특위 조사위원 일행에게 체포돼 수모를 겪었다. 김 위원에게 당한 수모를 갚으려고 2대 국회에 두 아들과 장손을 각각 출마시켰으나 모두 낙선하는 바람에 한을 풀지 못하고 1960년 88세로 사망하였다.

공주시내 인근 그의 선산(先山)에는 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 제실(祭室)이 하나 있다. 돌보는 이가 없어 지금은 흉가로 변해 있었다. 그 많던 자손·재산 모두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풍비박산(風飛雹散)’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듯 싶다.

제실 앞에 양각으로 새긴 복락정(復樂亭)현판이 하나 걸려 있었다. 현판대로 과연 이 집안에 다시 ‘낙(樂)’이 찾아올 것인가.

김갑순의 축재비결은 탁월한 이재술과 ‘인맥관리’

김갑순의 성공비책은 탁월한 축재술과 ‘인맥관리’. 피붙이 가운데 유력자가 별로 없었던 그는 자식들의 ‘정략결혼’을 통해 인맥을 구축하였다. 김갑순은 호적상 아들 일곱과 딸 넷을 두었다. 결혼 전에 사망한 4남·6남을 제외하고는 전부 지역유지나 세도가 집안의 자제들과 결혼시켰다.

대표적인 케이스는 장남(1899년생) 종석(鍾錫)과 장녀 정자(貞子. 1909년생)의 경우다. 종석의 첫 부인은 전 내장원경(內藏院卿, 종2품 칙임관) 김윤환(金閏煥)의 딸 김학필(金學筆. 1932년 사망)이었고 두번째 부인은 도지사를 지낸 이규완(李圭完)의 딸 이절자(李節子)였다.

장녀 정자는 충남 아산 둔포 출신의 윤명선(尹明善)과 결혼하였다. 윤씨는 좌옹 윤치호(尹致昊)와는 5촌간으로 그의 부친은 치오(致旿)는 한말 학부(學部, 현 교육부)학무국장 출신으로 ‘한일병합’후 중추원 찬의를 역임하였다. 윤명선 본인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후 일제의 괴뢰정부 만주국의 국무성 사무관, 간도성 차장 등을 지냈다.

이밖에 7남 종소(鍾昭)는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의 손자인 이병길(李丙吉. 후작 습작, 당시 경성부 옥인동 거주)의 딸과 결혼하였다. 다른 자식들 역시 모두 경성(京城, 현 서울) 거주 유명인사들의 자제들과 혼인시켰다.

김갑순이 여러 사돈 중에서 특별히 가까이 지낸 사람은 장남의 장인이었던 김윤환이었다. 김윤환은 공주지역에서 신망이 두터운데다 명망가로 평판이 나 있었다. 김갑순은 그의 신망을 사업에 활용할 욕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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