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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진상규명법 제정을 계기로 우리사회에 친일파 논쟁이 뜨겁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 편집국장이 지난 98년부터 1년여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서 연재한 후 단행본으로 묶어펴낸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개마고원 출간)의 내용을 '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형식으로 다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그 동안 많은 총애를 받았사옵고, 또 적지아니한 폐를 끼쳤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오늘 먼저 갑니다. 여러분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1974년 2월 3일. 秦 學 文”

“고인의 뜻에 따라 화장으로 하고 여러분의 염려하여주신 덕택으로 모든 일을 무사히 끝마쳤음을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974년 2월 7일. 미망인 秦 壽 美, 우인 崔 承 萬”


▲ 진학문씨
1974년 2월 7일자 『동아일보』 광고란에 이 같은 이색광고가 실렸다. 이 광고의 주인은 진학문으로 2월 3일 그가 죽자 5일 장례를 치르고 7일자로 광고를 낸 것이다. 부고는 죽은 진학문이 미리 써놓은 것이고 사망날짜는 친구 최승만이 나중에 써넣은 것이다.

이 광고는 당시 죽은 사람이 자신의 부음광고를 냈다고 하여 장안의 화제가 됐다. 죽기 전에 자신의 부음광고를 남긴 사람은 진학문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그는 별난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진학문(秦學文·1889∼1974년)은 서울 태생으로 호는 순성(瞬星)이었다. 그는 해방 전후를 통틀어 언론계·관계·경제계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재사였다. 그러나 조용만(趙容萬·작고)의 지적처럼 그는 “어떤 한 방면에서도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평생 친구였던 언론인 김을한(金乙漢·작고)은 그의 다양한 생애를 언론계시대·만주국시대·경제계시대의 3기로 나누고 있다. 그의 초년시절에 대해선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해방 전후 언론계·관계·경제계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재사

190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게이오(慶應)의숙 보통부에 입학한 그는 학비조달을 못해 귀국, 보성고보에 입학하여 12년에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진주에서 잠시 교편생활을 한 그는 이듬해 13년 다시 도일,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으나 이 역시 중퇴하였다.

1916년 다시 도쿄(東京)외국어학교 러시아어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이 역시 졸업하지는 못했다. 일본 유학시절 그는 최남선, 최두선, 신익희 등과 교류하면서 조선유학생학우회 회원으로서 김병로, 신익희, 장덕수, 최승만 등과 함께 『학지광(學之光)』이란 잡지를 만들면서 총무로 일했다.

이 무렵 그는 최남선이 창간한 『소년(少年)』과 『청춘(靑春)』 등에 수필이나 번역문을 실었는데 한마디로 그는 문학청년이었다. 17년 『청춘』 11월호에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패자(敗者)의 노래」라는 시가 실렸는데 이는 당시 도쿄외국어학교에 재학중이던 그가 당시 일본을 방문중이던 타고르를 만나 부탁하여 실리게 된 것이다.

한편 그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분야는 문단이 아닌 언론계였다. 그는 최남선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자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귀국했으나 여의치 않자 일단 총독부의 일어판 기관지인 『경성일보(京城日報)』에 입사하였다.

그러나 입사 후 얼마 되지 않아 상사와의 불화로 이곳을 그만둔 그는 당시 『경성일보』 사장 아베(阿部充家)의 소개로 18년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경성지국에 입사하여 20년 4월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까지 이곳에서 근무하였다.

이 기간 그는 총독부와 그 산하 각급 기관을 취재차 출입하면서 고급관리들과 사귀게 되는데 그가 친일파로 성장하는 토양은 바로 이때 마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1의거 후 새로 부임한 사이토(齋藤實) 총독은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조선인에게도 민간지 발행을 허가해주었다. 이는 언뜻 보면 조선인을 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이를 통하여 친일세력을 육성하고 민족운동계열을 대립, 분열시키려는 고도의 술책이었다.

총독부와 그 산하기관 출입하면서 친일파로 성장

다시 말해 그 동안 지하로 숨어서 활동하던 민족운동계열의 언론활동을 양성화시켜 겉으로는 조선인들에게 생색을 내면서 속으로는 감시권 내에 두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민족계열 신문의 창간계획을 총지휘한 사람은 사이토 총독의 정치참모격이자 『경성일보』 사장 아베였다.

진학문은 바로 이 아베와 친밀한 사이였던 관계로 중간에서 심부름을 하였다. 그는 사이토 총독과도 친분이 있었다. 사이토가 부임하던 날 경성역(현 서울역)에서 강우규 의사의 폭탄세례를 받은 다음날 그는 『아사히신문』의 특파원 자격으로 남산 총독관저로 찾아가 일본인에 대한 조선인의 민족감정 문제를 놓고 담론을 벌인 것이 계기가 됐다.

한편 총독부로부터 민간지 창간 허가를 얻어낸 그는 최두선을 통해 호남거부 김성수를 물주로 잡고는 4월 『동아일보』를 창간하였다. 진학문은 창간을 주도한 공로로 『동아일보』의 정경부장 겸 학예부장, 논설위원 등 핵심요직을 겸하였다.

그러나 그는 6개월 만에 별다른 이유 없이 『동아일보』를 퇴사하였다. 그리고는 러시아행을 결정하였다. 표면상 이유는 자기 전공분야인 러시아 문학을 좀더 공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러시아까지 가지도 않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들렀다가 귀국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상하이 임정의 조소앙, 홍명희, 이광수, 안창호 등을 만났는데 총독부의 밀명을 띤 모종의 정탐행위가 아니었나 짐작될 뿐이다.

한편 귀국하여 도쿄로 건너가 있던 그는 1922년 ‘3·1의거’로 투옥됐다가 가출옥(1921년 10월 19일)으로 석방된 육당 최남선으로부터 ‘출옥후초(初)집필’이라고 시작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이 편지에서 육당은 그가 경영해오던 신문관(新文館)을 공공성을 띤 기관으로 운영하고 싶으니 귀국하여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잡화상 경영, 브라질 이민에 이어 만주국으로 무대 옮겨

육당의 요청을 받아들여 귀국한 그는 총독부와 협의하여 제호를 『동명(東明)』으로 바꾼다는 조건부로 이 잡지를 재창간하였다. 그러나 『동명』은 자금난으로 창간 1년도 못 돼 23년 6월 자진휴간하였고 다시 『시대일보』로 제호를 바꿔 일간지로 재창간하였으나 이 역시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실직자가 된 그는 딸의 학비를 벌기 위해 수송동 집에 ‘문화상회’라는 문구점 겸 잡화상을 차렸으나 이 역시 여의치 못하자 1927년 그는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브라질에 정착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딸만 잃은 채 1년 만에 빈손으로 귀국하였다. 그는 어느 잡지에 쓴 글에서 “그 뒤 약 10년간 나는 거의 하는 일 없이 두문불출했다”고 적었는데 30년대 전반기 그의 행적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한편 1936년 그는 돌연 만주국 국무원 참사관에 임명돼 다시 세상에 얼굴을 나타냈다. 이 자리는 오늘날로 치면 내무장관에 해당하는 고위직이었다. 그러나 그가 만주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보다 훨씬 앞선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필자가 수 년전 입수한 문건(연도미상)에서 처음 밝혀진 사실이다.

▲ 1930년대 중반 관동군사령부 소속 정보장교 쓰지 대위가 진학문에게 관동군 촉탁을 요청하면서 제시한 조건. 월 수당 3백엔, 별도로 협화회 수당 2백엔을 합쳐 매월 5백엔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만주국 고관으로 임명되기 전 관동군의 촉탁을 지내면서 협화회 촉탁과 친일 『만몽일보(만몽일보)』의 고문도 지낸 것으로 확인됐다. 관동군사령부 소속 정보장교 쓰지 대위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만주로 돌아와 서둘러 약속하신 건을 실행에 옮겨 오늘 대략 확정하게 되었는 바 우선 간단히 알려드립니다.
1. 군사령부 촉탁으로 의뢰함. 수당은 월 3백엔,
2. 별도로 협화회 촉탁으로 의뢰하며 수당은 월 2백 엔, 합계 5백 엔
3. 일은 당분간 만주에 관해 인식할 수 있도록 하고 또 협화회의 조선인 지도와 그 밖의 협력을 부탁하고자 함
4. 만몽일보는 당분간 직접적인 관계는 없더라도 내면적으로 지도를 부탁드리고자 함
5. 여비는 5백 엔을 추후 보낼 것임. 대체로 위와 같음. 곧 정식발령이 있을 것이며 추후 전보로 알리게 될 것임. …가족을 동반하는 문제는 건강에 지장이 없다면 괜찮다고 생각함. …”


편지를 보낸 시기는 정확치 않으나 1930년대 중반, 그가 만주국 관리로 들어가기 전으로 보인다. 이 편지에 이어 ‘(관동)군 촉탁은 오늘부로 발령이 됨. 여비 5백 엔을 발송함. 도만(渡滿)날짜가 확정되는 대로 통지해주기 바람’ ‘전직(轉職)하게 되어 매우 유감임’ ‘관복(官服)을 벗고 난 감회가 어떻습니까? 생활필수품이 갑자기 싸진 듯한…’ 등의 전보나 편지가 잇따른 것으로 봐 그는 관동군 촉탁에 부임, 군무했던 것이 확인된다.

만주 국책회사 근무경력이 해방후 경제계 인연 돼

‘전직’은 그가 1936년 만주국 국무원 참사관으로 자리를 옮긴 것을 말한다. 39년부터 그는 다시 만주생필품주식회사의 상무이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 회사는 만철소비조합과 만주국관리소비조합에 대한 물자공급기구로 조직한 것을 개편한 일제의 국책회사였다.

그는 전반기 3년은 만주 본사에, 후반기 3년은 경성지사에 근무하면서 일제의 전시하 통제경제정책 관리자로 활동하였다. 그가 해방 후 경제계에 몸담은 터전은 바로 여기서 활동한 경력 때문이었다.

경성(현 서울)주재 이사 시절 그는 조선내 친일기업인은 물론 각계의 친일파들과 교류하면서 각종 전쟁협력 모임과 강좌에 얼굴을 내밀기도 하였다. 그는 친일단체인 대화동맹의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해방 후 그는 한동안 두문불출하다가 처가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반민특위의 활동이 끝난 후인 1952년 한국무역진흥공사 부사장, 한국무역협회 일본지부장(55년)을 시작으로 활동을 개시한 그는 57년 완전 귀국하여 60년대 전국경제인연합회 상임부회장, 서울시 자문위원회 건설위원장, 이민공사 사장, 한일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대부분의 친일인사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일제의 하수인으로 활동한 것이 해방 후 문제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경제분야 경력자로 평가돼 재계의 거물로 변신했고, 또 경제계의 요직을 두루 섭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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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