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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진상규명법 제정을 계기로 우리사회에 친일파 논쟁이 뜨겁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 편집국장이 지난 98년부터 1년여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서 연재한 후 단행본으로 묶어펴낸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개마고원 출간)의 내용을 '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형식으로 다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 전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반민특위 '검거 제1호' 박흥식(朴興植)이 특위로 잡혀온 것은 1949년 1월 8일 오후 4시30분. 특위 부위원장 김상돈(金相敦)의 지시를 받은 조사관 김용희(金容熙)와 서기관 박희상(朴喜祥)은 특경대원 7명을 데리고 서울 종로 네거리 화신 사장실을 급습하였다. 당시 특위가 박흥식을 첫 검거대상자로 지목한 것은 그가 미국도피를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위 조사관 일행이 화신 사장실을 급습할 당시 박흥식은 외무부 관계자들과 미국여행권(여권번호 00130호) 관계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특위 관계자들이 신분을 밝히고 동행할 것을 요구하자 박흥식은 영국제 고급담배를 꺼내 이들에게 권하며 "정리할 서류가 좀 있으니 5분만 시간을 주시오"라며 꾀를 부렸다.

'독 안에 든 쥐'라고 판단한 조사관들이 이를 허락하자 박흥식은 옆방으로 들어가더니 1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 사이 비밀문을 통해 다른 방으로 가서는 모처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구원요청은 결국 허사로 돌아가고 그의 양손에는 마침내 수갑이 채워졌다.

한 때 '조선 제일의 부자'로 불리던 박흥식(1903∼1994년)은 평남 용강군에서 소농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곳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가족 부양을 위해 진남포에서 미곡상을 시작으로 사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천부적인 상술과 뛰어난 친화력으로 그는 1924년 고향에서 불입자본금 10만원으로 선광당인쇄소를 시작하였다. 2년 뒤 그는 사업무대를 서울로 옮겨 선일지물을 창립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소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조선 제일의 부자'

그는 자본금 25만원인 선일지물에 6만5천원을 불입하였다. 이 돈은 토지를 담보로 식산은행에서 대출받은 5만원과 나머지 일부는 그가 부담한 것이었다. 그는 주로 총독부 당국과의 친교를 바탕으로 식산은행·한성은행 등의 은행돈을 최고 수백만원까지 끌어다가 사업자금으로 활용하였다. 당시 금융가에서 그는 최고대우를 받고 있었다.

한편 그는 종로 네거리에서 공동경영하던 금은방·잡화상을 매수, 1931년 화신백화점을 설립하였는데 이 회사가 그의 모기업이 되었다. 화신백화점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사은경품판매, 연쇄점 운영 등의 경영기법을 도입, 승승장구하였다. 이어 1936년에 설립한 화신연쇄점은 최고 번성기를 구가하던 37년경에는 전국에 연쇄점 수만 350개가 넘었다.

당시 그는 총독부의 도움으로 식산은행에서 3천만원을 대부받았는데 그로서는 자본과 신용만 중요할 뿐 자본의 성격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화신의 자본을 두고 '매판적 상업자본'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화신백화점과 함께 화신연쇄점은 일본 오사카(大阪)의 영업소를 통해 일본상품을 다량수입, 국내에 살포함으로써 국내시장을 일제상품의 소비처로 전락시켰는데 이는 당시 일제의 대표적인 식민지 지배정책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총독부로부터 은행대출과 관련, 하등의 통제도 받지 않았다.

각종 친일단체 활동 이어 군수공장 세워 비행기 제작

▲ 박흥식의 반민특위 재판기록. 반민특위 '검거 제1호'로 구속된 후 병보석으로 풀려나 물의를 빚었던 박흥식은 '공민권정지 2년' 구형에 무죄를 선고받아 반민특위의 친일파 척결의지를 무색케 했다.
한편 반민특위에 검거된 그는 제3조사부의 예비조사를 마치고 특별검찰부로 송치되었다. 검거된 지 47일 만인 3월 22일 그는 정식 기소되었는데 검찰측 조사기록이 무려 6천 페이지에 달했다.

그의 기소장에 나타난 죄명은 반민법 제4조 7항(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제7조(범죄자 옹호·도피 협조자) 위반이었다. 반민특위에서 지목한 그의 대표적인 반민족행위는 일제 말기 비행기공장을 만들어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조한 점과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점이었다.

태평양전쟁이 결정단계에 이르렀을 때인 1944년 2월 그는 일본의 항공전력 증대를 목적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 설립허가를 총독부와 일본내각에 제출하였다. 수차례 일본을 다녀온 끝에 자본금 5천만원으로 이 회사 설립허가를 받은 그는 그 해 10월 자신이 대표가 되어 주식을 공모하였다.

그는 총독부의 힘을 빌어 조선직물회사와 동양방적 안양공장을 접수하였고 인근 토지를 몰수하여 비행기공장을 건설하였다. 비행기 생산시설은 조선군사령부 병참부의 중개로 관동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그 대가로 조선의 해산물·직물 등을 송출하였다. 공장 노무인력은 전적으로 징용자들이었다.

44년 11월부터 총 4회에 걸쳐 1717명을 선발한 후 1개월간 경기도 광주에서 조선군의 지도로 기본훈련을 시킨 후 다시 일본 나고야(名古屋)나 만주로 보내 실습을 시킨 후 안양공장이나 만주비행기공장으로 보내 비행기제조에 종사시켰다.

흔히 박흥식의 조선비행기(주)는 비행기를 만들려다 일제패망으로 그만둔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조사내용에 따르면, 45년 5월 당시 제1호기의 주익(主翼)·동체를 위시하여 대부분의 작업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을 하였으며, 제2·3호기도 부분품 제작중에 있었으며 9월말 작업을 완료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박흥식은 자신이 경영하던 광신상업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개편, 비행기 기술공을 양성하려했던 사실도 조사과정에서 새로 밝혀졌다. 실지로 전장에 투입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비행기제조 계획은 거의 완성된 단계였다. 일제 패망 후 그는 조선군사령부로부터 조선비행기에 투자한 금액과 격려금까지 받았으나 이중 일부를 주주들에게 나눠주고는 대부분 착복하였다.

조선비행기(주), 45년 8월 '시험비행'도 마쳐

한편 그의 친일은 각종 친일단체 활동에서도 두드러졌다. 30년대 후반 그는 조선총독부 주최 산업경제조사회와 시국대책조사회에 조선대표로 참여하여 일제의 시국대응책에 대해 자문역할을 하였다. 또 각종 전쟁협력행위에 가담하였는데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이사·배영동지회 상담역을 비롯해 임전대책협의회·조선임전보국단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특히 임전대책협의회 발족시 민규식(閔奎植)·김연수(金秊洙) 등과 함께 각각 20만원씩을 기부하였으며 전시채권 가두판매에 나서기도 했다. 징병제 찬양이나 학병권유에 나선 것은 물론이다. 총독부 고관을 비롯해 군부·경찰·금융계 등 광범위한 권력층과 사귀면서 이들의 비호를 받던 그는 특히 제6대 조선총독 우가키(宇垣一成)와는 각별한 사이였는데, 그는 우가키를 '숭배'하였다고 특위 조사과정에서 실토한 바 있다.

▲ 박흥식이 6대 조선총독 우가키에게 보낸 감사편지(왼쪽 절반부분). 그는 반민특위 조사과정에서 우가키를 '숭배'했다고 털어놨다.
ⓒ 일본 국회도서관 소장
바로 이 우가키가 총독으로 재임하던 시절 화신백화점·화신연쇄점이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점은 두 사람의 친분관계와 무관치 않다. 미나미(南次郞) 총독과도 유착관계가 남달라 그가 조선총독에서 이임, 귀국하자 「영원히 못 잊을 자부(慈父)」라는 담화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특위가 그를 '검거대상 1호'로 지목한 것은 그의 미국 도피 음모 이외에도 그가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특위의 활동개시가 예견되자 그는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장직상(張稷相) 등과 만나 모종의 음모를 꾀하였다.

그는 당시 수도청 수사과장으로 있던 친일경찰 최란수(崔蘭洙)에게 수사비 명목으로 10만원을 지원한 사실이 특위 조사과정에서 밝혀졌다. 기소 1주일만인 3월 28일 반민특위 사상 첫 공판이 서울지방밥원 대법정에서 열렸다.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그의 재판은 구속 103일 만인 4월 20일 그의 병보석으로 다시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박흥식 '무죄선고'로 반민특위 친일파 척결 의지 무색

특별재판부가 병보석으로 그를 풀어주자 당시 특별검찰부 검찰관 9명은 전원 사표로 이에 맞섰고, 사회·정당단체에서도 격렬한 성명으로 특별재판부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결국 그해 9월 26일 그는 '공민권 정지 2년'이라는 가벼운 구형에 이어 당일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이유는 그가 군수공장을 경영하였지만 실질적으로 비행기를 제작·일제에 지원하지는 않았고, 또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것은 피동적으로 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특별재판부가 이같은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내린 데는 속사정이 있었다.

▲ 박흥식이 1931년부터 57년동안 살았던 서울 가회동 자택. 그는 화신산업의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1988년에 이 집을 30억원에 처분했다.
친일경찰의 반민특위습격사건(일명 '6·6사건')에 이어 '국회프락치사건'으로 특위의 중심인물이었던 소장파 의원들이 대거 제거된 데다,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의 피살로 친일파 척결의 정신적 기둥마저 상실한 상태였다. 결국 법적으로는 그는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역사의 법정에서 그는 여전히 '유죄'로 남아있다.

해방 후 그는 사업재기를 노렸지만 80년 화신산업의 부도로 마침내 막을 내렸다. 부채청산을 위해 자신이 수십년간 살아오던 집까지 내놓았지만 '물길'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종로 네거리 옛 화신백화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어느새 새 임자가 자리를 잡았다.

끝내 철거된 친일파 박흥식의 동상

▲ 2001년 12월 철거된 박흥식의 동상. 광신학원은 동문회의 건의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동상을 전격 철거했다.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서울 관악구 소재 광신고교는 지난 2001년 12월 말 이 학교의 설립자 겸 초대 재단이사장을 지낸 친일파 박흥식의 동상을 철거했다. 이 학교의 이사장은 박흥식의 아들 박병석씨.

이에 앞서 민족문제연구소 관악동작지부 회원 등은 학교 앞에서 박흥식의 동상철거를 요구하며 수개월에 걸쳐 시위를 벌였다. 학교측은 결국 고심끝에 동상을 철거키로 결정하고 이같은 사실을 민족문제연구소측에 통보한 후 그해 말 철거했다.

학교측은 박흥식의 동상이 동문회 기증 형태로 세워진 것을 감안, 동상 철거문제에 대한 모든 결정을 동문회에 위임했으며, 동문회는 다시 회의를 통해 동상을 철거키로 최종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박흥식 동상 이외에도 교육계 친일전력자들의 동상이 더러 철거된 바 있다. 지난 2000년 7월 서울 중앙여고는 일제말기 제자를 정신대로 내보낸 황신덕씨의 동상을 철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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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