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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태 열린우리당 당선자 (부산 사하을)
ⓒ 오마이뉴스 이종호
2001년 3월의 어느 날 부산의 한 식당.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의 노무현 대통령이 부산지역 민주당 지구당 위원장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A씨가 "장관님, 조경태 사하을 위원장이 열심히 합니다"고 덕담을 하자 노 대통령은 "조 위원장은 다음 총선에서 될 겁니다"라고 답했다. 노 대통령이 뜻밖에 30대 중반의 조씨를 추켜세우자 동석한 선배, 측근 정치인들의 자존심은 상할 대로 상했다. 주변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노 대통령은 알쏭달쏭한 은유를 구사했다.

"조 위원장은 늦겨울에 입문했거든요. 곧 봄이 올 겁니다."

17대 총선에서 당시 만찬 참석자 중 조씨만이 당선되면서 대통령의 '예언'이 적중했다. 총선 다음날인 지난달 16일 노 대통령은 조 당선자에게 "고생했어요. 앞으로 많이 외롭겠네요"라고 축하전화를 걸었다.

여의도 정가에서는 신인이지만, 8년간 부산의 지역구를 누빈 조씨를 두고 주변에서는 '대기만성'이라고 말한다. 총학생회장을 지낸 운동권 국회의원들이 많지만, 대학시절의 조씨는 별다른 직책도 없이 학생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평범한 학생이었다.

86년 10월 수많은 학생들이 건국대에서 무더기 구속된 것이 학생운동 참여의 계기가 됐고, 88년 13대 총선에서 노 대통령의 선거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졸업 후 부산정보대·부경대·한국해양대에서 시간강사를 하며 평범한 생활인으로 돌아간 그에게 가슴 한구석이 울컥 치미는 경험이 찾아왔다. 지난달 28일 열린우리당 당선자 워크숍에서 기자를 만난 조 당선자는 당시 기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95년 부산 구포시장에서 구청직원들이 노점상을 마구잡이 단속하는 걸 봤어요. 김영삼 대통령 취임하면 서민들이 살기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가 컸는데,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이 많이 흘렀어요."

조 당선자는 "돈도 배경도 없는 젊은이가 '정치를 하겠다'고 민주당 부산시지부의 문을 두드렸을 때, 김정길 전 의원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고 회고했다. 젊은 패기를 앞세워 공천은 받아냈지만, 막강한 돈과 자금을 가진 신한국당 후보(서석재)와의 대결은 역부족이었다.

유일한 선거참모였던 아내가 유권자들의 호기심을 끌만한 아이디어를 냈다. 선거공보에 남편의 상반신 누드사진을 실은 것이다. 사진 밑에는'감출 것이 없는 정치, 젊은 용기로 시작합니다'라는 슬로건이 적혀있었다.

"8면짜리 선거공보를 만들 돈은 없고, 4면짜리 하나 만들 수 있는데, 눈길을 끌지 않으면 1000표도 안 나올 상황이었어요."

96년 선거에서 예상을 깨고 1만 표를 획득, 자신감을 얻은 조 후보는 2000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에 먼저 공천을 신청했다. 공천에서 탈락한 후 민주당 공천을 받았지만, 이 당시의 선택으로 인해 그는 2004년 총선에서 '철새'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역사적인 내력을 따지자면, 97년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통합해서 한나라당이 된 것 아닙니까? 노 대통령은 국민회의로 가고 나는 남았는데... 한나라당이 이념도 없는 잡탕정당이었지만, 지금처럼 부패정당은 아니었어요. 한나라당에서 온 '독수리5형제', 민주당에서 분당돼서 나온 열린우리당 의원들 모두 선의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죠."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원외에 머물던 그가 주목을 받은 적이 한번 있었다.

▲ 2002년 8월16일 민주당 대강당에서 열린 국회의원·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중 안동선 의원이 '노무현 후보사퇴'를 요구하자 조경태(부산사하을 지구당위원장)씨가 발언을 중지하라며 강하게 항의하고 있다. ⓒ 2002 오마이뉴스 이종호
그해 8월16일 민주당 지구당연석회의에서 반노 진영의 안동선 의원이 지방선거 및 재보선 패배의 책임을 물어 노 대통령의 대선후보 사퇴를 요구한 것이다.

"안 의원이 노 후보를 바로 뒤에 앉혀놓고 10분 동안 사퇴하라고 계속 공격하는 거예요. 국민경선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을 하는데도 전부 듣기만 하는 거예요.

참다못해 '나도 할말 있으니 그만 하라'고 제지했더니 안 의원이 몇 마디 더 하고는 화가 났는지 나가버렸죠. 나중에 이강철 조직특보가 '조경태가 최고'라고 격려해주더군요."

당시 회의장을 나선 안 의원은 곧바로 민주당을 탈당해 자민련으로 갔다가 2003년 민주당에 복귀했다. 탄핵심판론을 이겨내지 못하고 낙선된 안 의원은 조 당선자와 희비가 엇갈렸다. 조 당선자는 "2002년 여름의 기 싸움에서 '중요한 순간에 끝까지 버티는 쪽이 이긴다'는 교훈을 체득했다"고 털어놨다.

열린우리당의 '영남참패'에 대해 그는 "영남사람들이 '열린우리당 = 김대중당'으로 생각했다. 노 대통령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총선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서는 부산시민들도 자성을 해야한다"면서도 열린우리당 선거전략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전략공천 받은 분들이 선거 운동할 시간이 부족했다는 건 말이 안되는 게 제주에서는 공천받은 지 한달 만에 당선된 분도 있어요. 중앙당과 부산시당 모두 착각하는 게 지역주의 극복이 말로만 되냐는 거예요. 유명한 선배들이 다 떨어졌어도 조경태는 됐잖아요? 민중을 위해 정말로 봉사하겠다는 신념보다는 특권을 바라고 선거에 나선 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말을 좀 아끼겠습니다."

'국민의힘' 회원으로서 언론개혁에 적극 공감하는 그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거절하기도 했다.

조경태 당선자 약력

1986년 경남고졸
1990년 부산대 토목공학과졸
1992년 부산대 대학원 토목공학과졸
1995년 부산정보대·부경대·한국해양대 강사
1996년 민주당 부산사하갑지구당 위원장
1999년 부산대 공학박사학위 취득
2000년 민주당 부산사하을지구당 위원장
2002년 노무현 대통령후보 정책보좌역
2003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획조정분과 자문위원
2003년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2004년 열린우리당 17대 국회의원(부산사하을)
언론개혁 과정에서 기자들 전체가 한 묶음으로 매도당하기 전에 기자들 스스로가 뼈를 깎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토목공학 박사학위를 가진 조 당선자는 전공을 살려 건설교통위원회를 배정받길 희망하고 있다.

장향숙, 조성래, 윤원호 등 부산지역 비례대표 당선자들도 조 당선자의 건교위 입성을 지지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우리나라 관급공사의 수주과정이 투명하지 못하다는 건 다 아는 얘기죠. 예산누수 규모가 10∼20조원은 될 텐데, 내가 노력하면 전부는 아니라도 수천억 원에서 1조원은 예산 절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1년에 받는 세비가 1억 원 정도인데, 그 정도만 해내도 국민들에게는 남는 장사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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