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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에서 연천군의 민통선 지역으로 들어선다. 연천군은 경기도의 31개 시군 중 4번째로 면적이 크지만 가장 인구가 적은 곳이다. 인구 5만 명의 연천군 자체가 군사보호법으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 지난 주 사흘간 타오른 산불의 검은 상처가 넓게 퍼져있다.
ⓒ 한성희
연천군은 인근 포천과 합쳐서 국회의원을 뽑는다. 그러니까 연천군 자체의 국회의원도 갖지 못한 지역이다. 30만 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질 좋은 쌀을 생산하던 비옥한 연천평야는 반세기가 넘도록 비무장지대에서 쉬고 있다.

초록산야로 덮여야 할 DMZ에 시커멓게 그을린 흔적이 여기저기 커다란 상처처럼 드러난다. DMZ에서 불이나면 자연적으로 꺼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불이 나는 원인은 산짐승들이 지뢰를 밟아 터지는 바람에 난 것이라는 추측을 할 뿐 정확한 화인을 조사할 수도 없다.

군사경계선 너머 북한 초소 근처에도 얼룩진 검정 자국이 넓게 번져 있는 걸로 보아 북한군도 산불의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 산불은 일주일 전에 일어났고 사흘간 속수무책으로 보기만 하다가 때마침 내린 비로 꺼졌다. 진화가 자연적으로 됐다는 말이다.

최전방 군부대의 막사들이 철조망의 긴 선과 함께 여기저기 보인다. 비로 인해 꺼진 불의 흔적이 산야의 아픈 상처로 보여 고개를 돌린다. 반대편 민통선 지역의 영농지는 근처 산의 무성한 초록으로 감싸여 평화롭다.

경순왕릉으로 가는 길 ‘지뢰 주의’

▲ 산불이 난 북쪽 DMZ 반대편과 달리 남쪽 민통선 지역은 봄이 화사하기만 하다.
ⓒ 한성희
민통선 지역에선 다니는 길이나 도로 외엔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행여 길가 옆의 숲에 들어가면 어디서 지뢰가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오죽하면 경순왕릉으로 들어가는 임진강변 고랑포의 민통선 초소 옆에 ‘ 산나물을 캐는 것은 지뢰를 캐는 것입니다’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길게 걸려 있겠는가.

민통선 지역의 출입이 완화됨에 따라 외지인들의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와져서 많은 방문객이 들어온다. 반드시 주민등록증이나 신분증을 맡겨놓고 나갈 때 찾아가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방문객들이 민통선 지역의 위험을 무시하고 산에 들어가 산나물을 채취할 때 발생한다.

1년에 몇 차례씩 지뢰 사고가 일어나 발목이 잘려 나가는 일이 생긴다. 그러나 발목지뢰를 밟아 발목만 잘린다면 운이 좋은 편이다. 일명 폭풍지뢰라는 대인지뢰를 건드리면 목숨을 잃는 수도 있다. 크레모아를 건드리면 큰 사고가 난다. 이런 폭발물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경순왕릉 무덤가의 잔디가 오후의 햇볕 아래 초록 비단처럼 화사하다.
ⓒ 한성희
사람의 발길이 드문 편이라 산나물이 많아서 유혹을 느끼겠지만 산나물에 목숨을 거는 일은 절대로 삼가야 한다. 지금까지 방문한 부대와 초소 곳곳에 각종 지뢰사진과 크레모아, 수류탄 등이 전시된 것을 보면 이곳이 살벌한 지역이라는 것이 실감난다.

출입하는 농민들도 비가 온 뒤에 산이나 개울에서 휩쓸려 내려온 지뢰를 밟는 일이 많다. ‘발목이 잘린 사람이 제일 많은 곳이 연천’이라는 자조적인 말들이 오가는 게 이곳의 현실이다.

비단 연천뿐이랴. 우리 나라 민통선 전 지역은 아직도 지뢰밭으로 덮여있고 희생자도 많이 나온다. 경순왕릉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도 ‘지뢰’라는 팻말이 걸려있다. 민통선의 봄은 겉이 푸르게 덮여있지만 속은 위험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여기도 귀룡나무의 흰꽃이 탐스럽게 지뢰의 위험을 포장하고 있다.

▲ 귀룡나무
ⓒ 한성희
출입 영농자들이 농사 짓는 인삼밭이 심심찮게 눈에 띄고 논과 밭은 부지런한 농부의 손으로 갈아엎었다. 군사지역이라 산업체가 들어 올수 없어 농사 외엔 딱히 다른 수입이 없다.

25사단 72연대가 있는 이곳은 GOP 지역이다.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은 잘 알겠지만 남방한계군사지역에 근무하는 GOP 복무는 외부와 차단된 생활이다. 2개월 단위로 돌아가면서 근무를 바꾼다고 하지만 GOP지역에 있는 동안은 휴가는 물론이고 면회나 편지, 전화통화가 일체 불가능하다.

▲ 사라진 신라왕국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무덤.
ⓒ 한성희
비포장 도로를 지나는 도중 작은 초소엔 미군이 경계근무를 하고 있었다. DMZ지역과 민통선 지역을 지나는 동안 미군이 자주 눈에 띈다. 머지 않은 곳에서 쏘는 포 소리가 산발적으로 쿵쿵 울려퍼진다.

눈을 잠시만 돌려보자. 푸른 산은 여느 곳의 봄과 다를 바가 없다. 경순왕릉에서 남방한계선은 불과 200m거리다. 사라진 먼 옛날 신라의 마지막 왕이 고요한 민통선에서 자리를 지키며 잠들어 있다. 경순왕인들 천여년 후에 이곳이 지뢰로 덮이고 군인들이 득실대는 지역으로 바뀌는 역사를 짐작인들 했겠는가.

신라의 왕 중에 유일하게 경주를 떠나 경기도에 묻힌 역사의 배경을 생각해본다. 까마득히 머나먼 천년 전 왕국의 몰락에 지금 가슴이 저려 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경사가 가파른 무덤가의 잔디는 주르륵 미끄럼을 타고 싶은 유혹이 일만큼 미끄럽게 고왔다.

“아침부터 종일 북한이 빤히 보이는 곳만 다닌 소감이 어때?”
“자칫 한눈 팔면 나도 모르게 넘어가게도 될 수 있잖아.”
“넘어가면?”
“용천으로 가서 폭발사고 현장에서 복구 봉사를 하겠지.”

▲ 경순왕릉으로 올라가는 길가의 '지뢰' 표지판.
ⓒ 한성희
시답잖은 얘기를 주고 받으며 민통선 지역을 떠나 달리는 차안에서 임진강변에 내려앉는 해의 그림자를 본다. 강변의 황혼이 뜨거운 낮의 정열을 식히려고 강물의 물비늘 속에 나른히 녹아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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