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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진방남(秦芳男)이 노래한, 또는 반야월(半夜月)이 작사한 군국가요들을 살펴보면서 자주 거론된 이름이 하나 있었다. <소년초(少年草)> <결전 태평양> <일억 총진군> <국경선 보초병>의 작곡자, 바로 이재호(李在鎬)(1919-1960)라는 이름이다.

1939년 조선의 음반업계에는 지각변동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만한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그때까지 존속하고 있던 다섯 군데 음반회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았던 태평레코드가 대대적인 혁신을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인가수로 등장해서 단숨에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남인수(南仁樹)와 자웅을 겨루는 거물로 성장한 백년설(白年雪)이 떠오르는 태평레코드의 간판격이었다면, 그 뒤를 든든하게 받친 작곡가 이재호는 태평레코드에서 둘도 없는 버팀목이었다.

<나그네 설움>(1940년 2월), <번지 없는 주막>(1940년 10월), <대지의 항구>(1941년 4월) 등 194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재호·백년설이 함께 만들어 발표한 곡들은 두 사람의 대표작을 넘어 우리나라 가요사의 대표작으로 기록되고 있다.

천재적인 음악성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만 이재호의 작품세계는 반드시 새롭게 조명받아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하지만 빼어난 그의 공적과 아울러 그의 과오, 즉 군국가요 작곡이라는 부분도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미 언급한 네 곡 외에도 태평레코드를 통해 이재호 작곡으로 발표된 군국가요는 세 곡 정도가 더 확인되고 있다. 1943년 1월에는 <천리 전장(戰場)>(처녀림(處女林) 작사, 이인권(李寅權) 노래, 음반번호 5054), 2월에는 <전선의 달>(박향민(朴鄕民) 작사, 이인권 노래, 음반번호 5061, <전장의 달>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3월에는 <달 있는 모항(母港)>(처녀림 작사, 이인권 노래, 음반번호 5069)이 차례로 발표되었다.

위의 세 곡도 아직 음원이나 가사지가 공개되어 있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군군가요라는 것은 이미 제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달 있는 모항>은 태평레코드 신보 소개책자에 ‘달 밝은 조국(祖國)의 잔교(棧橋)에는 오늘밤도 희망(希望)을 속삭이는 갈매기가 운다. 파도 높은 태평양(太平洋)을 무찌르고 일장기(日章旗) 높이 단 잠수함(潛水艦)의 용자(勇姿)를 보라. 이인권군(李寅權君)의 새로운 국민가요(國民歌謠)’라는 선전문구가 실려 있기도 하다.

<천리 전장> <달 있는 모항>의 작사자 처녀림은 이미 본 바와 같이 활발한 작사 활동을 하며 태평레코드 문예부장까지 지내다가 광복 이후 월북한 박영호(朴英鎬)의 필명이다. <전선의 달>을 작사한 박향민은 주로 연극계에서 활동하면서 소설, 수필 등을 쓰기도 했던 인물로, 1943년에 태평레코드에서 유행가 가사 몇 편을 발표한 흔적이 보인다.

공교롭게도 세 곡 모두를 부른 이인권(1919-1973)은 마치 군국가요를 많이 부른 가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그가 부른 군국가요로 현재 확인되는 것은 위 세 곡이 전부이다.

1938년에 빅터레코드에서 첫 음반을 발표한 이인권은 이후 오케레코드로 옮겨 활동하면서 <꿈꾸는 백마강> 등을 발표해 인기를 모았고, 1942년에는 오케레코드를 떠나 태평레코드로 자리를 옮겼다.

오케레코드에서 활동할 당시에 발표한 작품 가운데에는 군국가요로 볼 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지만, 1943년이라는 시점에서는 이인권 역시 군국가요를 피하긴 어려웠던 것이다.

폐 한 쪽을 잘라내면서까지 치열하게 병마와 싸우면서 <고향에 찾아와도> <산유화> <아네모네 탄식> 같은 명작을 남긴 이재호가 정작 일제 말기에 강압적인 전시체제의 압력에는 굴복하고 만 것이 과연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그 어떤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릇된 현실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긴 것은 이재호의 이력에서 지울 수 없는 오점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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