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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혈서>나 <아들의 소식>과 같이 제목에서 ‘아들’이라는 말을 사용한 군국가요를 더 찾아 보자면, <아들의 최후>(처녀림(處女林) 작사, 작곡 미상, 하동춘(河東春) 노래, 태평레코드 5043, 1942년 8월 발표), <조국의 아들>(작사·작곡 미상, 진방남(秦芳男) 노래, 태평레코드 5027, 1942년 2월)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가사는 물론 작자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제목만으로도 이미 군국가요적 색채가 느껴지는 곡들이다. 특히 <조국의 아들>은 ‘국민가’라는 명칭이 붙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군국가요임이 거의 확실하다고 하겠다.

<아들의 최후>를 작사한 처녀림은 광복 이전 유행가 작사가로 조명암(趙鳴岩)과 함께 쌍벽을 이루며 활동하다가 월북한 박영호(朴英鎬)(1911-1953)의 필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가수 하동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942년에서 1943년에 걸쳐 태평레코드에서 가수 활동을 하며 여섯 곡 정도를 발표했다는 것, 그리고 광복 이후 1947년에 한 차례 무대에 등장한 기록이 있다는 정도가 현재 하동춘에 관해 알 수 있는 내용의 전부이다.

하동춘과는 달리 <조국의 아들>을 부른 진방남(1917-)은 당시 태평레코드를 대표하는 인기가수였다. 1939년 12월에 <사막의 애상곡>이라는 작품을 불러 등장한 그는 1943년 말에 음반 생산이 중단되기까지 약 50곡 정도를 발표했다. 그러나 진방남이 우리 나라 대중가요 역사에 크게 이바지한 것은 가수보다는 오히려 작사가로서의 면모였다. 20세기 후반에 가장 뛰어난 대중가요 작사가로 활동하며 수많은 걸작을 발표한 반야월(半夜月)이 바로 그의 필명이기 때문이다.

가수로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진방남이 작사에 손을 대어 반야월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1942년. 처음에는 가수로 활동하는 틈틈이 가사를 쓰는 정도였지만, 광복 이후 주요 작사가들이 월북, 타계 등의 이유로 무대에서 사라지자 작사가 반야월의 존재가 점차 뚜렷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1950년대부터는 주로 작사에 전념하여 맹활약한 탓에 오히려 가수 진방남보다 작사가 반야월로 더 잘 알려졌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가수 진방남이든, 작사가 반야월이든 당대의 다른 작가, 가수들과 마찬가지로 군국가요 제작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앞서 살펴본 <소년초(少年草)>나 위에서 언급한 <조국의 아들> 외에 가수 진방남이 부른 군국가요로 추정되는 작품으로는 <아세아의 종>(작사·작곡 미상, 태평레코드 5007, 1941년 7월), <조국의 아들>과 같은 음반에 실려 국민가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지원병의 아내>(작사·작곡 미상, 태평레코드 5027, 1942년 2월) 등이 있다.

또 반야월이란 이름으로 가사를 지어 발표한 작품으로는 국민가 <결전 태평양>(이재호(李在鎬) 작곡, 진방남·태평합창단 노래, 태평레코드 5024, 1942년 2월), 역시 같은 음반에 실린 국민가 <일억 총진군>(이재호 작곡, 태성호(太星湖)·태평합창단 노래, 태평레코드 5024, 1942년 2월), <국경선 보초병>(이재호 작곡, 백난아(白蘭兒)·태성호 노래, 태평레코드 5031, 1942년 4월) 등이 있다.

콜럼비아레코드나 오케레코드와 달리 태평레코드에서 나온 노래들은 관련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진방남, 반야월과 관련있는 이러한 노래들은 <소년초>를 제외하고는 가사나 음원이 전혀 공개돼 있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 제목만으로도 이미 군국가요적 색채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곡들이기도 하다.

흔히 알려져 있기로는 반야월이 처음으로 작사해 발표한 곡이 <넋두리 이십 년>, <꽃마차> 등이라고 한다. 하지만 설령 그러한 작품을 먼저 썼다고 할지라도, 실제 음반으로 먼저 발표된 것은 <결전 태평양>과 <일억 총진군>이다. 같은 음반(태평레코드 5032) 앞뒤로 실려 있는 <넋두리 이십 년>과 <꽃마차>가 발표된 시점은 <결전 태평양> 등 보다 두 달이나 늦은 1942년 4월이기 때문이다.

밤을 새워 가사 초안을 써서 검열 담당자에게 보내면 태반이 붉은 칠로 뒤덮여 돌아오곤 했다는 진방남, 즉 반야월의 술회를 들어보면 유행가 가사 하나도 위협을 받으며 써야 했던 일제 말기의 암울한 상황을 일부나마 짐작할 수 있다. 자칫 잘못해 미운 털이라도 박히는 날이면 징용이니 징병이니 하는 명목으로 끌려가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었으니, 암울한 시대에 위태롭기만 했던 줄타기의 고뇌를 겪어 보지 않은 후대인이 함부로 이들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누구라도 공과(功過)는 아울러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더하거나 덜 것 없이 있는 그대로 평가를 하면 될 일이다. 다만 작사가로서 60년이 넘는 역정을 밟아 온 반야월의 첫 걸음이 하필 <일억 총진군>과 같은 것이었다는 점에는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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