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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와 충청남도가 친일논란이 제기되고 있는 월전 장우성(92) 화백에게 두 번씩이나 계속해 유관순 열사의 영정제작을 맡겨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부 미술계 인사들과 민족단체들은 "항일운동의 국민적 상징인 유 열사의 영정을 친일 경력이 있는 화백에게 의뢰한 것은 말도 안된다"며 영정제작의 중단과 함께 새로운 작가 선정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영정제작의 발주처인 천안시 사적관리소는 "심사숙고해 작가를 선정했다"며 반발여론에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

끝나지 않는 유 열사의 고통

▲ 이화학당 재학시절 유 열사의 모습. 본래 모습에 가깝다.
ⓒ 유관순 연구소
"3월 하늘 가만이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어릴 때 누구나 한번쯤 불러봤을 '유관순 노래'의 한 구절이다. 1902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난 유관순 열사는 1919년 아우내 만세운동을 주도, 일본관헌에게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일제의 폭행과 고문에 못이겨 1920년 10월 12일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유 열사는 옥중에서도 "나는 한국사람이니 너희들에게 재판받을 필요가 없다"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잔혹함 탓에 순국 뒤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시신도 없는 애잔함 탓일까. 유 열사는 아직도 많은 국민들에게 3월이면 가장 기억되는 독립운동가로 남아 있다.

충남 천안은 유 열사의 고향으로 각종 추모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작년 4월 1일에는 '유관순 기념관'도 문을 열었다. 하지만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천안에서는 지금 '유관순 열사를 두 번 죽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는 사적 203호로 지정된 유관순 열사 유적이 있다. 이곳에는 기미년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유 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추모각과 동상, 영정, 초혼묘 등이 조성돼 있다.

열사의 영정이 봉안된 추모각은 지난 1972년 15평 규모로 지어졌으나 장소가 협소해 1985년 3월 1일 15평에서 26평으로 증축됐다.

영정은 1974년 이현근 화백이 좌상으로, 1978년에 조중현 화백이 입상으로 제작해 모셔 오다가 1985년 추모각이 증축되면서 월전 장우성 화백이 좌상으로 제작해 1986년 8월15일 추모각에 봉안됐다.

장우성 화백이 제작한 영정은 교과서와 각종 언론매체에 자주 등장, 유 열사의 이미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몇해전부터 현재 영정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되며 영정을 새롭게 제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지난 86년 장우성 화백이 제작한 영정의 첫 번째 문제점으로 제기된 것은 '영정이 유관순 열사의 모습과 다르다'는데 있다.

'죄수 사진' 기초로 그린 탓에 유 열사 모습 심각하게 왜곡

온갖 폭행과 고문으로 유관순 열사를 살해하고 무덤까지 말살한 일제가 찍어놓은 유 열사의 '죄수 사진'을 기초로 영정이 그려진 탓에 유 열사 모습이 심각하게 왜곡됐다는 것.

이런 주장은 지난 2002년 천안시가 발주한 '유관순 열사 탄신 1백주년 기념사업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맡았던 천안대 유관순연구소의 용역보고서에서도 언급됐다.

보고서에는 "유 열사가 이화학당 시절 찍은 사진과 추모각에 봉안된 영정의 세로와 가로 비율을 비교한 결과 현재 영정은 실제 모습에 비해 너무 넓은 얼굴로 그려졌다"고 적혀 있다.

특히 "영정의 기초가 된 서대문 형무소 수감시 찍은 유 열사의 사진은 구타와 고문으로 인해 턱과 코, 눈부분 등이 심하게 부어올라 유 열사 본래의 청순하고 순진한 모습보다는 수심이 가득찬 모습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연구소 관계자는 "얼굴 세로길이를 '1'로 할 때 유 열사의 얼굴 비율이 이화학당 사진 0.7, 수형기록표 사진 0.75, 표준영정 0.83으로 제 모습이 아니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미술계에서는 영정을 그린 화가의 적정성도 도마에 올랐다. 김민수 전 서울대 미대 교수는 지난 2002년 펴낸 자신의 저서 '김민수의 문화디자인'에서 '장우성 화백이 유 열사 영정을 제작할 만한 인물인가'라고 의문을 던졌다.

김 전 교수는 "장우성 화백은 지금까지 알려진 친일미술가 50인 중 한 사람으로, 영정에서 18세 꽃다운 유 열사의 얼굴을 은폐시키고 일제의 죄수사진 보다 더 부어 오른 중늙인이의 모습으로 심하게 왜곡시켜 놓았다"고 비판했다.

깨끗한 '붓'은 없는가

▲ 서대문형무소 수감당시 촬영된 유 열사의 '죄수사진'. 현재 영정은 이 사진을 기초로 그려졌다.
ⓒ 유관순 연구소
장우성 화백이 제작한 영정의 문제점이 계속 드러나자 유관순기념사업회, 이화여고총동창회, 유열사 종친회, 유관순연구소 등 4개 기관은 지난해 5월 천안시에 "영정을 새로 제작해 달라"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한 천안시 사적관리소는 시비 5000만원, 도비 5000만원 등 총 1억원의 제작비로 유 열사 표준영정을 다시 제작키로 결정하고 같은 해 6월 설치계획을 수립했다. 12월에는 2004년 3월말까지 설치를 완료키로 하고 화가와 계약도 체결했다.

그런데 천안시는 영정 제작자로는 월전 장우성 화백이 다시금 선정됐다. 이와 관련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새 영정은 다른 화가에게 맡길 것을 부탁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새로운 영정제작을 반겼던 민족단체들은 정작 새 영정제작을 맡은 이가 장우성 화백이라는 사실이 최근 뒤늦게 알려지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친일 혐의가 불식되지 않고 있는 장우성 화백한테 또다시 영정제작을 맡기는 것은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특히 이들은 새 영정제작이 단지 사실과 다른 얼굴을 교정하는 것 뿐만 아니라 당초 잘못된 화가 선정을 바로잡는 의미도 적지 않은데 천안시가 이를 저버렸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김민수 전 교수는 "왜곡된 그림을 바로 잡는 것은 그림의 크기만이 문제가 아니라 화가 자체의 문제도 포함된다"며 "더 이상 논란이 제기되지 않는 화가가 영정 제작자로 선정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천안민주단체협의회 김지철 의장은 "친일행적을 가진 사람에게 천안시와 충남도가 유 열사 영정 제작을 두 번이나 맡기는 것은 국민들의 친일청산 의지를 경멸하고 역사를 모독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김 의장은 "지금이라도 새로운 화가에게 영정 제작을 맡겨야 한다"며 "예산이 문제가 된다면 국민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이라도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적관리소 "영정제작자로 손꼽히고 본인도 원해서 맡겼다"

사적관리소 김영석 관리담당은 "다른 화가들을 물색해봤지만 고사하는 사람이 많아 쉽지 않았다"며 "장우성 화백이 영정 제작자로서는 국내에서 손꼽히고 본인도 원했기에 맡겼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미술협회 천안시지부 현남주 지부장은 입장을 달리했다.

현남주 지부장은 "장우성 화백은 미술계내 서울대 학맥의 거두이다. 다른 학맥을 찾아보면 새 영정을 제작할만한 유능한 화가는 얼마든지 있다"며 천안시의 편의적인 일처리를 꼬집었다.

사적관리소는 영정 제작이 처음 계획보다 늦어져 문화관광부의 심의를 거친 뒤 8·15 광복절이나 10월 12일 유관순 열사 순국일에 맞춰 추모각에 봉안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 25일(수) 오후 3시경 친구와 함께 유관순 열사 추모각을 참배한 배선옥(여·23·병천면 병천1리)씨는 "화가의 친일논란에 휩쓸리지 않는 제대로 된 유관순 열사 영정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월전 장우성, 주요 역사인물 영정 제작
일제시대 '반도총후미술전' 초대작가로 참여

▲ 천안시 사적관리소에 봉안된 유관순 열사 영정. 이 영정은 친일의혹을 받고있는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이다.

아산 현충사와 정읍 충렬사의 이 충무공 영정, 경주 남산의 김유신 장군 영정, 예산 충의사의 윤봉길 의사 영정, 모두 월전(月田) 정우성 화백이 제작해 봉안한 영정들이다.

1912년 경기도 여주군 홍천면 외사리에서 출생한 장우성(92) 화백은 18세 때 이당 김은호의 문하로 한국화에 입문, 평생을 한국화에 헌신한 근대 한국화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전통적인 문인화의 격조를 현대적으로 변용시켜 새로운 한국화의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 입선 화가로 데뷔한 이래, 연속 4회 특선으로 추천작가, 서울대 미대 교수직을 거쳐 워싱턴에 동양예술학원을 개설해 후학을 지도하는 등 예술가로서의 작업과 미술교육자로서의 길을 함께 걸어왔다. 예술원 회원으로 현재는 월전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친일 미술인 50인으로 분류

▲ 장우성 화백
장우성 화백의 친일 논란은 스승인 김은호 화백과의 관계, 반도총후미술전의 초대작가로 위촉된 점이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전남대 부교수였던 이태호씨는 지난 1992년 학고재에서 발간된 '근대한국미술논총'에 실린 <1940년대 초반 친일 미술의 군국주의적 경향성>이라는 논문에서 장우성 화백을 스승 김은호와 함께 친일미술인 50명으로 분류했다.

장우성 화백의 '반도총후(半島銃後)미술전' 참여 경력도 그의 친일혐의를 뒷받침하고 있다.

작년 4월 역사비평사가 펴낸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에서 미술평론가인 윤범모씨는 <일제를 위하여 붓을 잡은 화가들>을 기술, 친일 화가들의 면모를 공개했다.

이 글에서 윤범모씨는 1942년부터 44년까지 조선미술협회 주최로 세 번 개최된 대규모 전람회인 '반도총후 미술전'이 전선이 아닌 후방에서의 전쟁지원 차원의 미술전이었다고 폭로했다.

총독부 정보과와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원으로 개최된 반도총후 미술전 위원회에는 이상범, 김은호, 초대작가에는 김기창, 김인승, 심형구, 장우성 등이 참여했다. 당시 제출된 작품 제목은 '방공훈련', '폐품회수반', '총후의 백성', '징병제도를 맞이하며' 등등이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친일단체 가입경력이 있는 장우성 화백한테 유관순 열사 영정 제작을 다시 맡긴 것은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기자는 장우성 화백의 입장을 듣기 위해 월전미술관(서울시 종로구)에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요청했다. 하지만 장 화백은 노환으로 지난 주 병원에 입원, 인터뷰는 성사되지 못했다.

월전미술관의 유철하 학예실장은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유관순 열사 영정 제작은 60~70% 진척된 상황"이라며 "역사재평가의 일환으로 과거 공과를 따지는 것은 환영하지만 일률적인 소급적용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특히 이미 제작된 표준영정을 다시 제작하거나 이미 제작중인 영정의 작가를 교체하는 것은 관례에도 어긋난다고 덧붙였다. / 윤평호

덧붙이는 글 | 바른지역언론연대 회원사인 충남시사 298호에도 게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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