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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12월 24일 밤 기자는 백악관 앞에 갔다가 뜻하지 않게 한 기인을 만난 일이 있다. 스페인 태생의 콘셉션 피시오토(60) 할머니는 백악관 앞에 움막을 지어 놓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 안에서 23년째 먹고 자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녀는 백악관을 가리키며 "저 안에 악마(evil)가 살고 있다"는 독설을 서슴지 않고 되풀이 해 기자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 창문을 열면 바로 내다보일 거리에서 "네가 악마다! 네가 먼저 대량 살상무기·핵무기 포기하라!"고 외쳐 댄다는 것은 분명 미친 짓이었다.

기자는 지난 1년 동안 종종 그녀를 떠올리며 그녀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의미를 곱씹어 보곤 했다. '더 많이, 더 높이'를 모토로 모두가 들쳐 날뛰고 있는 요즘 세상에, 더구나 모든 선악의 판단 기준이 누군가에 의해 독점 당한 채 박수부대가 되지 않으면 살아 남기 힘든 요즘 세상에 그녀는 단연코 '반골'이었다. 세상을 거스르며 산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던가! 그녀가 준 충격은 컸다.

미국 전역에 오렌지 경보가 내려진 가운데 지난 12월 28일 기자는 워싱턴으로 향했다. 플로리다에서 워싱턴D.C로 가는 15시간여의 자동차 운전 중에도 그녀의 안전이 못내 궁금했다.

1년 전 그녀를 만난 후로 미국이 진두 지휘하는 역사 진행의 속도가 무척이나 빨라져 버렸다. 설마 했던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고, 후세인이 잡혔고, 리비아는 핵 포기 선언을 했고, 내리막길을 달리던 부시의 인기는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고….

백악관 앞으로 이어지는 66번 고속도로를 타고 두려움과 함께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백악관 앞 라파이엣 공원에 도착한 것은 28일 밤 8시경.

도중에 "수상한 행동을 보면 신고하라"는 고속도로 전광판 문구를 여러 번 지나쳤다. D.C 곳곳에 경찰차가 서 있었고, 골목 골목 경찰들이 지키고 있는 것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정복을 입은 경찰들과 '요원'으로 보이는 사복들은 무전기를 귀에 댄 채 어디론가 통신을 계속하고 있었다.

백악관으로 들어가는 길목 양쪽에는 컨테이너가 설치되어 일단의 병력이 머물고 있는 듯했고, 자전거를 타고 무장한 경찰들이 주변을 돌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백악관 하늘 주위를 중무장한 듯한 비행기가 선회 비행을 하고 있었다. 으스스했다.

그 와중에도 백악관 옆 스케이트 링크에는 휘황찬란하게 불이 밝혀진 가운데 스케이팅을 즐기고 있는 청소년들의 모습도 보였다. 백악관 앞 라파이엣 공원 쓰레기통에 쓰레기들이 소복이 쑤셔박혀져 있는 것으로 보아 크리스마스 전후로 제법 많은 방문객이 다녀간 듯 보였다.

그러나 지난 5년간 세 차례나 비슷한 기간에 이 곳을 방문했던 기자의 눈으로 보기에 예년에 비해 방문객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백악관 뒷편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라야 고작 2백여명을 넘지 않을 것으로 보였고, 백악관 정문 앞에는 십 수명의 방문객들이 경찰들의 눈치를 살펴가며 기념 사진을 찍고는 총총히 사라지고 있었다.

백악관 주변 도로가에 쉽게 주차에 성공하고 백악관 정문 앞 움막집을 향해 라파이엣 공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총총 걸음으로 두리번거리며 먼발치로 살펴보니 1년 전 그 움막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은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움막 앞으로 다가선 기자를 맞아 준 것은 콘셉션 피시오토 할머니가 아니라 웬 늙수그레하고 초췌한 모습의 백인 남자였다. 가슴이 덜컹했다.

-아니, 여기 콘셉션 할머니는 어디갔나?
백인 남자: "(경계어린 눈빛으로) 왜 그녀를 찾나. 그녀는 지금 여기 없다."

-지난해 그녀를 여기서 만났다. 보고 싶어서 왔다.
"그녀는 방금 전 우리 집으로 샤워하러 갔다. 두 시간쯤 있으면 돌아올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나의 이름은 에이시 기어하트(Acie Gearhart), 그녀의 친구다."

-'동업자' 인가?
"'동업자'는 아니다 1983년 가족과 이곳을 방문했다가 그녀의 친구가 되었다."

-왜, 어떻게 친구가 되었나.
"(사진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옆 베니어 게시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바로 이 해골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하는 일에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친구가 되기로 했고, 종종 그녀 대신 자리를 지켜 주고 있다."

올해 67세라는 에이시 기어하트는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자신은 반전-반핵운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고 그녀와 그저 친구로 지낸다는 말을 애써 강조했다. 그가 1983년 콘셉션 할머니의 움막을 방문했을 때 충격을 받았다는 사진은 1945년 히로시마 원폭 사망자들의 해골 모음 사진이었다.

기자가 다시 백악관 앞 움막을 찾은 것은 12월 31일 오전 10시경이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그녀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나를 기억하는가.
콘셉션 할머니: "기억한다. 그래, 코리안, 코리안! 왜 다시 왔는가."

-1년 동안 별 일 없었는가.
"아니, 별 일 있었다. (기자의 손을 잡아 끌어 자신의 머리로 당기며) 여기 좀 만져 봐라."

- 아니 왜 가발을 썼는가. 머리는 왜 이리 딱딱하고!
"(얼굴을 기자에게 바짝 들여 보이며) 내 코와 뺨의 상처가 안보이는가. 머리도 온통 피멍 투성이다. 그래서 헬멧을 머리에 쓰고 그 위에 가발을 입힌 것이다."

- 아니, 왜 이렇게 됐는가.
"해군들한테 맞아서 그렇다. 여러 번 맞았다."

-신고도 안했나?
"신고했다. 후다닥 때리고 도망간 해군을 어떻게 찾아 내겠나."

-무섭지도 않나. 언제까지 이럴 작정인가.
"무섭긴. 이 일을 하다 6개월간 감옥에 들어가 있기도 했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하나님이 나를 도와준다."

-아직도 저 건물에 악마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다. (손가락을 백악관 쪽으로 향하며) 저들은 악마다."

-당신도 기독교인이고 부시도 기독교인인데 그를 악마라니.
"(백악관을 가리키며) 저들은 가짜다. (게시판 사진을 가리키며) 여기를 봐라. 하나님이 핵무기로 사람들을 이렇게 죽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핵무기를 쓰는 사람은 핵무기로 죽을 것이다."

기자가 재차 다음 질문을 하려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30여m 앞쪽에 있던 경찰이 경찰차에 몸을 기댄 채 계속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고, 이번에도 어디론가 통신을 계속하고 있었다. 갑자기 오른쪽 머리 등성이가 근질거렸고, 어디선가 주먹과 곤봉이 날아들 것만 같았다.

▲ 백악관 건물이 뻔히 보이는 라파이엣 공원 앞에 비닐 움막을 지어놓고 24년째 반전-반핵 시위를 벌이고 있는 콘셉션(60) 할머니가 지난달 31일 오전 10시경 몰려든 비둘기 떼에 먹이를 주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 김명곤
기자는 짐짓 움막을 뒤로 하고 주차장 쪽으로 몸을 돌려 여행객 행보로 라파이엣 공원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기에 뒤돌아 봤더니 콘셉션 할머니가 움막 뒤편으로 돌아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들고 나온 비닐봉지에서 먹이를 한줌씩 꺼내 모여든 비둘기 떼에게 흩뿌려 주기 시작했다.

기자는 그녀가 먹이를 주는 장면을 재빨리 카메라에 담고 공원을 걸어 나오다 정말 등골이 오싹하는 경험을 해야 했다. 갑자기 40여m 앞쪽 왼편으로부터 한 백인 사내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기자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방금 전 기자가 백악관 정문 앞쪽으로 들어 올 때 주위를 왔다 갔다 하며 어딘가로 전화를 계속하고 있던 백인 남자였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태연한 척 걸음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싹 다가오더니 그냥 앞을 지나치는 것이었다.

휴! 안도의 한 숨을 쉬며 차를 돌려 백악관 왼쪽 골목을 빠져 나오고 있는데 저 앞쪽에서 경찰차 여러 대가 불을 번쩍이며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20여분이 걸려 통과하다 보니 운전자 없이 길 옆에 세워둔 이사짐차를 포위하고 검색을 하려는 찰나였다.

귀갓길에 하나의 상념이 기자의 머릿속을 뒤스럭스럽게 만들었다. 도대체 이 시대에 '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악'을 누가 정의해야 하는가. 3년여 전에 부시 대통령이 꺼내놓고 즐겨 사용하는 '악의 축'과 콘셉션 할머니가 되받아쳐 사용하는 '악마'의 콘셉션(conception; 개념)은 어떻게 다른가.

어느덧 이 시대의 최대 화두가 되어 버린 '악이란 무엇이냐. 악의 개념을 누가 정의해야 하느냐'를 놓고 지구상 여기 저기서 주먹을 휘두르는 자들과 머리에 헬멧을 쓰고 살아야 하는 콘셉션 할머니의 악다구니 소리로 2004년 역시 지구촌은 다사다난할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플로리다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한국주간>(Korea Weekly of Florida) 1월 8일자 신문에도 함께 실릴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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