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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인규
지금 미국은 최대의 쇼핑기간이다. 추수감사절이 있는 11월 말부터 12월 말의 크리스마스까지 백화점과 대형상가는 발디딜 틈 없이 붐빈다. '크리스마스 쇼핑기간(Christmas shopping season)'으로 불리는 이 한달 동안 대부분의 매장에서는 대대적인 할인판매를 한다. 특히 추수감사절 다음날 아침에 시작하는(흔히 '블랙 프라이데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할인행사에는 새벽부터 도착해서 문도 채 열지 않은 매장앞에 수십 미터씩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더 많이 살수록 더 많이 아낄 수 있다(The more you buy, the more you save)"는 표어만큼 미국의 소비문화를 잘 말해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시적 모순'에 가까운 이 구호는 대체로 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미국인들이 왜 평생 카드빚에 허덕이며 사는지를 설명해 준다.

내일의 소득을 오늘의 소비로 탈바꿈시키는 이 마법은 "지금 사서 절약하세요(Buy now and save)"라는 표어에 잘 나타나 있다. 청교도적 근검정신으로 무장한 미국의 소비자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더 많이 절약하기 위해서' 열심히 소비하고 있다.

미국인들이 가장 많은 소비를 하는 한 달간의 크리스마스 쇼핑기간 속에는 기독교 이념으로부터 시작해 가정의 가치, 그리고 상업문화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모든 것'이 녹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는 미국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더 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ADTOP@
추수 감사절을 살려낸 '새라 헤일'

11월 세째주 목요일. 이 때가 가까오면 미국인들의 일의 능률은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한다. 머리 속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일정을 짜는 학생들 귀에 수업내용이 들어올리 없고, 상사들 눈을 피해 광고전단을 소리없이 넘기는 직장인들 눈에 업무내용이 들어올 리 없다. 이렇게 해서 한 두 주를 기대와 설렘으로 (그리고 몽상으로) 보내고 나면, 추수감사절 전날 수요일의 공항과 도로는 귀향객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수업을 빨리 마쳐달라고 조르는 학생들과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을 보면, 이것이 미국의 추수감사절인지 아니면 한국의 추석연휴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다. 이렇게 해서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부모 형제들과 함께 주말을 보내며 끊임없이 먹고 마시고, 또 물건을 산다.

많은 사람들이 추수감사절(Thanksgiving)을 미청교도의 첫 수확기념이래 지금까지 전해내려온 행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추수감사절을 지금과 같은 전국적 연례적인 행사로 지내게 된 것은 첫 추수감사절로부터 두 세기 반이나 지난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다. 1863년 링컨 대통령은 새라 헤일(Sarah Josepha Hale)이라는 여성지 발행인의 간청에 따라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전국적인 명절로 선포하게 된다.

청교도들이 1621년에 행했던 첫 추수감사 이후 같은 세기에 서너 차례의 유사한 행사가 있었지만, 이것은 모두 비정기적인 일회성 축제로서 뉴잉글런드 지방에 국한된 지역행사였을 뿐이다. 이후 18세기 말에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추수감사절을 전국적인 명절로 선언한 적이 있었지만, 이 전통은 후대에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전통을 살려낸 것이 언론인 '새라 헤일'이었던 것이다.

링컨에 의해 마지막 목요일로 결정되었던 추수감사절은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한 주 앞당겨진다. 이유는 간단했다. 경제공황을 겪던 당시,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에 이르는 기간을 한 주 더 늘려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이 소비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으나, 결국 상점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이 증거하듯, 이 계획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이로써 농민들이 농작물 수확에 대해 감사하는 만큼 기업가들도 돈다발 수확에 대해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구두쇠 친구 '숀 밴쿠어'

모두가 돈을 쓰는 때이니만큼, 구두쇠로 소문난 친구 숀 밴쿠어(Shawn Vancour)가 소비의 유혹을 받았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절친한 학과친구인 그는 뉴욕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한 후 위스콘신으로 옮겨와 언론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매년 11월 말이면 덜덜거리는 소형 크라이슬러를 몰고 뉴욕으로 향하곤 했다.

추수감사절 이틀 전, 벌써 고향에 가있어야 할 그 친구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기말에 제출해야 할 보고서가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올해는 고향에 가기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는 먹어야 할 것 같기에, 특별히 초대받은 곳이 없으면 함께 저녁을 차려 먹자는 제안이었다.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온 자기 가족의 조리비법을 공개하겠다"는 유혹과 함께.

잠시 후 우리 집을 찾아온 그는 자신의 추수감사절 요리 '마스터플랜'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칠면조, 호박파이, 민스밋파이(mincemeat pie), 크랜베리소스(cranberry sauce), 사탕고구마(candied yam), 감자으깸, 롤빵, 쿠키…" 이걸 다 직접 요리하겠다는 것이다. 음식 준비에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앞으로 남은 이틀 동안 꼬박 요리를 해야된다고 했다. 후회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내가 준비해야 할 재료가 빼곡이 적힌 종이가 놓여있었다.

다음 날 나는 목록대로 장을 본 후 그의 집을 찾았고, 이렇게 해서 이틀간에 걸친 고난이 시작되었다. 꼼꼼한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요리에 관한 한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내가 깎아놓은 감자를 이리 저리 돌려보고는 음푹 들어간 부분에 껍질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고 퇴짜를 놓기도 하고, 애써 만들어 놓은 양념을 혼합비율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개수대에 무참히 쏟아버리기도 했다. 오냐, 어떤 요리가 나오는지 두고 보자.

ⓒ 강인규
첫 요리는 호박파이로 시작되었다. 밀가루에 소금을 뿌리고 버터와 쇼트닝을 반씩 넣어 잘 섞은 후 물을 조금씩 넣어가면서 되직한 반죽을 만든다. 그리고는 그 반죽을 밀대에 잘 펴서 그릇에 담아 파이껍질(crust)을 만든다.

그 다음 껍질을 벗긴 호박을 푹 삶아 으깬 후 계란과 우유, 흑설탕, 계피와 정향(clove) 등의 향신료를 넣고 걸쭉하게 될 때까지 끓인다. 파이 위에 얹을 속(filling)재료로 쓰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이미 만들어 놓은 파이껍질 위에 부은 후 오븐에 넣고 굽는다. 이제 몇 십 분 후면 달콤하고 부드러운 호박파이를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미국에서 호박파이는 구운 칠면조와 더불어 추수감사절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자리잡았지만, 청도교들의 첫 추수감사절 식탁에 호박파이가 올라오지는 않았다.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역사적 사료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은 요리가 미국인들의 첫 추수감사 탁자에 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삶은 야생 칠면조, 불에 구운 거위와 오리, 머스타드를 바른 구운 사슴고기, 옥수수 푸딩, 토끼고기 스튜, 삶은 생선과 가재, 과일과 네덜란드 치즈, 삶은 호박 등.

호박과 옥수수를 비롯해 식탁을 채운 모든 작물들은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길러낸 것이었다. 청교도가 미대륙에 도착했던 11월, 그들은 이미 겨울로 들어서기 시작한 미국 북동부 지방의 혹독한 기후를 예측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집짓는 법과 경작하는 방법을 알려준 인디언들이 아니었다면, 청교도들은 첫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차가운 땅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낯선 이방인들에게 따뜻한 도움의 손을 내밀었던 인디언들이야말로 첫 수확의 잔치에 초대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첫 추수감사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기록으로는 당시 정착민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에드워드 윈슬로(Edward Winslow)의 일기가 유일하다. 그는 당시 인디언들과 함께 보냈던 추수감사축제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작물이 수확되어 들어오는 가운데, 우리의 총독은 네 명의 사내를 보내어 새를 잡아오게 하였다. 이로써 우리들은 (한 해에 걸친) 수고가 맺은 결실을 더 특별한 방식으로 축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새사냥을 떠났던 네 명의 남자들은 주위의 도움을 힘입기는 했지만 단 하루만에 우리 모두가 거의 일주일동안 먹을 수 있을만큼의 새를 잡았다….

많은 인디언들이 함께 참여했는데, 특히 그들의 위대한 왕인 마사소이트(King Massasoit)와 동행한 90여명의 인디언들이 우리와 함께 사흘간 함께 먹고 마시며 즐겼다. 인디언들은 사냥을 나가 사슴 다섯 마리를 잡아왔다. 한 해 내내 지금처럼 풍요를 누린 것은 아니나, 우리는 신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곤궁으로부터 멀리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Winslow, E., Mourt’s Relation, 1622)


이후 추수감사의 전통이 계속 유지되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향후 몇 번 행해진 감사축제에서도 인디언들이 계속해서 초대를 받지 못했다. 미국인들은 인디언들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대신 사냥법을 가르쳐 준 그들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 경작법을 가르쳐준 그들의 시신을 땅 속에 던져넣었다.

추수 감사절에 사라지는 칠면조 4500만 마리

ⓒ 강인규
"파이가 기가 막히게 잘 됐다"고 환호하며 오븐에서 신나게 호박파이를 꺼내는 그 친구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런 저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조상의 후손들이 한가로이 호박파이를 굽고 있을 때,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던 인디언의 후손들은 보호구역의 카지노를 전전하고 있을 터였다. 파이를 식혀서 냉장고에 넣고 나서 나는 그 친구에게 내일 다시 보자며 작별인사를 했다.

다음 날 아침 숀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냉장실에서 사흘간 녹인 칠면조를 오븐 속에 넣고 있었다. 칠면조는 버터와 소금, 그리고 후추를 뿌려 굽는데, 표면이 마르지 않도록 계속해서 옆에 흘러내린 육즙을 발라주어야 한다. 굽고 남은 칠면조의 육즙은 으깬 감자에 뿌려먹는 소스인 그레이비(gravy)의 재료가 된다.

일년간 미국 전역에서 '살해'되는 칠면조의 수는 3억 마리에 달하는데, 그중 추수감사절 하루 동안에 희생되는 것만 4500만 마리가 넘는다. 사람들이 칠면조에 이에 대해 느끼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고안된 행사가 바로 "칠면조 사면(turkey pardoning)"이다.

▲ 부시대통령의 "칠면조 사면(Turkey Pardoning Ceremony)" 행사장면
ⓒ 백악관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미국 대통령은 오븐으로 들어갈 운명인 칠면조 한 마리를 백악관에 데려와서 풀어주는 의식을 행한다. 1947년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이 행사에는 대통령의 제법 진지한 '사면연설'이 따르고, 청중들은 이에 키득거리는 웃음으로 화답한다.

칠면조가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을 무렵, 라디오에서 부시 대통령이 비밀리에 이라크를 방문해서 사병들에게 칠면조를 나누어 주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가족의 명절인 추수감사절에 환한 낯으로 잘 익은 칠면조를 들고 등장한 부시는 미국인들에게는 영악한 정치인이 아닌 온화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비쳤을 것이다.

이후 부시가 들고 있던 칠면조가 플라스틱으로된 가짜였다는 보도가 나오긴 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칠면조 비슷한 것을 들고 환하게 웃는 것 만으로도 부시는 충분히 현실적인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내년 이맘 때 투표장으로 향하는 유권자들의 마음 속에는 부시의 웃는 얼굴과 그의 양 손에 들려 있던 칠면조가 겹쳐 떠오를 것이다. 그가 들고 있던 것은 단순한 고깃덩이 (혹은 속이 빈 플라스틱 통)가 아니라 미국적 가족의 가치와 기독교의 전통, 그리고 가장의 리더십이었던 것이다.

ⓒ 강인규
그런 부시를 향해 '아름답고 순수한' 명절을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전통이 그렇하듯, 추수감사절 역시 그 자체가 정치와 무관한 '순수한' 행사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청교도의 첫 추수감사절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19세기 후반에 와서 뒤늦게 이 행사가 부활하게 된 것은 당시 급증하던 이민자들과 관련이 있다.

각 나라에서 몰려들던 이민자들을 '올바른 미국시민'으로 길러내기 위해서 그들은 17세기의 조상들을 불러낸 것이다. 못 먹고 못 입으면서도 부지런히 일하던 청교도들의 모습이야말로 언어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 '무식'하고 '게으른' 이방인들을 미국인으로 교화시키기 위한 완벽한 본보기였기 때문이다. 당시 청교도들의 '첫 추수감사절'을 확산시키는 데 앞장선 기관이 포드나 플리머스사(Plymouth Cordage Company) 등의 노동집약적 제조업체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크랜베리(cranberry)소스와 사탕고구마(candied yam)
ⓒ 강인규
오븐 속의 칠면조를 이리 저리 찔러보던 친구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그 친구가 탐스럽게 김이 오르는 고기를 손으로 뜯고 있을 때, 나는 그 친구의 지시대로 사탕고구마(candied yam)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선 껍질 벗긴 고구마를 큼지막하게 잘라서 물에 삶는다. 이것을 오븐용 접시에 담고 그 위에 흑설탕과 버터를 섞어서 불에 달인 소스를 뿌린다. 그 위에 호두를 듬뿍 얹어 오븐에 구워낸다. 이 요리 역시 청교도와는 무관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추수감사절을 대표하는 메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 강인규
붉고 새콤한 크랜베리(cranberry) 소스가 준비되고, 저녁용 롤빵 반죽이 오븐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식탁에 수저와 포크가 놓였고, 잔에는 포도주가 담겼다. 이렇게 해서 이틀간의 수고가 대여섯 개의 접시 위에 담겼고, 이렇게 우리의 소산은 두 시간에 걸친 식사와 시답지 않은 농담 속에서 사라져 갔다.

얼마 후, 그 친구가 크리스마스를 위해 뉴욕으로 떠나기 전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우리 집에 들렀다. 그 친구의 손에는 우리의 손에 희생된 칠면조의 '위시본(wishbone)'이 들려있었다. 그는 잘 말린 그 뼈를 건네주면서 내 새해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새의 가슴 위쪽에 있는 그 뼈는 말 그대로 '소원(wish)'을 빌기 위한 것이다. 이 뼈의 양 끝을 두 사람이 잡고 잡아당겨서 부러뜨려 큰 쪽을 쥐는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소원을 빌 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아야 '효과'가 있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 강인규
나는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빌 생각이다. 아울러 그 친구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아, 이런 결국 소원을 말한 셈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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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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