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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시 당하리 정정공파 파평 윤씨 종중의 묘는 40만평에 이르는 방대한 넓이다. 그중 20만평이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모자 미라의 발굴도 이 사적 지정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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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미라에 대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고 기사를 쓴 기자도 놀랐다. 어릴 때 이집트 미라의 환상적인 얘기와 사진에 한 번쯤 관심 갖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기자도 마찬가지다. 황금마스크를 쓰고 관에 누워있는 수천년 전 투탄카멘 왕의 신비함에 홀려 사진을 보던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는 미라와 무관한 지역일 거라는 거리감이 이런 호기심을 더 부추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 거대한 문인석과 윤훈덕씨
ⓒ 한성희
수 백년 혹은 수 천년 전 죽은 인간의 모습이 시간을 뛰어넘어 당시의 옷을 입은 채 나타난다는 건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 기사에 대해 많은 반응을 보인 것은 미라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관심사라는 것을 증명한다.

430년 전 난산으로 죽은 젊은 여인, 게다가 최상류층에 속했던 그 여인의 관에서는 정교한 바늘질로 만든 화려한 금박의 비단옷이 쏟아져 나온 점 등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이리라. 총 66점의 복식류가 출토되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나온 것 중 제일 많은 수치다. 현대 기계로 지은 옷보다 더 정교하게 한 땀 한 땀 누빈 430년 전의 바느질 솜씨를 보면 탄성과 감동이 밀려온다.

그 모자 미라에 대한 뒷얘기에 많은 독자들이 궁금해 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난 기사에 충분히 쓰지 못했던 뒷얘기를 알려고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와동리에 있는 파평 윤씨 종중을 찾았다.

파평 윤씨 종중에서 일하는 윤훈덕씨와 함께 종중 묘역에 당도하고 보니 어마어마한 넓이에 기가 질린다. 수백기가 한 군데 모여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은 오산이었다. 묘역이 있는 산들이 이곳 저곳에 흩어져있어 다 둘러보기란 무리라는 엄살부터 온다.

▲ 사진 중간 불쑥 솟은 두 지점 바로 밑이 모자 미라가 출토된 곳. 비스듬한 산 비탈이다.
ⓒ 한성희
“아침부터 꼬박 돌아도 하루에 다 못 봐요. 저기가 처녀 미라가 나온 곳입니다.”

묘역이 있는 산을 둘로 갈라버린 56번 국지도 밑을 가리키며 윤훈덕씨가 하는 말이다.

윤씨 종중의 묘역을 관리하는 윤훈덕씨는 미라에 관한한 도사(?)다.‘하도 많이 묘를 파헤치다보니’관을 보기만해도 미라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수 백기에 이르는 묘역 관리가 후손이 살이 있을 경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이 복잡한 집안이 얽히고 설켜 돌보는 이가 없으면 묘가 소실되고 나무가 자라는 등 황폐해지기 일쑤라고 한다. 그런 무연고 묘역 정리를 윤훈덕씨가 도맡아 하고 있다.

600여 년을 이곳에서 살아온 집안이고 파평에서 시조가 나와 파주에서만 1천년이 넘게 살았다. 올해로 정확하게 윤기(尹紀) 1111년째라고 한다. 윤씨 문중만 쓰는 달력이다. 단기나 서기만 알다가 윤기라는 말이 독특하게 느껴진다.

핏줄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성씨문화로 많은 문벌가들이 수 백년 이상 족보를 귀중하게 이어가고 있으며, 문중을 중요시한다. 정정공파 파평윤씨 종중도 여진정벌의 공을 세운 고려시대 윤관장군의 후손으로 조선조에 화려한 영욕을 보냈던 집안이다.

▲ 윤번(1384-1448)의 부인 인천 이씨 묘역 앞의 거대한 장명등
ⓒ 한성희
종중의 조직을 보면 수장인 원로회(회장 윤봉용) 밑에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집행위원회(회장 윤교수)가 있고, 26명의 소종중 대표회의가 있다. 대표회의에선 종중의 일을 회의에서 결정 하는 권한이 있고 집행위원회가 결정된 사항을 집행 운영한다.

바로 이런 회의 체제가 있기 때문에 파평 윤씨 묘역이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됐고 미라 발견과 고대박물관에 기부를 결정한 것이다.

파주시 교하읍 일대는 지난 운정지구 1차개발을 지정할 때 토지가 주공에 수용됐다. 20만평이라면 공시지가로 30만원씩 따져도 600억에 이른다. 그러나 이 일대 땅값이 80만원에서 1백만원 이상을 육박하고 있는 점으로 봐서 묘지 일대 가격은 수천억에 달할 수도 있다. 600가구에 2500명의 정정공파 윤씨문중 사람에게 가구당 1억에서 수억에 이르는 돈이 돌아갈 액수다.

문중의 땅을 두고 종종 다툼이 일어나는 것도 이런 막대한 돈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반대하는 소수도 있었지만 개발이 진행되는 교하읍 일대에 조상의 오랜 역사가 담긴 묘역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40만 평 중에서 문화재 가치가 있는 20만평을 2000년 12월 경기도문화재 사적으로 신청하기로 종중회의에서 결단을 내렸다.

또 귀중한 가치가 있는 석물의 분실과 분묘의 도굴이 계속 자행되고 있고 개발로 인해 선조들의 묘역이 분산 이장되는 것을 막아 보존하려고 의도였다. 이후 이 지역에 신도시 개발 발표가 난 것을 보면 선견지명이라 본다.

모자미라가 발견된 곳

▲ 파평윤씨 묘역의 문인석. 후기로 갈수록 문인의 얼굴이 사람과 닮아있다.
ⓒ 한성희
이 묘역엔 드라마의 단골소재인 윤원형과 정난정을 제외하고라도 7명의 정승과 판서 8명, 참판 30명의 묘가 있고,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와 중종의 비인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 세 왕비의 부모가 묻혀있는 곳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석등과 묘석이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건 설명해 주는 걸로 차이가 난다는 점을 겨우 알아차릴 뿐. 비슷비슷하게 생긴 수많은 묘지를 돌아보는 건 고역이었다. 알고싶은 건 모자 미라에 대한 거였는데….

그러나 이런 얘기를 줄줄 늘어놓는 것은 모자 미라가 우연히 발굴된 과정이 사적으로 지정신청 후 문화재 전문위원들이 사적으로 가치가 있는지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도착한 묘역에서 윤훈덕씨에게 죽은 사람의 영혼을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는 망주석에 대한 해박하고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묘지를 보자마자 묘지를 둘러싼 기단이 2단에서 시대가 변하면서 1단으로 지나고 나중엔 석물이 없어진다는 것과 많은 것들을…. 참고로 김우림 박사를 비롯한 고대박물관 팀은 이 묘역을 학술적으로 조사해서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조사 보고서’(고려대학교 박물관 출간)를 펴냈다.

줄줄 나오는 정확한 시대와 인물과 그 주변에 얽힌 자세한 고사 등을 한참 듣다가 취재수첩에 적기를 포기했다. 장편연재 기사를 쓸 각오를 하지 않은 담에야 그걸 다 적을 엄두가 나지도 않거니와 그게 그거 같은 묘지 사진을 찍어도 나중에 어느 것이 먼저고 누구의 묘인지 기자 머리로는 도무지 헷갈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기에.

아무리 선조라지만 그 많은 묘지의 탄생과 사망년도를 정확하게 줄줄 꿰며 부인과 후손과 그뒤에 얽힌 비화까지 나오는 데는 놀랐다. 윤씨문중의 누군가는 윤훈덕씨에게 ‘조상신이 씌웠다’고 우스개 소리를 한다. 절대적인 공감이 간다.

언제 모자 미라가 발견된 곳으로 데려다 주려나 궁금증이 일었지만 꾹 참고 문화재전문위원인 김우림 박사와 윤돈인(1509-1584) 부인 정부인(貞夫人) 광주 김씨 묘를 합장하던 비화를 들었다. 2002년 9월 묘지정화 사업으로 묘역 6기를 한 곳으로 이장했다.

“그 이장을 마치고 10m 정도 떨어진 곳을 윤훈덕씨가 정확히 짚어서 파보자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옆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은 평평한 평지에 무덤 형태조차 없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후손이 돌보지 못하는 무덤은 나무와 풀로 뒤덮이고 석물과 상석이 도난 당하고 무덤이 허물어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 죽은 이의 혼을 저승으로 인도한다는 망주석
ⓒ 한성희
“바로 저곳입니다. 저기 파낸 흙자국이 남았지요?”
“어떻게 거기에 묘가 있는지 알아요?”
“저는 압니다.”

척 보면 안다니 조상신이 내렸다고밖에 볼 수 없다. 회곽묘를 깨내고 외관을 벗기는 순간 미라일 거라고 직감했다고 한다.

“어떻게 알아요?”바보 같은 질문만 되풀이했다.
“묘지를 하도 파헤치다보니 관을 보기만해도 미라인지 아닌지 알지요.”
“미라를 몇기나 보셨나요?”
“두세 번 봤지요.”
“그럼 그때는 왜 기부를 안 했어요?”
“그때만 해도 미처 생각을 못했고 이번 모자 미라만 해도 그렇지 마침 김우림 박사가 고대박물관으로 즉시 연락해서 옮겨갔으니 망정이니 공기를 쐬면 하루만 지나도 썩어요.”

그러니까 미라의 손상을 막기 위해 먼저 고대의과대학으로 옮기고 나중에 종중회의를 거친 셈이다. 윤훈덕씨의 노고가 뒤에 숨어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 윤원형의 어머니 전선부부인 이씨의 묘비 뒤에 쓴 윤원형 친필
ⓒ 한성희
수백년 공기와 차단되어 있던 미라가 공기를 쐬면 변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모자 미라는 공기가 차단된 관 속의 물에 잠겨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발굴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현상은 공기와 차단돼 있던 관을 열면 부장품으로 들어있던 옷들도 색깔이 변한다.

“그럼 앞으로도 무연고 묘지 정리를 계속하면 미라가 발굴될 확률이 많겠네요?”
“그렇겠지요.”
“왜 이곳에서 미라가 자주 나올까요? 혹시 풍수지리에 대해 문중에 전해오는 말은 없나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전해오는 말로는 정희왕후가 이곳을 묘역으로 윤씨문중에 내린 땅이라고 한다. 당시 왕비가 친정에 내린 땅이라면 풍수지리도 고려했을 것이다.

“그런 말은 없고요. 다만 이곳 지질은 물이 없다고 해요. 미라가 자주 나오는 건 물이 없으니 습기가 없고 회곽묘로 둘러싸여 공기가 차단 됐던 이유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시대에 따라 회곽묘도 차츰 없어졌지요.”

있을 법도 하지만 아니라 하니 믿을 수밖에. 관이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장의 풍습 설명을 또 한참 들었다. 그러면서 윤훈덕씨는 묘지가 앉은 곳을 보면 대개 낮은 곳에 있으며 풍수지리학으로 높은 산은 기가 세서 기를 모을 수 없기 때문에 묘지로 쓰지 않는다고 한다.

산을 한참 헤매다 보니 다리도 아프고 다음 번에 올 때는 김밥 도시락이라도 준비해서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미라 발굴한 곳도 봤으니 돌아가고픈 꾀가 난다.

▲ 아름 답고 세련된 뛰어난 비석으로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문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윤사흔 신도비. 현재 고대박물관에 의해 국보로 신청 중이다.
ⓒ 한성희
윤원형 정난정 묘를 찾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역사의 한 장을 풍미했던 윤원형과 정난정 묘는 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승용차로 윤원형 묘역으로 향하면서 잠깐 문정왕후와 윤원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사실 묘역을 찾을 때마다 차로 이동했다.

“여기도 나무가 자라고 온통 엉망이었던 것을 다 정리 한겁니다”
“후손이 없나요?”
“없지요.”

윤원형의 묘는 지금까지 본 크고 화려한 묘역에 비하면 석물과 묘지의 크기도 작고 초라했다. 정난정의 묘는 오른 쪽 뒤 켠에 더 작은 묘로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문정황후가 1565년 3월에 죽고나자 영의정이라는 직위에서 하루아침에 관직을 박탈당하고 그해 10월 유배지에서 죽었다. 정난정(?-1565)이 자결하고 보름 후에 윤원형(?-1565)이 죽었는데 아마도 자살이었을 거라고 문중에서는 추측한다.

리기다 소나무 낙엽이 수북히 깔려 양탄자처럼 푹신한 숲길을 밟으면 내려오면서 소나무 향을 깊숙이 들이마신다. 부귀와 영화가 하루만에 바뀌는 세상을 살았던 두 부부의 묘를 보고내려오는 길은 인생의 허무함과 허망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고보니 쿠데타와 온갖 모략에 정략으로 점철된 문중이네요?”웃으며 농을 건네자 되받아 친다.

“청주 한씨는 뭐 다를 게 있다고? 한 명회만 봐도 그렇고.”

청주 한씨도 조선조에 왕비가 7명이나 배출 됐으니 내막이야 뻔하다. 그러나 기자는 조상에게 죄송할 정도로 문중에 대한 관심도 없고 아는 바가 없으니 더 할 말이 없다. 어느 집안이든 거슬러 올라가면 영욕으로 얼룩진 수많은 이야기가 있으리라.

▲ 윤원형과 정난정 묘역
ⓒ 한성희
“그것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다를 게 없어요. 권력 다툼은 어느 때고 같지요.”

그러나 한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인간과는 달리 소나무 향기는 변함없고 자연도 다시 제자리를 되찾는다. 수백년 전에 죽은 이들의 묘역 주변에 무성한 소나무 숲을 둘러보니 인간은 얼마나 적고 한정된 시간에서 살다 죽는지 절실하게 느껴진다.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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