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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제주도에서 천주교인과 주민들간 충돌로 빚어진 신축제주항쟁('이재수의 난') 당시에 사망한 317명의 명단이 기록된 고문서가 발견됐다.

100여년 전 당시 '이재수 난'으로 불려진 제주항쟁 연구를 통해 천주교측의 세례명이 확인 된 적은 있지만 사망자의 정확한 이름이 밝혀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제주목 초고 문서 추정'

▲ 1901년 제주항쟁(이재수 난) 당시 민군과 천주교회측 사이에 수백명이 희생된 명단이 담긴 중요 사료 '三郡敎弊査實成冊(삼군교폐사실정책)'이 발굴됐다.
ⓒ 양김진웅
올해 제주 신축항쟁 102주년을 맞아 기념 사업 일환으로 역사자료집 발간을 준비하던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회장 김영훈, 김창선)는 당시 사망자 317명의 명단이 기록된 '삼군평민교민물고정책(三郡平民敎民物故成冊)'이라는 귀중한 자료를 발굴했다.

이번 발굴은 기념사업회가 지난 8월 민속학자 고광민 선생(52.제주대학교 박물관)의 소개로 고서적 전문가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발굴된 자료에는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三郡平民敎民物故成冊)'(1901년 9월)과 함께 1901년 6월께 사건을 진압하러 제주에 왔던 찰리사(察理使) 황기연(黃耆淵)이 대정군의 천주교민의 폐단(敎弊)을 기록한 '삼군교폐사실성책(三郡敎弊査實成冊)'(1901) 도 한 권의 책으로 묶어있다.

기념사업회측은 "이면지에 기록한 점, 공식 수결(결제 직인)이 빠져있는 점으로 보아 제주목에서 초고로 작성한 문서로 보인다"고 밝혔다.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 (三郡平民敎民物故成冊)'은 제주목에서 근대법원인 '평리원'(서울에 있던 법원) 의 안종덕 검사에게 보고한 사망자 명단을 적은 문서다.

이 자료를 통해 안종덕이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한(1901. 9)에 '제민물고성책(濟民物故成冊)'이 평리원에 도착했다는 내용도 처음 확인됐다.

특히 '삼군교폐사실성책(三郡敎弊査實成冊)'은 1901년 6월께 이 사건을 진압하러 제주에 왔던 찰리사(察理使) 황기연(黃耆淵)이 작성한 문서로서, 작성 시기로 볼 때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된 '정의군교폐성책'과 동시에 쓰여진 자료다.

'민간과 교민 수백명 희생'

▲ '이재수의 난' 당시 사망자 317명의 명단이 담긴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三郡平民敎民物故成冊.1901년 7월).
ⓒ 양김진웅
이번에 발굴된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 (三郡平民敎民物故成冊)'에 의하면 사망자 수는 총 317명으로 교인 309명, 평민이 8명, 남자 305명, 여자 12명으로 나타났다.

또 삼군의 물고자(사망자) 현황으로 볼 때 제주군(36개 리) 93명, 대정군(26개 리) 81명, 정의군(8개 리) 142명이다.

1901년 '신축항쟁' 또는 1901년 제주항쟁으로 알려진 일명 '이재수의 난'은 당시 민군과 교회측 사이에 제주성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이 전개된 사건으로 그 결과 민군과 교민 쌍반 간에 수백 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전체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교회측에서 대략 500-700백명 정도, 제주에 유배와 있던 김윤식의 '속음청사' 에는 500-600 명으로 기록돼 있다.

'민군 가담자 사망 첫 확인'

지금까지 1901년 제주항쟁 과정에서 사망한 전체 인원 및 명단은 확인되지 않았다.

천주교측에서는 교적에 나타난 사망자의 일부 명단을 갖고 있었지만 그 또한 세례명만 표시되어 있어 실명 확인이 어려웠었다.

특히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등 세 장두는 1901년 10월 9일 처형된 것으로 확인됐지만 나머지 민군 가담자 사망자 명단이 알려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따라서 지역별 사망자 수가 소상히 밝혀진 이번 자료 발굴을 통해 당시 천주교가 각 지역으로 넓게 확산 보급되었음이 다시 확인됐다.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의 역사학자 박찬식씨(43.제주대 강사.근현대사 전공)는 "발굴된 이번 자료로 1901년 항쟁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제주지역의 근대사회사를 연구하는 데도 귀중한 근거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앞으로 마을별 호적 등 고문서와 비교하는 등 구체적이고 면밀한 검토. 분석 작업이 진행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1901년 제주항쟁(이재수의 난) 102주년 기념 행사가 7일부터 30일까지 제주시 열린정보센터 등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발굴된 자료는 오는 8일 출간될 '1901년 제주항쟁 자료집(역사)'에 번역 수록될 예정다.

1901년(신축년) '이재수의 난(亂)'이란
서로 '항쟁과 교난(敎難)'이라는 평행선 달려

19세기가 끝나 20세기가 시작된,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에 제주에서는 중앙 왕실에서 파견한 봉세관(捧稅官)의 조세수탈과 프랑스 선교사를 앞세운 천주교회의 폐단에 저항한 도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인 수백 명(500-700명)이 목숨을 잃고 민란에 참여했던 민중들도 죽음을 당하는데 이를 '이재수의 난' 또는 신축교난(敎難)·교안(敎案)이라고 부른다.

'이재수의 난'은 천주교도들과 제주도 민중 사이의 충돌이 총을 든 전쟁으로까지 발전하면서 수백 명의 인명피해를 가져오고 프랑스와의 국제적인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된 제주도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제주민란(民亂)과 신축교난(敎難)이라는 용어가 함께 불리는 이유는 세금징수와 관련된 학정과 천주교회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정당한 봉기였다는 시각과 수백 명의 천주교도가 피살됨으로써 교회가 수난(박해)을 입었다는 평행한 시각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을 둘러싼 시각의 차이는 당시 사건의 장두(狀頭) 역할을 했던 '이재수'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학계는 민족주의와 민중사관의 입장에서 반봉건, 반제 항쟁으로 보는 의견이 주류를 형성하는 가운데 향촌 사회 내부에 대한 분석과 함께 이재수 등 지도부의 '사(士)' 의식 추적 등으로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당시 반식민지적인 한반도 정세하에서 프랑스 천주교의 교세확장과 그에 따른 폐단, 광무 정권의 조세수탈이 강화되는 시기에 발생한 이 사건은 제주민중운동사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점하고 있지만 제주도민들은 변변한 기념행사를 한번 가져보지 못한 채 100년의 세월을 보낸 부끄러운 '자화상'을 간직하고 있다. / 양김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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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대자(大者)는 그의 어린마음을 잃지않는 者이다' 프리랜서를 꿈꾸며 12년 동안 걸었던 언론노동자의 길. 앞으로도 변치않을 꿈, 자유로운 영혼...불혹 즈음 제2인생을 위한 방점을 찍고 제주땅에서 느릿~느릿~~. 하지만 뚜벅뚜벅 걸어가는 세 아이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