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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광업자이자 친일단체 간부로 활약하기도 했다.
ⓒ 전갑생
최창학(崔昌學·1890년생·창씨명 松山昌學)은 일제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 최대 광업자로, 비행기 헌납, 각종 친일단체 활동을 벌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천만장자 최창학, 조선인 최대의 광업자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 출신인 최창학은 1929년 8월 구성군 관서면 소재 금·은 광산 87만1750평을 광업권으로 설정하면서 삼성금광(三成金鑛)을 창설했다. 그 이후 1938년, 그는 자기 소유의 광산을 일본광업주식회사(日本鑛業株式會社)에 650만 원에 팔아 일명 '천만장자'로 성장했다. 또한, 그는 평북 운산(雲山) 일대에서 광산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연전에 130만 원으로 광산을 팔아서 방응모(方應謀), 원윤수(元胤洙) 등과 함께 광산 성금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1938년 최창학이 평북 구성을 떠나 전가족이 서울에 이사하자 구성군과 평북 세입이 감소하는 사태로 이어졌다고 한다. 당시 최씨는 구성면(龜城面) 1500원, 학교 조합비(學校組合費) 4000원, 평북도비(平北道費 2000원 등 총 7500원을 납부하고 있었으며, 학교 조합비 3분의 1을 부담하고 있었다.

1937년 조선중공업(현 한진중공업)의 조선인 주주로 참여해 1천 주를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대자본가로 성장했다. 또한, 교육 사업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조선미술학교 설립 때 1백만 원을 기부하기도 했으며, 일제 시대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오산학교(현 오산중학교) 4대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보광동 신교사(新校舍) 건립 건축비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

친일 단체에 적극 참여하다

조선 대자본가로 성장하던 최창학은 서울(경성)로 이사하면서 조선총독부와 '황국신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각종 친일 단체 임원과 '대동아전쟁'을 지원하고자 국방 헌금 납부 등에 앞장섰다.

최창학은 1938년 조선방공협회(朝鮮防共協會) 경기도연합회 지부·서대문지부 평의원을 맡아 활동하면서, 공산주의 세력의 항일 운동을 차단하기 위해 맹활약했다. 1938년 4월 친일신문 매일신보사 주주발기인과 상무취제역으로 활동하고,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하 정총 조선연맹) 발기인, 1939년 2월 11일 경성부 육군지원자 후원회에 김연수(경성방직 사장), 박흥식 등과 함께 이사로 선출되었다.

일련의 활동은 전시총동원의 통제 강화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그는 친일 협력 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로, 친일 친목 단체 구일회(九日會) 회원으로, 1939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운동 위원회 및 간사회 평의원까지 친일활동 최전선에 서있었다. 1941년 9월 7일 최창학은 임전대책협의회 강연회에 참석하고 '총후봉공(銃後奉公)은 채권으로부터'라고 외치면서 채권 가두 유격대원으로 활동했다.

최창학은 정총 조선연맹 평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일제가 요구하는 매일 아침 궁성요배(宮城遙拜), 신사참배(神社參拜) 장려, 선조(祖先)의 제사 장려, 가능한 매일 황국신민의 서사 낭독, 국기의 존중 게양의 장려, 일본어 생활 장려, 비상시 국민생활기준양식의 실행, 국산품 애용, 철저한 소비 절약과 저금 장려, 국책 응모(國債應募) 권장, 생산 증가와 군수품 공출, 자원의 애호, 근로보국대의 활약 강화, 1일 1시간 이상 근로 증가의 장려, 농산어촌 갱생 5개년 계획의 완전 실행, 전가정 근로, 군인의 환송영, 부상병의 위문, 출정 군인 및 순국자 유가족의 위문과 가업 보조, 가능한 매일 순국자 영령 묵도, 유언비어 및 간첩 경계, 방공방첩의 협력 등을 직접 참여하거나 선전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활동들에 대해 일부 친일파들은 '일제에 의해 강요되었다'고 변명들을 늘어놓지만, 천만장자로 칭송 받았던 최창학에게 예외는 아닐까.

▲ 최창학, 기관총 2정을 '국경 방공을 위해' 기증했다.
ⓒ 전갑생
그런 사실을 증명해 주는 뚜렷한 증거로,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확실하게 드러나는 최창학의 친일 행적들이 있다. 1940년 6월 3일 시국운동비 5만 원, 애국기 4만 원, 정총 조선기금 10만 원을 내놓으면서 '대동아전쟁'을 직접 지원하게 된다. 1942년 9월 6일 남방군인용 부채 천 개를 헌납하기도 했다.

반민특위 와해로 단죄되지 못해

친일협력자 최창학은 1945년 12월 조선광업중앙관위원회 인계이사로 참여하고, 해방 이후 일본인 광산 관리 문제 등을 논의한다고 하면서 부를 축적해 갔다. 1949년 10월 제2차 전국광업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어 명성을 얻었다.

반민특위 직전에 최창학은 1948년 김구 선생과 임정 등이 숙청 대상자로 지목하여 처단하려고 하였다. 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 와해로 최창학도 단죄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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