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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서운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는 채수영씨.
ⓒ 오마이뉴스 윤성효

"조국이 힘이 없어 끌려간 것인데, 부끄러우려면 조국이 부끄러워야지,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일제시대 정신대에 끌려간 사실에 대해 주변사람들이 '감추고 싶지 않느냐'고 물으면 곧잘 이렇게 대답했던 정서운(82. 진해) 할머니. 그는 지금 보름째 마산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이고, 병문안을 왔던 채수영(33. 사천)씨가 병실을 지킬 사람이 없어 열흘째 간병을 하고 있다.

평소 몸이 불편했던 정 할머니는 지난 17일 침대에서 떨어져 대퇴부 골절상을 입었다. 곧바로 병원에 입원해 아직도 중환자실 신세다. 당뇨와 내과질환이 있어 수술도 하지 못한 상태이며, 지금은 욕창이 생겨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다.

정 할머니의 가족은 30대 후반에 재혼한 남편인 할아버지 뿐이다. 할아버지도 몸이 불편해 간호를 할 수 없는 처지. 이들 부부 사이에 자식은 없다. 할아버지의 조카가 와서 채씨와 가끔 교대를 할 정도다.

채씨는 할머니의 거의 모든 병수발을 들고 있다. 식사도 챙기고 기저귀도 갈며, 욕창이 있어 수시로 등을 두드려주어야 하고, 추를 매달아놓은 다리도 주물러 주어야 한다. 불면증이 있는 할머니는 30분을 자지 못할 정도이기에, 채씨는 야심한 밤에도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병원 관계자들도 처음에는 자식도 아닌 데다 남자가 와서 간병을 하고 있다며 의아해 했다. 채씨는 '정신대할머니와 함께 하는 경남도민모임' 회원으로, 입원 며칠 뒤 병문안을 왔다가 병원을 떠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채씨는 "소식을 듣고 와보니 할아버지 혼자 간호를 하고 계셨는데, 할아버지는 더 보호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면서 "지금 준비해야 할 시험이 있고 매일 내일까지만이라고 했는데, 지킬 사람이 없다보니 떠날 수도 없는 처지가 됐다"고 말했다.

아버지 구하기 위해 정신대 자원, 몸에 20여곳 칼 자국 있어

할머니와 채씨의 첫 만남은 올해 6월부터다. 정 할머니가 경상대에서 강연을 했는데, 그 때 강연회를 들었던 채씨가 감동을 받아 자주 찾게 되었던 것. 자원해서 간호를 하고있는 그에 대해 주변에서 이상한 눈으로 보자, 채씨는 얼마 전 병원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올려 도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정서운 할머니는 하동 악양 출신이다. 일본이 '정신대는 없었다'고 오리발을 내밀 때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증언을 했던 할머니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 정신대 할머니들은 과거가 밝혀지는 사실을 꺼리고 있어 나서지 않았지만 정 할머니는 당당히 나섰던 것.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 참석해 마이크를 잡기도 했던 할머니다.

정 할머니는 1930년대 말 정신대에 끌려가 6년간 지냈다. 일제는 놋그릇까지 수탈해 갔는데, 그녀의 부친은 들판에 구덩이를 파서 놋그릇을 숨겨놓았고 제삿날 제기로 쓰기 위해 꺼내오다 일본경찰에 들키고 말았다. 아버지는 경찰서에 붙들려 갔고, 16살이던 그녀는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구해낼 수 있느냐'고 면사무소 서기한데 묻자 서기가 '일본 공장에 가면 풀어준다'고 해서 갔던 것이 정신대였다고 말했다.

정 할머니 집안의 내력을 살펴본 강동오 하동 매암차문화박물관 관장은 "동네 할아버지들에게 물어보았더니 당시 20마지기 논을 갖고 있는 중농이었고, 나름대로 넉넉하게 살았다고 한다"고 말했다. 정신대에 끌려갔던 할머니는 중국과 태국, 베트남에서 지냈다. 일본군의 성노리개와 학대에 못 이겨 아편과 마약까지 했다. 지금도 그녀의 몸 20여 곳에는 일본군이 낸 칼 자국이 남아 있다.

그녀의 증언을 들었던 강동오 관장은 "하루에도 몇 명의 일본군을 상대했는지 모른다고 하며, 너무 고통이 심해 일본군이 주는 주사를 맞았는데 뒤에 알고 보니 마약의 일종이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강 관장은 "그 뒤 할머니는 혼자서 집에 있으면서 마약을 끊었다고 하고, 한동안 금단증세로 고생을 하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 할머니는 일본과 중국 미국에서도 여러차례 강연을 통해, 정신대의 실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특히 중국 북경 강연 때의 일화가 유명하다. 하루는 그녀가 머물고 있는 북경의 한 호텔에 일본의 한 장관이 같이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장관의 방을 찾아갔다는 것. 할머니의 말로는 몸에 난 흉터를 보여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 정서운 할머니는 다리에 큰 추를 매달아 놓아 움직일 수도 없다.
ⓒ 오마이뉴스 윤성효
간병인 자원봉사, 후원금 등 도움 절실

할머니는 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하자 국내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간 할머니는 이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한 남자와 결혼을 했고, 그 남편은 30대 중반에 죽고 말았다. 그 뒤 40대 초반에 지금의 남편과 재혼을 해서 살고 있다.

강동오 관장은 "언젠가 할머니한테 지금까지 결혼생활이 어떠했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는 '행복했다'는 말을 하셨다"면서 "부끄럽다고 감춘다고 해서 과거의 아픔이 지워지는 게 아니고, 당당하게 주장해야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을 곧잘 하셨다"고 전했다.

29일 저녁, 강 관장은 하동에서 마산까지 달려왔다. 할머니의 수술 여부 등 결정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하는 게 더 부담이 된다고 느껴 수술을 하지 않고 지내기로 했다. 수술을 하지 않을 경우 앞으로 서너달은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상황이다.

강 관장과 채씨는 앞으로 간병뿐만 아니라 만일 장례를 치러야 하는 일까지 생길 경우 등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렇다고 간병인을 둘 처지도 못되며, 병원비도 부담이다.

강 관장은 "고민 끝에 <오마이뉴스>에 연락을 했다"면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자원봉사 내지 후원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정신대할머니와 함께 하는 경남도민모임'에서 돕고 있지만, 20여명의 회원들이 돌봐야 할 할머니들이 많기 때문에 정 할머니만 도울 수는 없는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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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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