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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7월 가수가 되기 위해 고향인 충청도 예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던 청년 고명득(高明得)은 드디어 원하던 대로 가수가 되어 첫 음반을 세상에 내놓았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라는 가사 첫 대목으로 유명한 <선창>[조명암(趙鳴岩) 작사·김해송(金海松) 작곡·1941]의 주인공인 가수 고운봉(高雲峰)(1920-2001)의 등장이었다.

태평레코드에서 데뷔한 고운봉은 <남강(南江)의 추억>[무적인(霧笛人) 작사·이재호(李在鎬) 작곡·1940] 등을 불러 인기를 모은 뒤 1940년 9월부터는 오케레코드로 옮겨 음반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1941년에는 대표작 <선창>을 불러 가수로서 입지를 굳혔다. 이듬해인 1942년에는 다시 콜럼비아레코드로 자리를 옮겨 활동을 이어 갔는데,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처음 발표한 곡이 바로 앞서 본 <통군정노래>였다.

그런데 지난 2001년 8월에 고운봉이 세상을 떠났을 때 각 언론에 소개된 그의 이력을 보면, 태평레코드와 오케레코드에서 전속가수로 활약했다는 내용은 있었으나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작품을 발표했다는 사실은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콜럼비아레코드에서 활동한 약 1년 반 동안 발표한 노래가 열 곡이 채 안 되고 그 가운데에 특별히 인기를 끈 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넘어갔을 테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특별히 드러나는 내용이 없는 동시에 그다지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내용이 있기에 그러했을 수도 있다.

<통군정노래>에 이어 1943년에 고운봉이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발표한 노래 가운데 <행복한 이별>[이가실(李嘉實) 작사·한상기(韓相基) 작곡·히라카와 히데오(平川英夫) 편곡·음반번호 40905]이라는 곡이 있다. 제목만 보아서는 유행가에서 흔히 다루는 소재인 이별을 애상적으로 노래한 작품인 듯하기도 하지만, 가사를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이별이 행복하다고 하는 역설적인 표현은 바로 그 이별이 나라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군국주의적 발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별을 생각하면 우는 법도 있으나/ 희망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몸 성히 잘있거라 소식을 전해 주마/ 어머님 사랑 속에 행복이 온다
바다의 길이 멀어 가는 날이 멀다면/ 잘되어 오는 날도 멀고 멀리라/ 이 몸이 살아 오거나 이 몸이 죽어 오나/ 나라에 은혜 갚긴 한가지 정성
하늘의 비둘기는 두 날개를 흔들고/ 떠나는 정거장엔 기를 흔들어/ 행복을 노래하세 사랑을 노래하세/ 나랏님 큰 사랑에 봄꽃이 핀다
(가사지 내용을 현재 맞춤법에 따라 바꾸어 표기한 것이다)


직접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항구와 기차역을 배경으로 묘사되고 있는 노래 속 이별 장면은 징병이나 징용과 관련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생사를 기약할 수 없어 어쩌면 영원한 이별이 될 수도 있는 그 순간이 행복한 것으로 그려지는 것은 결국 나라의 은혜, 나랏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인데, 여기서 나랏님이 가리키는 대상이 무엇인지는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행복한 이별>처럼 전면적으로 군국주의를 표현하고 있는 것과는 경우가 좀 다르지만, 고운봉이 1942년 12월 신보로 발표한 <황포강(黃浦江) 뱃길>(음반번호 40897) 또한 군국가요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남려성(南麗星) 작사, 손목인(孫牧人) 작곡에 역시 히라카와 히데오(1906-1995)가 편곡을 담당한 <황포강 뱃길>은 전체적으로 중국 상하이(上海)의 이국 풍정을 노래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제3절에 ‘아세아’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물 위에 꽃잎 실은 황포강 뱃길/ 쌍돛대 흔들흔들 휘파람 싣고/ 갈매기 불러 보자 구름을 불러 보자/ 아 가고 싶은 남쪽의 항구
하늘에 별을 뿌린 황포강 뱃길/ 뱃머리 가물가물 별 하나 싣고/ 희망을 불러 보자 청춘을 불러 보자/ 아 보고 싶은 강남의 새벽
물결에 달을 띄운 황포강 뱃길/ 달빛이 출렁출렁 노를 적시며/ 남북을 바라보자 동서를 바라보자/ 아 아름다운 아세아 하늘
(가사지 내용을 현재 맞춤법에 따라 바꾸어 표기한 것이다)


콜럼비아레코드 시절에 고운봉이 발표한 것으로 현재 확인되는 노래는 단 여섯 곡. 그 가운데 <통군정노래>, <황포강 뱃길>, <행복한 이별> 세 곡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군국가요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당시 부득이한 측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라도 드러내고 싶지는 않을 만한 상황이라 하겠다. 하지만 올바른 이해와 비판을 위해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니, 60년이 지난 마당에 군국가요를 다시 볼 필요가 있는 이유는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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