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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벌써 몇 시간을 움직이지 않는다. 귀뚜리가 울어제낄 모양인지 하늬바람은 어설피 풀섭을 에돌아 오지만 가을볕이 겨운 듯 숨소리조차 귀찮다.

내가 김이선(89) 할아버지를 처음 뵌 것은 1주일 전 해질 무렵이었다. 수인산성과 병영성을 둘러보기 위해 가는 길에 하멜이 살았다는 집터라도 볼 요량으로 400해를 살았다는 은행나무를 찾았다.

▲ 휴전회담 북측대표 남일이 파괴를 막았다는 병영성지
ⓒ 김대호
하멜 일행은 병영에 많은 흔적을 남기고 갔다. 병영의 도랑은 사람이나 마차가 다니는 위쪽이 좁고 물이 흐르는 아랫부분은 넓게 설계되어 골목길에서 통행하기 쉽게 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네덜란드 식이다. 또 그들이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돌담은 빗살무늬처럼 잔돌을 엇갈리게 쌓은 것이 특징으로 이 역시 네덜란드 식이다.

할아버지는 꼭 1주일 전 그 자리에서 광합성이라도 하는 양 맛나게도 볕을 쪼이고 있었다.

"102살이여"
"그럼 어르신이 순종황제 돌아가실 때 지금 제 연배였다는 이야긴데, 저 놀리시는 거죠?"

몇 번이나 연세를 다시 여쭤보니 이제는 숫제 역정까지 내시며 호통을 치신다. 때마침 은행나무 옆 병영교회 마당을 쓸고 계시던 분에게 여쭤보니 노환으로 기억력이 흐리신 탓이라며 올해 89세 되셨단다.

김이선 할아버지는 내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외국사람 만치로 생긴 사람들이 여그서 두집이 살었는디 이사 가브렀어. 여하튼 그 사람덜 손재주 하나는 기가멕히게 좋았어"

▲ 하멜일행의 후손들 이야기를 전해 준 김이선할아버지
ⓒ 김대호
이곳에서 하멜 일행의 후손들이 살았다는 것이다. 하멜은 <하멜표류기>를 통해 조선체류 기간 13년 중 병영성에 억류되어 8년을 보내면서 일행 중 3명이 이곳 처녀와 결혼을 해서 후손을 남겼다고 한다.

하멜 일행은 1653년(효종4) 제주도에 난파했다가 1666년(현종7) 8명이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탈출한 후 일본정부의 외교중재로 조선에 남은 8명 중 1명(얀 클래센·당시 49세)을 제외한 7명이 송환됐다.

할아버지 이야기는 남원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얀 클래센의 후손들 외에 또 다른 하멜 일행의 후손이 강진에 거주했다는 이야기다. 당시 조선 효종은 네덜란드인을 남만인이라고 불렀던 점을 착안해 하멜 일행에게 남(南)씨라는 성씨를 부여했으며 훈련도감에 편재했다.

전남대 김태진 교수는 '하멜과 전라도'라는 글을 통해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네덜란드 출신 하멜 일행 남북산, 남이안 등은 '병영 남씨(兵營 南氏)의 조상이며, 이들의 후손들이 주로 병영, 작천, 남원 등지에 살다가 다른 곳으로 이주해 갔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남북 휴전 회담 북측 대표였던 남일(南日)을 하멜 일행의 후손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 병영성 등 이 지역 문화재가 훼손되지 않은 것은 병영출신으로 알려진 인민군 장교 남일이 이를 막았기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 하멜일행이 쌓은 네덜란드식 빗살무늬 돌담
ⓒ 김대호
이 궁금증은 다산초당이 있는 전통찻집 다신계에서 우연히 만난 윤동환 강진군수를 통해 해소할 수 있었다. 윤 군수는 아직도 하멜 일행이 조선에 남기고 간 후손들이 강진에 살고 있다며 이들은 머리털이나 피부색은 우리와 같지만 몸에 털이 많고 그 색이 흰빛을 띠고 있고 눈빛이 푸른색이라고 말했다.

윤 군수는 "네덜란드에서 온 장관들이나 방송국에서 제일 궁금해하는 것이 이 부분이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설득해 보았지만 본인들이 극구 알려지는 것을 꺼려해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도 애써 하멜 일행의 후손들을 찾아가지는 않기로 했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일로 인해 그들이 상처 입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산초당을 내려오면서 본국 송환을 거부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택해 남원에 터를 잡았다는 네덜란드인 얀 클래센(Jan Claezen·남북산(南北山))을 생각했다.

▲ 하멜의 흔적을 찾아 답사여행 온 청년들
ⓒ 김대호
문득 혼자 남겨졌을 때 겪게 되는 당혹스러움은 어떤 것일까? 엄마는 빨래터에 기저귀를 들고 나가고 초가지붕 용마름을 비낀 소낙비가 처마 끝으로 또옥~똑 생채기를 남길 즈음 문득 잠에서 깬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기 전 보이는 허무한 표정에 실린 서글픔일까?

이등병 시절 휴전선 넘어서 들려오는 이북노래를 자장가 삼아 고참병은 코를 골고 있고 갑자기 방송이 '뚝' 그치고 어둠 속에서 '와삭'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올 때 느꼈던 공포처럼 소름 끼치는 것일까?

'이제가면 언제 오나' 친구의 저승길에 곡소리처럼 상여소리를 메기던 오씨 아저씨를 우연히 군내 버스 정거장에서 발견하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진 모습에 눈물이 앞을 가려 차에서 내릴 수 없었던 애달픈 그리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나는 은행나무에 400년 각인된 푸른 눈의 남편을 기다리던 검은 눈의 아낙과 푸른 눈의 아이들을 보고 온 것일지도 모른다.

▲ 병영성 망루 풍경
ⓒ 김대호
문득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번 주는 잠시 가족들과 떨어져 하멜이 쌓았을 빗살무늬 돌담을 휘감아 안고 서있는 은행나무 밑에서 늘어지게 낮잠이라도 청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사이 피부가 풀잎처럼 광합성을 해 따순(따듯한) 볕을 가슴에 충전하고 나면 그 속에서 용솟음 치는 따뜻한 삶의 기운을 저 푸른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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